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134)화 (134/154)

134.

“짜증 나. 왜 여기까지 지켜야 하는 거야? 그냥 지하 감옥에 처박아 버리면 될 것을.”

플로라가 카나락에게 무어라 더 말하기 전, 교대 근무를 시작한 기사들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차마 말은 걸지 못하고 얼른 빠져나가라는 신호를 카나락에게 주자, 그가 곧 로브를 뒤집어쓰고 유령처럼 움직였다. 플로라의 시야에서 단숨에 사라졌기 때문에 그가 들켰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이든 님이 플로라 경을 좋아했다잖냐. 어떻게 그런 시궁창에 처박겠어.”

“우리 아이든 님께서 뭐가 아쉽다고 저런 괴물 같은 여자를 좋아하게 된 거야?”

“솔직히 얼굴이 반반하긴 하잖아.”

“그래도 나는…… 날카로운 여자는 좀 그래. 자고로 여자는 순진한 맛이 있어야지. 그나저나 너, 플로라 경이 성 밖에서 아이든 님을 죽이려던 거 봤지?”

“당연히 봤지! 그런 구경거리를 어떻게 놓쳐? 어우. 근데 눈빛에 독기가 장난 아니긴 하더라. 평소에는 몰랐는데.”

기사들의 목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끊이지 않는 대화 소리에 플로라는 카나락이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갔음을 직감했다. 플로라는 곧 물병을 베개 밑에 숨기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벽에 등을 기대어 눈을 감았다.

방 앞에 도착한 기사들은 갑자기 대화를 멈췄다. 자신의 상태를 살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플로라는 짐짓 모른 체하고 그들을 신경 쓰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녀는 교대 시간마다 물을 조금씩 마시며 버텼다. 그런 내막을 모르는 기사들은 무엇도 요구하지 않고,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침대에 앉아 꼼짝 않는 플로라에게 독하다고 말했다. 

그나마 말을 조금 섞어 본 동료는 그녀에게, 아이든에게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라고 조언을 하기까지 했다. 플로라를 위한 조언은 결코 아니었기에 고맙지도 않았다. 되려 플로라는 편하게 그들을 향해 물었다. 이렇게 메린 성에서 행복하느냐고. 그럼 기사들은 당황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가, 이내 곰곰이 생각하다, 찝찝한 얼굴을 한 채로 돌아섰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쯤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플로라야, 예전에는 지금의 파르베처럼 독기로 똘똘 뭉쳐 어떻게든 최고가 되고 싶어 했고 그래서 살아남았으나…… 모두가 그렇지는 않았다.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행복 같은 건 잊어버린 지 오래일 거다.

이튿날 정도가 지나자 소문이 난 것인지 기사들은 플로라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카나락이 찾아왔다. 유리가 없는 쇠창살 같은 창문이 불편하고 감시당하는 것 같아 불쾌할 때도 많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유용했다. 작은 물주머니를 창문 틈 사이로 밀어 넣어 준 카나락이 플로라의 상태를 살피듯 눈동자를 굴렸다.

“저를 왜 자꾸 도와주시는 겁니까?”

“돕고 싶으니까요. 제 마음이 그렇게 시키는걸요.”

카나락은 믿을 수 없는 애매한 말을 하며 건조한 미소를 지었다.

“불편하신 곳은 없습니까?”

“갇혀만 있으니 당연히 불편해요. 하지만 익숙해요. 라비우가 방문하면 곧 풀려나겠죠.”

“왕이 방문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카나락의 대답에 플로라는 눈을 찡그렸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있죠?”

“아,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플로라 경을 감시해야 하는 임무가 있어서요.”

단순한 감시로는 알 만한 일이 아니었다. 플로라가 그런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카나락이 곧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과 뜻을 함께할 이들이 부탁을 해 왔습니다.”

“…….”

“그리고 알렉샤 님께서 이걸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카나락이 작은 쪽지를 건넸다. 플로라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 그 종이를 받아들었으나, 카나락의 얼굴에서 어떤 악의도 느끼지 못하고 결국 입을 뗐다.

“알렉샤는 많이 호전되었나요?”

“미약하나마 제 치유술로 도움을 드려 약간의 상처만 남았을 뿐이에요.”

“카나락 님은 치유도 배운 건가요?”

“네. 딸아이가 아팠던 적이 있어서요. 조금…….”

치유의 마력과는 달라 이든처럼 배우지는 못했을 게 분명했다.

“가진 마력의 성질이 달라 잘 되진 않았지만요.”

카나락의 얼굴에서 잠시 리비에르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던 그 얼굴이. 그러자 순간 마음이 풀어졌다. 그런 느낌이 카나락을 믿을 수 있는 확실한 이유가 되어 주진 못했지만, 플로라는 이제 어떤 도박이라도 시도해야 했다. 그 도박 중에 가장 가능성 있는 패가 카나락이었다. 단순히 자신을 기만하기 위해 이런 짓을 하는 건 아닐 것이다.

“내일, 내일입니다. 그때까지 컨디션 잘 챙기십시오.”

