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53)화 (153/154)

153.

이레나 탈란은 한동안 모두에게 큰 이슈였다. 심지어는 그녀가 입는 옷, 먹는 것, 행동까지 전부 사람들 사이로 퍼져 나갔다. 

평범한 제국민에게 그녀는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의 주인공이었고, 귀족들 사이에서도 꾸준히 말이 나올 정도로 제법 유명했다. 덕분에 센칸이 벌인 잔악무도한 실험이나 관련한 일에 연루된 고위 귀족 가문의 일은 조금씩 묻혀 갔다. 

플로라를 다른 대안으로 내세우게 된 것 같아 시몬은 별로 달갑지 않아 했지만, 플로라 그녀 스스로가 제국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세간의 이목이 몰리는 것쯤은 견뎌 낼 수 있다고 황제를 격려했다.

마르웰 가처럼 권세 높은 가문의 악행이 밝혀졌을 때 제국은 발칵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그와 관련된 범죄들, 그러니까 어린아이를 납치해 다른 대륙으로 팔아넘긴다든지, 사람을 경매처럼 내보내 사고파는 음지의 세계가 있다든지 하는 것들이 소문이 아닌 실제라는 사실에 사람들은 경계하고 두려워하곤 했다.

그런데 시몬과 플로라의 희생으로 인해 이로 인한 사회적인 혼란을 잠재울 수 있었다. 마르웰 공작은 그동안 제국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해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게 되었으나 재산과 명예를 모두 잃어 평생을 제국의 외곽에서 쓸쓸하게 살아가게 되었다.

플로라도 그런 처벌에 딱히 불만을 갖지 않았다. 제국의 아이들을 납치해 비인간적인 짓을 자행한 일에 연루된 사람이다. 살아서 저가 낮잡아 보았던 제국민들의 손가락질과 멸시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그에게는 외려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울 테니까.

이레나의 재산을 탐하고, 경매에서 직접적으로 아이들을 사고팔던 스벤타 남작은 그 가족들까지 교수형에 처하는 죗값을 치러야 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일들뿐이었지만 제국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제국민들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더 이상 같은 일들이 제국 내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받아들여지고, 평화로워질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시몬과 이레나는 조용히 사랑을 키워 나갔다. 이레나의 모든 행보가 이미 사람들에게 큰 이슈였기에 더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남들 눈을 피해 연애를 하긴 했지만, 결과만 봤을 땐 완전한 실패였다. 이미 성내에도, 성밖에도 두 사람이 연인 관계라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퍼졌기 때문이다.

이레나가 플로라라는 이름으로 불릴 때, 엄청난 실력자로 근위대에서 활약했다는 사실은 제국민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신분의 격차를 뛰어넘고 서로를 지키며 이어 나간 사랑은 암암리에 연애소설로 쓰여 퍼져 나가기도 했다.

시몬과 이레나는 잘 숨겨 왔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시선을 눈치채고 한참을 난감해했다는 건 그보다 조금 뒤의 일이다.

* * *

공작가에 마땅한 후계가 없는 상황을 알면 알수록 플로라는 바빠졌고, 이제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그녀는 여전히 펜을 쥐는 것보다 검이나 활을 쥐는 것은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종종 스트레스가 많이 쌓일 때면 동료들과 대련을 하는 것으로 해소하곤 했다.

“……어허. 이럼 안 되지.”

플로라가 집중해서 활을 쏘자 화살은 정확히 정중앙에 꽂혔다. 그러자 옆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오늘의 내기 상대는 사르트 경과 럼 경이었다. 두 사람은 정예 기사로 제국의 외곽으로 지원을 나갔다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처음엔 플로라의 신분에 대해 적응하지 못했지만, 워낙 호탕한 사람들이라 쉽게 플로라를 이레나 영애로서 받아들여 주었다.

“뭐가 안 된다는 말씀인가요? 럼 경?”

“영애께서는 우리보다 한 발 더 뒤에 물러서서 쏘는 걸로 하세요. 그게 공정해 보입니다.”

“혹 공정이란 의미를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요? 럼 경.”

새침한 플로라의 대꾸에 럼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매번 만점을 정확히 쏘는 플로라와 달리 럼은 계속 중앙에서 어긋난 표적을 맞추고 있어 상당히 아쉬운 표정을 지은 채였다.

그는 승부욕이 대단해서 어떻게든 플로라를 이겨 먹을 궁리를 하는 반면, 사르트는 모든 것을 해탈한 사람처럼 내기에 임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럼보다 더 점수가 높았다.

“내가 평소에 활을 안 쏴 봐서 그래!”

“사르트 경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네게 좀 배웠다면서?”

