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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39화 (39/233)

39화. 공적인 척, 사적인 목적

축 늘어진 눈썹, 잘 정돈된 자칭 블론드, 입가에서 떠나지 않는 미소.

언뜻 무해해 보이는 저 의도된 겉모습.

참으로 순진하게도 전생의 사이나는 저 남자가 나름 준수하고 호탕하면서도 착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데이트라니…. 발데즈 영애와 그런 사이도 아니고요. 하하.”

“둘이 약혼 관계 아니에요? 데뷔탕트 볼 때 파트너도 하시지 않았나요?”

“…….”

그럼 대체 둘은 무슨 사이인 건가. 참 이해가 가지 않는 사이네.

그러거나 아니거나 굳이 왜 사이나에게 저걸 알려주는지도 모르겠다. 알 필요도, 알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둘이 잘 어울려요. 응원할게요.”

“…….”

그녀의 기색을 잘 읽은 건지, 루퍼트가 조지 홀랜더로부터 그녀를 잘 가리며 보위했다.

저보다 덩치 큰 남자 하나만 있어도 이토록 얌전해지는 남자를, 그녀는 그리 어려워했었다.

새삼 믿기지 않는 과거였다.

* * *

불쾌한 찻집에서의 만남 뒤로, 엘리자베스에게선 별다른 연락이 없었다.

다행이라고 할지, 이상하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에 관해서 딱히 신경 쓰고 싶지는 않았다.

조금 궁금하긴 하다. 만약 사이나가 전생에서처럼 조지 홀랜더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엘리자베스와 이어지게 되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자신은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일까.

그래도 한때 친구로 지냈던 사이로서, 구렁텅이가 뻔한 미래에 대해서 경고라도 해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얼마 전 느꼈던 엘리자베스의 묘한 행각에 의구심이 생긴 터라 그런 생각도 쏙 들어갔다.

‘둘이 약혼이 오가던 사이라고 했는데, 그런 남자를 굳이 왜 나에게 소개시켜 주려고 했을까?’

머릿속으로 뻔한 대답이 하나 스쳐 지나가기는 했으나, 애써 밀어두었다.

‘설마, 그건 아니겠지.’

그런 와중에 유모가 들어왔다.

“아가씨.”

손에 은쟁반을 들고 있는 것을 보니 중한 서신을 들고 온 듯했다.

그런데 그것을 보자마자 욜리가 갑자기 뛰어오더니 한곳에서 뱅뱅 돌았다.

“뭐야, 욜리. 왜 그러니?”

“반가운 소식인 줄 녀석도 아는가 봐요. 호호.”

꼬리를 탁탁 치며 발을 구르는 것이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느낌이면 모를까.

은쟁반 위에는 하나의 봉투만 있었다.

정말 고이 모셔온 것 같은 느낌이다.

‘대체 누가 보낸 거기에 이래?’

색은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하이얀 백색의 봉투지만, 펄감이 들어간 고급 광택지였다. 심플하지만 비싼 고급품이다.

그리고 밀랍이 검은색이었다. 검은색 밀랍이라니…. 이 역시 특이했다. 그런데 밀랍 안에 찍힌 문양을 보자 왜 검은색이어야 했는지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날개 달린 흑사자가 이를 드러낸 옆모습을 상징으로 삼은 가문은 하나뿐.

크레이머 공작가다.

당연하게도, 이것은 크레이머 공작으로부터 온 편지였다.

사이나는 조심스럽게 인장을 뜯고 내용물을 꺼내어 읽었다. 그녀로서도 크레이머 공작이 왜 서신을 보냈는지 전혀 추측되지 않았기에 내심 궁금했다.

“…….”

추측이 되지 않았던 만큼, 정말 의외의 내용이었다.

공작이 미혼의 몸이다 보니 이런 서신 하나에도 사람들은 마구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유모도 그런 사람 중 하나임이 분명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안의 내용을 알고 싶어 심히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유모가 기대하는 그런 내용 전혀 아니야.”

