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35)화 (135/154)

135.

“폐하, 한 가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잠시 풍경을 바라보며 침묵하고 있던 두 사람 중 리비에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폐하께 이레나는 어떤 존재입니까?”

처음 시몬의 마음을 깨달았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또 이레나가 다치게 될까 염려가 되기도 했다. 이레나의 마음도 확실히 몰랐고, 그녀와 깊은 대화를 주고받을 만큼의 관계 개선이 되지 않아 바라보기만 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제 다시 딸을 되찾는다면, 그는 더 이상 기다려 주지 못할 것 같았다. 시간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달았고, 그래서 아버지로서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이레나에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물론 자신에게 선을 긋는 이레나를 본다면 다시 조심스러워질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마음은 그랬다.

이레나의 마음은 확실히 알지 못했지만, 시몬의 마음만큼은 명확하게 알 것 같았다. 으레 딸 가진 아비가 그렇듯 가장 먼저 사심을 깨달았을 땐 시몬을 경계했지만, 이렇게까지 이레나를 생각하고, 소중하게 여겨 주는 걸 본 이상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시몬은 잠시 리비에르를 바라보았다가 마른침을 삼켰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르느라 침묵의 시간이 길었다. 어떤 말을 가져다 붙여도 이 마음을 다 대변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지켜 주고 싶어요.”

플로라를 볼 때마다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중에서도 강렬한 하나가 있다면 바로 지켜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녀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지금껏 그 생각은 변함없었다. 플로라만 자신을 지키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목적이 있었기에 그녀에게 다가간 점이 없진 않았지만, 시몬도 점점 진심으로 스며들고 말았다. 그녀는 알지 모르겠으나 자칫 잘못하면 부서질까, 깨어질까 항상 심장이 철렁거린다.

사랑을 말하는 시몬의 목소리 끝이 잘게 떨리는 것을 보고, 리비에르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마음이 변할 일은 없으시겠죠?”

“없습니다.”

시몬의 대답은 단호했다. 리비에르도 짐짓 진지한 목소리를 내었다.

“주제넘은 말일지 모르겠으나, 저는 이레나의 아버지로서 염려되는 부분도 많습니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다 떠나서…… 우리 이레나를 이리 소중하게 여겨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폐하 덕분입니다.”

“그 말은 나중에 들어도…….”

“나중에 이레나를 되찾고 나면, 이런 말을 할 틈이 없을 것 같아서요. 성에서 폐하를 뵙는 것과 이곳에서 뵙는 느낌이 좀 다르기도 하고요.”

“지금이 더 편하신 모양입니다.”

“……아무래도요. 지금은 폐하와 신하의 사이로 이곳에 서 있는 게 아니라, 같은 뜻을 가지고 함께 하는 동료 같은 느낌이랄까요. 무례한 말이라면 송구합니다.”

“좋군요. 동료.”

“또한 나중에 말씀드리기엔 이레나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면 저는 다시 폐하를 질투할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지 않습니까.”

“저를 질투하셨습니까?”

“아마도요.”

리비에르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그래도 황제의 대답을 듣고 나니 마음이 좀 안정되는 것 같았다. 애초에 군주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있었다. 얼마나 성실하고 대단한 존재인지도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딸을 사랑하게 됐다니 평소에는 의심하지 않았던 것들로 의구심과 편견을 가졌었다. 확실하게 어떤 마음인지 듣고 나니, 단순한 유희나 지나가는 바람은 아닌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애초에 유희나 지나가는 바람 따위로 여겼더라면 이곳까지 직접 걸음 하지도 않았겠지만. 리비에르가 알고 싶었던 건 진심이었다. 눈에 보이는 판단 말고, 당사자에게 말로써 전해 듣는 진심. 그것이면 되었다.

대화가 멈추고 침묵이 이어지자, 시몬은 이전보다 훨씬 가까워진 섬을 바라보았다. 넓은 바다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소리는 꽤 경쾌하게 들렸다. 조금 더 가까이. 어서 빨리. 섬이 가까워질수록 시몬의 마음은 점점 더 조급해지는 것 같았다. 플로라와의 기억들이 스크랩을 해 둔 것처럼 머릿속에 한 장면씩 떠올랐다.

한참 물살을 가르는 소리를 듣다 옆을 보니 리비에르가 눈을 감고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에게서 마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변에 있는 병력을 살피고 있는 듯했다.

“폐하. 이만 들어가 계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리비에르는 건조한 목소리로 시몬을 향해 말했다.

