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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54)화 (154/154)

154.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일단 무사히 제 앞에 있는 것에 대해 안도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했다. 플로라는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는 하녀들을 보고 있기가 안쓰러워 물러나게 한 뒤, 시몬과 산책을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무서운가.”

시몬도 엘라와 마리네드가 저를 볼 때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하기야 무서울 법도 했다. 아무리 대마법사가 있는 탈란 공작가에서 일하는 하녀라도 제국을 손에 쥐고 있는 황제를 눈앞에 마주하고 떨리지 않을 리 없었다.

“제 옷차림새가 이래서 그럴 거예요.”

“왜?”

“흙투성이에 머리도 제대로 손질되지 않았고…… 해서, 시몬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주게 될까 봐. 뭐 그런 마음 아닐까요? 아마 엄청 자책하고 있을 거예요.”

시몬은 플로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괜한 걱정을 하는군.”

“…….”

“……그럴 일은 없는데. 항상 예뻐서 말이지.”

칭찬은 들을 때마다 설레고 부끄럽다. 예쁘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만 같다. 특히 시몬이 해 주는 말이라면 더더욱.

“다음에 만나면 걱정할 필요 없다고 일러 주어야겠군.”

플로라가 대답 대신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이자, 시몬이 맞잡은 손을 좀 더 세게 쥐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얼 했기에 훈련복이야?”

“오전에 럼 경과 사르트 경이 오셨었어요.”

“대련을 했어?”

“네.”

“진검으로?”

“네. 활쏘기로 내기도 했어요.”

시몬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다친 곳은 없는지 눈으로는 몰래 그녀를 살폈다. 럼과 사르트가 노련한 기사라는 건 시몬도 알았다. 종종 카신이 하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도 있었으니. 그들이라면 문제가 없도록 알아서 잘 대처했으리라.

“대련은 누가 이겼어?”

“활은 제가 이겼고, 진검으로는 럼 경이 이겼어요.”

“재미있었겠군.”

“하나라도 이겨서 다행이에요.”

“난 플로라만큼 활을 잘 다루는 기사를 본 적 없어.”

“……이제는 쓰질 않으니 실력이 많이 녹슬었답니다.”

플로라가 살짝 주눅 든 얼굴을 하자, 시몬은 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플로라는 기사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은 거야?”

플로라는 눈을 깜빡이며 시몬을 보았다. 종종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공작가에 적응하고 귀족 사회에 대해 차츰 알게 되니 그럴 수 없겠다는 걸 알았다. 기사로 돌아가게 된다면 시몬의 곁에는 설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진저리가 쳐졌다.

“추억으로만 간직하는 지금도 괜찮아요. 가끔씩 취미로 기사님들과 대련도 하고요.”

언뜻 아쉬워하는 얼굴이 보이긴 했지만, 기사로 돌아가는 건 시몬도 바라는 일이 아니었기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결심을 하고 계획까지 완벽히 세웠는데, 막상 그 계획을 실행하려고 하니 별것이 다 두려웠다. 마치 처음 그녀를 마음에 품고, 자신의 마음을 고백할까 말까 고민했던 시절의 모습과 비슷해진 것 같았다.

“같이 사냥대회라도 가고 싶군.”

“정말요?”

“리비에르가 허락한다면.”

안 그래도 그녀를 위해 종종 사냥대회라도 함께해야 하나 생각하던 참이었다. 플로라가 하네칸에서 유명인사가 되고 난 뒤, 활을 배우고 싶어 하는 기사들이 늘었다. 워낙 인기가 없어서 몇 개 없던 성 내의 원거리 훈련장이 항상 만원이라 확장 공사를 해야 하나 고려할 정도였다.

그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사냥대회도 함께 가고, 활을 가르쳐도 활력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마 당장은 어려워도 미래에는 이루어질 수 있는 꿈이 아닐까. 그렇다면 플로라도 만족하고, 그녀의 행복을 보는 자신도 만족하고, 기사들 또한 만족할 수 있겠지.

상상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녀와의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이토록 자연스러워지다니. 그녀의 마음에도 확신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몬은 웃음을 머금었다.

“차를 한잔하고 가시겠어요?”

시몬과 플로라는 꽤 오랫동안 걸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서 걸음이 자연스레 느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정원 산책은 끝이 났다. 어느덧 저택의 앞에 도착해 플로라는 시몬을 올려다보며 눈을 반짝였다.

“바라고 있었어.”

“하지만 얼른 돌아가셔야 하는 것 아니에요?”

“괜찮아.”

“이제 에르네 경이 알게 되지 않았을까요?”

플로라가 눈을 데구르르 굴리며 걱정해 주는 모습이 귀여웠다. 앞으로 그녀와 함께하게 된다면 이런 소소한 행복 같은 건 매일 누릴 수 있겠지. 상상만 해도 숨이 막힐 정도로 벅차올랐다. 저택으로 향하는 한 걸음, 한 걸음에 심장이 주저앉을 것 같았다.

저택 앞에 당도해 시몬이 문을 열어 주었다. 열린 문 너머로 무심코 시선을 던졌던 플로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어…….”

눈앞에 보이는 낯선 풍경에 사고회로가 정지한 것만 같았다.