“네? 제가 기대하는 내용이 뭔데요?”

“그런 거 말이야. 속된 거.”

“속된 거요?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그 연애니 호감이니 하는.”

“어머, 저 전혀 그런 거 기대 안 했는데요?”

거짓말. 저런 반짝거리는 눈을 하고서 기대를 안 했다고?

“무슨 내용인데 그러세요?”

“기대 안 했다며 뭘 물어.”

“기대한 거랑 궁금한 거랑은 다른 문제죠.”

음, 그건 또 맞는 말이네.

“뭘 좀 부탁하셨어.”

“네?”

“아를어 관련해서 뭘 좀 봐줄 수 있냐고 하시네.”

“어머, 정말요? 그럼 공작 각하께서 아가씨를 초대하신 거예요?”

유모의 눈이 더 초롱초롱해졌다.

“아니, 그런 사적인 목적이 아니래도?”

“지극히 사적이죠, 무슨 말씀이에요. 각하쯤 되시는 분이면 전문가를 얼마나 많이 아시겠어요. 그런데도 아가씨를 요청하신 거잖아요?”

“…….”

사적인 목적이라는 말에는 공감이 안 되는데, 전문가 관련한 말에는 또 굉장히 수긍이 갔다.

물론 이는 사이나가 자신의 아를어 실력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상태라 가능한 것이기는 했으나, 알았다고 해도 의외라고 생각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디서 실력이 검증된 것도 아닌 어린 소녀에게 자문을 구하다니 말이다.

그의 지위는 높디높고, 어떤 유명한 학자라고 하더라도 그의 요청을 들으면 흔쾌히 응할 텐데 말이다.

‘전에 미친 듯이 이쪽만 팔 때는 없던 일들이, 어째 의식적으로 덜하려고 하니까 더 연결되는 것 같네.’

급박한 요청이었던 걸까.

답장을 보내자 빠른 시일 내에 찾아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공작의 회신이 바로 또 왔다.

거기엔 넌지시 아를-프로메사의 물품들과 모레프를 볼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말도 적혀 있어서 좀 의아해졌다. 마치, 눈앞에서 당근을 흔들어대는 보상성 발언처럼…….

‘공작씩이나 되는 사람이 그럴 리는 없겠지…….’

전생에 이런 일이 있었다면 정말로 사이나는 좋아서 방방 뛰며 온 방을 굴러다녔을 것이다.

“꺄악! 모레프를 초근접으로 볼 수 있어!”

“만져볼 수 있을지도 몰라!”

“크레이머 공작가의 고대 물품이라니! 뭐가 있을까! 너무 궁금해!”

괴성을 지르며 유리에게 온갖 자랑을 해댔겠지.

삶이란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욜리?”

사이나는 피식 웃으며 욜리의 이마를 쓸었다. 손바닥에 머리를 스윽 비벼오는 것이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는 뜻 같아서 더 열심히 만져주었다.

* * *

공작은 비밀리에 마차를 보내왔다.

튼튼해 보이기는 하지만 가문의 문장이나 특징이 없어 구별이 쉽지 않은 마차였다. 하지만 내부로 들어가자 신경을 쓴 티가 났다. 쿠션도 내장제도 모두 고급품이었다.

사이나가 의자에 앉고, 수발 하녀인 스밀라도 따라 들어와 자리했다.

한참을 달려 거의 도착했다 싶을 때쯤, 한쪽에 놔둔 바구니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으앗!”

“꺅!”

사이나와 스밀라가 모두 놀라 소리를 질렀다. 비명 소리에 마차가 갑자기 멈추었다.

“아가씨?!”

루퍼트가 급히 문을 열며 안쪽을 살폈다가 욜리 녀석을 보고는 바로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헛. 이 녀석이 몰래 따라왔습니까?”

아를어 번역 요청을 받으면 필요할 것 같아 언어표와 관련된 서적들을 바구니에 몇 권 챙겨왔는데, 그 안에 욜리가 숨어들었을 줄이야.