카나락은 다시 밤의 그림자처럼 스르륵 그 모습을 감췄다. 플로라는 자리로 되돌아와 쪽지를 읽었다. 작고 빼곡한 글자들이 작은 종이에 담겨 있었다. 아이든에게 잡혀가 이런저런 일을 당한 이후로 카나락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았고, 플로라가 잡혀간 이후로 한 명이 더 이유 없이 고문을 당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했다고. 카나락에게 부탁해 자신을 빼낼 것이고, 그때부터 작은 불씨는 크게 번져 이 메린 성을 집어삼키게 될 거라고 쓰여 있었다.

비겁한 아이든이 정신을 차리자마자 자신의 측근들을 괴롭혔다는 말을 보니 다시 머리가 지끈거리며 피가 거꾸로 쏠리는 것 같았다. 분노에 눈알이 뜨거워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카나락밖에는 자신을 도와 줄 사람이 없음을 알았다.

내일, 내일이라고.

드디어 올 것이 왔다.

* * *

플로라는 하루 종일 잠을 잤다. 기사들이 아픈 것 아니냐고 숙덕거릴 정도였다. 그녀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보고가 전달된 것인지 노을 진 저녁이 되었을 땐 아이든이 모습을 비췄다. 멍과 부기가 빠지지 않은 얼굴은 솔직히 우스꽝스러웠다. 플로라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네 얼굴이 엉망이 됐구나. 아이든.”

“어디 아픈 거야? 플로라.”

아이든은 듣지 못한 체하며 화제를 바꿨다. 플로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저 잠이 많이 올 뿐이야. 몸이 드디어 적응하고 게을러질 작정인 모양이지.”

“아픈 거면 말해. 들어가서 봐 줄 테니까.”

“아직도 내 걱정이야? 지금은 네 꼴을 더 걱정해야 할 텐데. 잘난 마법사들한테 좀 치유해 달라고 해.”

“…….”

“그리고 그 문 열면 넌 무사하지 못할 거야. 이번엔 힘 조절을 못 해서 까딱하면 저세상 보낼 수도 있어. 목숨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으면 어디 열어 봐.”

플로라의 조롱에 아이든이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

“플로라. 도대체 뭐가 문제야? 난 네게 모든 걸 해 주려고 하는데, 왜 이렇게 엇나가?”

“네겐 문제없어. 너랑 그동안 잘 지내 보겠다고 마음먹었던 내가 문제지. 이제 정신 차렸어.”

“전하가 방문하시면 네 기억을 지울 거야.”

“……그래. 그 방법밖엔 없으시겠지.”

아이든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괜히 제 뒤에 있는 기사의 가슴팍을 퍽, 밀쳤다.

플로라가 안타깝다는 얼굴로 기사를 바라보자 그의 얼굴도 별안간 붉어졌다. 수치심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 사람이라면 그 정도는 느껴야지.

아이든은 곧 사라졌다. 플로라는 다시 돌아가 누워 잠을 청했다. 체력을 비축해 둬야 했다. 이 문이 열리면, 그땐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긴장해야 할 테니까.

* * *

배에 오른 이후 한 번도 제대로 잠을 청해 본 적 없던 시몬은 오랜만에 꿈조차 꾸지 못하고 푹 잠을 잤다. 멀리 지도상에는 나타나지 않은 작은 섬을 발견한 이후였다. 플로라를 찾지 못하면 어쩌나 고민하고 불안해하던 게 긴장이 풀린 탓인지 졸음이 쏟아졌다. 이때다 싶어 이든이 제 치유력을 조금이나마 불어 넣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푹 잔 덕에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그리고 잘하면 오늘 밤, 플로라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시몬의 주홍빛 동공이 반짝거렸다.

노을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시몬의 곁으로 리비에르가 다가왔다.

“드디어…… 도착이네요. 스승님. 이곳에 플로라가 있을까요?”

오랜만에 듣는 스승님이란 소리에 리비에르가 잠시 주춤했으나, 별다른 지적은 하지 않고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있을 겁니다.”

리비에르가 심어 둔 스파이의 정보는 짧고 희미했지만, 당시 이들에게는 큰 단서가 되었다. 배에 올라탄 이후 지속적으로 여러 갈래의 마력을 흘렸지만 돌아오는 답신이 없어 곤란했다. 그래도 결국 플로라가 있을 섬으로 추정되는 곳을 발견했고, 그 순간 이것은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카나락은 원래가 마력이 그리 강한 사람이 아니라, 하네칸까지 비밀 서신을 보내는 데에 기력을 거의 소진했을 수 있었다. 저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신호였으니 문제는 없겠지만, 엉뚱한 사람에게 전해졌다거나. 아무튼 리비에르는 눈앞에 가까워진 이 섬에 플로라가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래야만 했다.

“얼른 일을 마치고 돌아가고 싶네요. 배는 저랑 잘 안 맞는 것 같군요.”

“……저도요.”

리비에르는 시몬의 말에 맞장구치며 씁쓸하게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