가장 먼저 눈부신 하얀색 드레스와 길게 늘어진 우아한 레이스가 시선을 확 끌어당겼다.

갑자기 무슨 드레스인가 싶다가, 저 멀리 서서 누구보다도 기뻐하며 감격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하녀들을 보자 번뜩 온갖 망상이 밀려들었다.

……설마.

저택에서 지칠 때면 가끔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로맨스 소설을 읽곤 했다. 그런 데서 나왔던 청혼 장면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지나쳤다.

플로라가 눈을 깜빡이며 곁을 돌아보자, 시몬이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

에이, 설마, 라는 생각을 하던 무렵이었다. 시몬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이레나 탈란 영애.”

묵직한 목소리에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쳤다. 시몬의 목소리가 한 음, 한 음, 귓가에 나직이 울릴 때마다 눈앞이 아득해지고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이 몽글몽글해졌다.

“영애를…… 사랑하고 있어.”

담백한 목소리였지만 그도 한껏 긴장한 상태라는 것을 알리듯, 목소리 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영애와 평생 함께하고 싶어. 나한테 과분한 사람이란 걸 알면서도 자꾸 욕심이 나.”

“…….”

“나와 혼인해 주겠어?”

‘사랑’ 그리고 ‘혼인’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갑자기 만감이 교차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일이고,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라 놀라고 말문이 막혔지만, 가슴이 떨리고, 설레고, 또 벅차서…… 왈칵 눈물이 날 것도 같았다.

이레나는 시몬이 들고 있는 반지를 바라보다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무언가 대답을 해야 하는데, 나 역시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대답해야 하는데, 목이 묵직하게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내 혹시라도 이게 꿈일까 봐, 번복할까 봐,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몬이 늘 옆에 있는 지금도 그녀는 바보처럼 모든 것이 한순간의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순간에 손에 쥔 행복인 만큼 그 불안함도 컸다.

“저는 아직…… 시몬에게 많이 부족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플로라는 와락 시몬에게 안겼다.

“……절대 그렇지 않아. 영애는 훌륭한 반려자가 될 거야. 제국민에게도 훌륭한 황후가 될 거고.”

시몬이 등을 다독여 주며 그녀를 다정하게 달래었다.

“제가 더 노력할게요.”

“사랑해, 이레나.”

“저도 사랑해요, 시몬. 평생 함께할게요.”

플로라가 울먹이는 얼굴로 고개를 들어 시몬을 올려다보았다.

이 사람을 혼자 좋아해서 가슴이 먹먹하고, 울적했던 시절부터 반강제로 그를 떠나 그리워했던 시절, 그리고 아무 걱정 없이 마음껏 사랑했던 날들까지 모두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먼 길을 돌아왔으나, 이제는 그 마음이 통하고 있다는 게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얼떨떨하고 신기했다.

곧 시몬이 플로라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이어 준비한 반지를 손에 끼워 주고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시몬.”

“평생을 약속해 줘서 고마워. 이레나 영애.”

분명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들을 몰래 숨죽여 지켜보고 있던 마리네드와 엘라도 감격의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플로라는 시몬의 품에 폭 안겨 드레스를 보았다.

“드레스는 마음에 들어?”

“너무 마음에 들어요.”

“…….”

“언제 이런 걸 준비하셨어요? 오늘도 몰래 나왔다고 했잖아요.”

“……미안. 작정하고 나왔어.”

시몬의 대답에 플로라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제대로 갖춰 입고 오면 혹시라도 눈치챌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재차 사과했다.

“그럼…… 아버지께도 허락을 받으신 건가요?”

“그래. 드디어 리비에르도 허락했어. 허락받자마자 참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그동안 착실히 플로라와의 미래를 떠올리며 준비한 드레스였다. 그녀가 마음에 든다고 해 주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플로라가 푹 안긴 채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비볐다.

그에게 청혼을 받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때마다 이건 꿈이 아니라는 듯 손가락에 자리한 반지의 감촉이 더 크게 다가왔다.

“앞으로도 시몬을 지킬 수 있어 기뻐요.”

“서로를 지키는 거야. 나도…… 영애를 평생 지킬 거야.”

시몬과 플로라는 오래전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다는 듯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했다.

“시몬. 우리 혼인 후에는 꽃구경하러 같이 가요. 예전에 저와 약속하셨던 거 기억하세요?”

“기억하고 있어. 혼인 후에는 잠깐 여행이라도 다녀오자.”

“……좋아요!”

어쩌면 평생을 몰랐을 수도 있었던 행복이었다. 사랑 같은 건 혐오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이렇게까지 플로라가 변한 것이 전부 시몬 덕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받은 만큼 베풀어야지. 시몬을 이해해 주고, 기쁨과 아픔까지도 함께 나눌 수 있는 반려자가 되어야지.

그에게 받았던 소중한 마음 잊지 않고, 앞으로도 쭉 그의 곁에서 행복하길. 매사 그의 소중함을 잊지 않게끔 노력할 수 있기를. 플로라는 간절히 바랐다.

그녀의 남은 모든 삶에 걸쳐, 느리지만 확실히 이루어질. 단 하나의 소원이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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