그렇지 않아도 외출 준비를 하는 동안 계속 문 앞을 맴돌며 따라다니기에 왜 그런가 했더니 이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사이나는 어이가 없어서 한숨을 내쉬었다.

“욜리. 대체 여긴 왜 따라왔어?”

사이나가 이유를 물으며 욜리를 추궁하자 녀석은 못 알아들은 척 꼬리를 살랑거리며 딴청을 피웠다. 하지만 이런 태도가 오히려 사이나로 하여금 더 확신을 갖게 했다.

이 녀석은 분명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다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평범한 동물은 아닌 것 같더니만.’

정체가 뭘까….

사실 고민한들, 불필요한 일이다. 이상하다고 해서 녀석을 내보낼 생각은 없고, 정체를 알아낼 방법도 없으니까.

그저 따라온 이유가 나름 있겠거니 생각하는 게 속 편했다.

“아-주 높으신 분 댁에 가는 거니까 얌전히 있어. 말썽 피우고 돌아다니면 절대 안 돼. 알겠니?”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발을 모아 쪼그려 앉는 모습을 보자 또 어이가 없어졌지만, 사이나는 재차 경고했다.

“안 그러면 너 마차에 두고 내려버린다?”

살랑거리던 꼬리가 뚝 멈추더니 녀석이 귀를 추욱 늘어뜨렸다. 올려다보는 눈망울에는 애잔함이 가득하다. 나 참, 아주 잔망스러운 녀석이다.

마차가 잠시 멈추더니 크레이머 공작가의 타운 하우스 정문을 넘었다.

영지에서 보내는 비중이 더 큰 크레이머 가문이지만, 그래도 워낙 유서 깊은 공작가다 보니 황도 저택의 부지도 만만치 않았다.

드보프가도 부유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분위기가 매우 달랐다. 약간 아기자기하면서 고풍스러운 느낌이 나는 드보프가의 저택과 달리 크레이머가는 웅장하면서도 고고한 분위기를 풍겼다.

정문부터 시작된 엄청나게 키가 높은 침엽수가 나란하게 이어진 길은, 숲 안에 숨겨진 비밀의 저택을 찾아 들어가는 기분이 들도록 했다.

마차 문을 열자 바로 청량한 나무의 냄새가 폐부 가득 스며드는 것이, 황도 한복판이 아니라 어디 외곽 숲으로 들어온 기분 같기도 했다.

‘와, 신기해.’

낯설고 낯설다.

엘리자베스가 공작부인이 되고 크레이머가의 타운 하우스가 드디어 개방되는가 하며 사람들이 나름 기대에 들떴었는데, 그녀는 외부 파티 참석에는 열정적이었으나 자체적으로 연회를 주관하지는 않았다.

그걸 두고서도 이런저런 말이 많았었지.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마차 문 열겠습니다.”

“고마워요, 루퍼트 경.”

이제는 꽤 익숙해진 루퍼트의 안내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려섰다.

욜리는 다시 바구니 안에 넣어 스밀라에게 맡겼다. 머리 위로 천을 덮으며 ‘얌전히 있어.’ 재차 경고했으나 말을 들을는지는 모르겠다.

그동안 그리 심각한 말썽을 부린 적은 없으니 믿어보는 수밖에.

“안녕하십니까. 드보프가의 영애님. 저는 크레이머가의 타운 하우스를 관리하고 있는 로이터라고 합니다. 크레이머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각하께 손님이 도착하신 것을 곧 알릴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로이터의 안내를 따랐다. 분명 응접실로 향하는 길이리라. 루퍼트는 기사 대기 공간으로 따로 안내되어 사라졌고, 스밀라는 바구니를 들고 뒤를 따르는 중이었다.

갑자기 로이터가 멈추어 서더니 고개를 숙였다가 세웠다.

“각하.”

가서 알린다던 크레이머 공작이 계단을 따라 내려오는 중이었다.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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