마법으로 배의 기척을 숨기고 있기는 했으나 센칸이 언제 어떻게 눈치를 채고 공격을 해 올지 모를 일이었다. 아무리 마법이 없는 나라라고 해도, 그들의 기술력과 정보력은 그동안 전달받고 조사한 결과를 보면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이미 하네칸에 많은 첩자가 있을 테니 황제가 이곳으로 직접 행차하고 있단 사실을 전달받았을지도 몰랐다.

“곧 밤이라 섬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데는 유리하지만, 이미 저들에게 정보가 흘러 들어갔다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이 배에 저 혼자 있었다면 상관없었을 테지만,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아주 작은 실수를 하더라도 일 전체가 차질이 생길지 몰랐다. 그럼 리비에르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한 채 실패로 돌아가리라. 그는 이레나를 구출하는 동시에 시몬 또한 보호해야 했다. 이제 황제는 자신이 지켜 주지 않아도 제 몸은 챙길 줄 아는 늠름한 성인이 되었고, 황제를 지키는 근위대 기사들이 있었지만 그게 리비에르가 시몬을 지키지 않아도 될 이유는 아니었다. 리비에르 또한 하네칸의 백성이었고, 시몬에게 충성을 맹세한 신하였다.

사랑하는 여인을, 그리고 누군가의 딸을 되찾아 주기 위해 한 제국의 황제가 이곳까지 직접 걸음 했다. 애초에 이 배에 있어서는 안 될 존재였으나 이왕 함께하게 된 것 적어도 황제는 죽거나 다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했다. 사람 목숨에 우선순위를 두어선 안 되었지만 충신으로서 리비에르의 우선순위는 시몬이었고 그다음이 이레나, 그리고 이 배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미천한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단단한 결의가 깃든 리비에르의 눈빛을 본 시몬은 더 이상 고집부리지 못하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배에 승선한 사람들은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의 경계를 명확히 알았다. 시몬도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다. 신하들이 제 역할을 충실하게 해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용기와 희망을 주어야 했다. 엉뚱한 것들에 고집부리다 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배에 있는 모두의 목숨은 시몬의 손에 달려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처음 황제가 되었을 때도 그 무게에 짓눌려 숨이 막히던 때가 있었는데, 이 좁은 배에 갇혀 있으니 더더욱 그 무게감이 짙어졌다. 아마 큰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예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가 무사하기를. 그 끝에 승리가 기다리고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시몬은 에르네와 함께 방으로 돌아갔다.

* * *

오찬 이후 시작된 긴 회의를 마치고 나왔을 땐 이미 컴컴한 어둠이 잠식한 채였다. 바다 위에서 맞이하는 어둠은 평소 하네칸에서 보았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갑판 위에 서 있음에도 자신이 어둠 속에 갇혀 버린 듯한 느낌이 들곤 했다. 아름다웠던 풍경도, 메린 섬의 윤곽도 보이지 않았다. 여전한 것은 힘찬 바다의 소리뿐이었다. 인내심이 점점 바닥을 보이고 있는 것 같았다. 어서 섬에 도착해, 비인간적인 실험을 자행하는 아이든을 섬멸하고 플로라를 품에 넣어야 이 불안하고 불쾌한 마음들이 정리될 것이다.

언제쯤 도착하는 것이냐고 기사들을 재촉하려던 참이었다.

“바다의 밤공기는 찹니다. 폐하. 오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지금은 건강을 관리하셔야 할 때입니다.”

하필 이든에게 딱 걸려 잔소리를 들은 덕에 방으로 돌아와야 했다.

“넌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

시몬은 뒤따라온 이든을 향해 귀찮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까 갑판에서 바람이 심하게 부는 통에 헝클어진 머리가 거슬리는지, 손바닥으로 정돈하고 있던 이든이 퉁명스레 대답했다.

“치유 사제 열 명을 데려오느니 저 한 명 오는 게 나을 겁니다. 제가 없었으면 분명 후회하셨을 거예요.”

“후회는 지금도 마찬가지인걸.”

성에서와는 달리 엄격한 규율은 정해지지 않은 배 안의 사정 덕분에 이든은 밥 먹듯 시몬의 옆에 붙어 있었다. 그래서 에르네는 편하게 병력의 훈련과 관리에 집중할 수 있었다. 고통받는 건 시몬 뿐이었다.

이든의 잔소리는 성에 있을 때보다 최소 열 배 가까이는 늘었다. 규칙적인 식사, 잠, 그리고 시간에 맞춰 엄격하게 이루어지는 몸 상태 점검까지. 성과 달리 배에서는 바쁘다는 핑계로, 또는 잔다는 핑계로 이든을 피할 명분이 없었으니 황제는 힘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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