국경 외곽 지역으로 나가기 전, 공작가에 놀러 온 사르트에게 고작 며칠 활을 쥐는 법에 대해 가르쳐 준 것이 전부였다. 럼은 어떻게든 자신이 꼴등인 이유를 찾기 위해 혈안인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런 걸로 해요, 라고 하기엔 사르트가 억울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말을 아끼자 결국 사르트가 같은 답변을 했다.

그냥 그런 걸로 하시죠.

“럼 선배는 알렉샤 경에게도 졌다면서요.”

그리고 덧붙인 말에 럼의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한참을 분노했다.

“알렉샤 경은 잘 적응하고 있나요?”

알렉샤는 플로라가 테스트를 보았던 것처럼 입단 시험을 당당하게 통과했다. 특히 마수와의 가상 전투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고, 카신에게 합격점을 얻어 백기사단의 기사가 되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럼과 사르트도 알렉샤를 알게 되었다. 플로라와 함께 센칸에서 건너왔다는 사실도.

“쪼끄만 게 얼마나 날쌘지 몰라.”

특히 알렉샤는 럼이 직접 훈련을 도맡고 있어서, 얼마 전에는 함께 럼이 있던 제국의 외곽까지 다녀온 터였다. 럼은 알렉샤가 골칫덩어리라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으나, 말투나 눈빛을 보면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그를 훈련시키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잘 가르쳐 주세요. 그래도 가르치면 가르치는 대로 잘 따라오잖아요.”

하네칸에서 보기에 알렉샤는 많이 어린 나이였기에, 시몬이나 카신도 그렇고 럼도 마찬가지로 그에게 검을 쥘 기회보다 공부할 기회를 더 많이 주었다. 이따금 얼굴을 볼 때면 공부만 시킨다고 툴툴대긴 해도 열심히 적응하는 모습을 보니 플로라는 더없이 뿌듯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시간이 지나고 조금 더 성장한다면 럼처럼 훌륭한 기사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 * *

결국 내기는 플로라의 승리로 끝났다. 오찬을 끝내고 나서야 럼과 사르트는 공작저를 떠났다. 플로라는 산책 겸 엘라와 마리네드와 함께 정원의 꽃들을 구경했다.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여서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지만. 작은 호수 주변을 맴돌며 향긋한 꽃내음을 맡자, 앞으로 해야 할 막막한 일들은 모두 잊힌 듯했다.

“아가씨, 옷에 흙이 잔뜩 묻었어요……!”

자신이 모시는 영애가 이런 몰골로 다니는 걸 참을 수 없다는 듯, 엘라와 마리네드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산책 내내 잔소리를 했다.

드레스가 아닌 훈련복을 입고 진검으로 대련을 하고 화살을 쏘는 것을 보면서도 엘라와 마리네드는 기절하려고 했다. 그래도 몇 번 보다 보니 익숙해진 듯 지금은 잔소리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지만, 이전에는 정말이지 생각하면 할수록 웃음이 나오는 상황들이 많았다. 안절부절못하며 옷에 있는 흙을 털어 줘야 할지 말지 고민하던 모습이나, 헝클어진 머리칼을 두 눈 뜨고 볼 수 없다는 듯 ‘아아……!’하고 탄식을 흘리는 모습까지.

시간이 흐른 만큼 플로라도 엘라와 마리네드에게 많이 익숙해졌다.

“괜찮아. 금방 들어가서 갈아입을게.”

예전에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고, 제 하녀들이 어떻게 될까 봐 후다닥 방으로 돌아갔다면 이제는 산책까지 할 여유도 가질 수 있었다.

“어떡해…….”

“……아가씨, 그냥 저를 죽여 주세요.”

그때 엘라와 마리네드가 동시에 플로라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를 내었다. 플로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마치 처음 진검 대련을 하는 플로라를 보았을 때처럼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왜 그래?”

“폐, 폐하께서……!”

엘라는 이제 입술까지 삐죽이고 있었다. 플로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폐하?’ 하면서 그들의 시선을 따랐다.

시몬이었다. 정원의 끝으로 정말 시몬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플로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종종걸음으로 시몬에게 다가갔다.

“시몬, 여긴 어떻게……!”

그가 플로라를 마주하자마자 세게 품으로 끌어안았다.

엘라와 마리네드는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제국에 또 없을 거라고, 폐하께서는 너무 로맨틱하다고 생각하는 한편, 흙이 묻은 플로라의 옷을 보며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보고 싶어서.”

“이렇게 막 나오셔도 되는 거예요? 에르네 단장님은요?”

“……알면 죽을지도 몰라.”

“시몬!”

플로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몬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몰래 나왔다고 당당히 말한 것처럼, 옷차림새도 성에서 차려입던 것과 다르게 평범해 보였다. 다행히 로브도 걸치고 왔던 것인지 팔에 검은 로브가 걸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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