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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59)화 (59/154)

59.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아무도 이 소문에 대해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둘 다 똑같은 표정을 짓는 걸 보니, 흡사 남매처럼 보였다. 럼은 더 기세등등해져서 허리를 쫙 펴고 말했다. 자신만 아는 소문을 이야기할 때, 그리고 이런 반응을 보일 때 괜히 기분이 좋았다.

“너희들 마르웰 가의 칸나 영애를 알고 있지?”

“네. 당연하죠.”

“어릴 때 폐하와 칸나 영애께서 약혼을 전제로 만나셨다는 것도 알아?”

사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헤어지셨다고 들었습니다.”

하네칸 출신이 아닌 플로라만 모르는 이야기였다.

혼인을 할지도 모른다는 말에 한 번, 그리고 전에 칸나 영애와 교제를 했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나도 그렇게 들었단 말이야.”

그럼, 칸나 영애와 헤어지고 라벤더를 만나신 걸까.

플로라는 시몬에게 안기며 보고 싶었다고 훌쩍이던 라벤더를 떠올리며 서늘한 얼굴을 했다.

“그 칸나 영애가 유학을 떠났다가, 얼마 전 돌아왔대.”

“…….”

“그래서인지 다시 소문이 돌더라고? 폐하의 혼기도 꽉 차셨으니 그럴 만도 하지.”

“마르웰 공작가처럼 부와 권력 모두를 가진 혼처는 별로 없긴 하죠.”

사르트는 그 소문이 왜 도는 것인지 공감한다는 듯 긍정했다.

“폐하에 대한 소문이 그동안 많긴 했지만, 가장 신빙성 있는 건 이쪽이란 말이야. 난 그렇게 생각해. 무려 마르웰 공작가잖아.”

폐하와 관련된 여자의 소문은 럼이 말했다시피 제국 내에 끊임없이 돌고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 될지는 몰라요. 소문은 소문일 뿐이니까요.”

그러나 공식적으로 드러난 일은 없었기에, 그 소문 중 무엇이 진실인지는 아직 확실히 몰랐다.

럼도 사르트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플로라만 그러지 못했다.

시몬과 관련된 일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마음 한구석이 다시 먹먹해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건만. 갑작스러운 시몬의 이야기로 그동안 억지로 눌러 두었던 감정들이 틈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우린 이만 갈까? 플로라 경.”

그렇게 멍하니 앉아있길 얼마 후, 사르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플로라를 불렀다.

다시 훈련할 시간이었다.

플로라는 정신을 차리고,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감정에 치우쳐 사명을 잊는 것만큼 어리석은 행동은 할 수 없었다.

* * *

사르트에게서는 배울 점이 많았다.

그가 마력을 사용할 줄 아는 ‘마스터’인 부분도 있었지만, 은근히 꼼꼼하고 세심한 부분이 많아 흐트러진 자세를 교정하는 것에 큰 도움이 됐다.

며칠 죽어라 검술을 연습하며 시간을 보냈더니, 검을 휘두르는 행동의 하나하나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게 되었다. 

초반엔 어색하기만 했던 검술이었지만, 상대를 벨 때 어떻게 사용해야 이점이 있을지 생각해보니, 확실히 몸이 더 잘 따라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예 기사인 사르트가 제국에 머물며 맡은 임무는 극비라, 혼자 일해야 했다.

그래서 하루 중 세 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만 플로라와 함께할 수 있었다. 플로라는 그것마저도 감지덕지였다. 

검술과는 하등 쓸모없는 잔심부름을 하며 종일 고통 받는 것보다 사르트에게 진짜 검술을 배우는 것이 훨씬 알차고 유익했다.

다른 동료들이 잔심부름을 하는 것에 고통받고, 투덜거리는 걸 보면 더욱 그랬다.

덕분에 플로라는 혼자 연습하는 시간도 많아졌다.

아침과 저녁에 있는 단체 훈련과 사르트와의 개인 훈련을 제외하면, 모두 자유롭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오늘도 플로라는 사르트에게 배운 대로 착실히 검술 연습을 했다.

팔이 저릿해질 때까지 이를 악물고 휘둘렀다.

지키고 싶은 것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독해졌으니까.

그리고 그런 그녀의 우아하면서도 절도 있는 검술을 몰래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모두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 그녀를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림을 그리듯 유려하게 흘러가는 검과 조금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한 재빠르고 유연한 몸짓에 모두 넋을 놓았다.

이곳에 플로라를 찾아왔던 이유를 잊고, 그녀의 검술이 끝날 때까지 누구 하나 방해하지 못했다.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카신이었다.

“누구…… 아, 단장님.”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며 물을 마시고 있던 플로라가 낯선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 경계했다. 그러나 이내 다가온 사람이 카신임을 확인하고, 곤두세웠던 신경을 누그러뜨렸다.

“플로라.”

카신은 아직도 환상 속을 걷는 것처럼 정신이 멍했다. 해야 할 말을 잊은 사람처럼 그녀의 이름만 부르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플로라가 검을 휘두르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졌다.

사르트의 검술과 그녀가 가진 검술이 하나로 합쳐져 훨씬 움직임이 부드럽고 아름다워졌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보다 검을 휘두르는 자세가 많이 안정된 듯 보였다.

얼마나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 건지는 내내 지켜보지 않았어도, 결과만으로 알 수 있을 듯했다.

플로라가 사르트를 직속상관으로 결정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걱정했다. 사르트에게 배울 검술은 플로라와 잘 어울릴 테지만, 임무 때문에 시간을 별로 보내지 못하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사르트뿐 아니라 플로라까지 걱정스러웠다.

사르트는 가뜩이나 귀찮음 많은 성격에 신입까지 떠안으면 귀찮고 피곤해할 것이 뻔했고, 플로라는 상관에게 배울 시간이 별로 없으니 손해를 본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르트도 동의한 일이고, 결과적으로 잘 된 것 같았다. 이리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둘을 묶어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고생이 많군. 검술이 많이 늘었어.”

카신이 픽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아…… 보셨습니까?”

“다 봤지.”

“……감사합니다.”

노력을 인정받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단장의 칭찬을 받으니 기분이 좋아진 플로라가 살짝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카신은 그녀의 웃는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해야 할 말을 멈추고 눈을 깜빡였다.

그 애가 잘 컸더라면…… 이 정도는 되었을까.

카신은 저도 모르게 어렸을 적 자신을 졸졸 따랐던 작은 아이를 떠올렸다.

리비에르 님이 하네칸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니 더욱 그랬다.

플로라는 출신도 분명한 평민이니 그럴 리가 없는 걸 아는데도, 마치 예전 그 일은 없었던 것처럼 눈앞에 있는 이 여인이 사라져 버린 아이가 아닐까 싶은 착각이 들었다.

카신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다독거리던 플로라의 어깨를 살짝 말아 쥐었다.

플로라가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단장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갑자기 표정이 굳어 버린 카신의 모습에 플로라는 당황했다.

요새 많이 수척해졌다고 생각은 했는데, 혹 어디가 아픈 건 아닐지 걱정되었다.

플로라가 카신에게로 손을 뻗어 옷깃을 살짝 쥐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카신이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좀 했어. 괜찮다.”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아니야. 참, 내가 경에게 전할 말이 있어서 왔어.”

“무슨…….”

“폴 경이 깨어났어. 나도 그리로 가는 길이고. 경과 함께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플로라의 온몸이 뻣뻣이 굳었다.

뒷덜미에 소름이 오소소 돋치면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폴이 깨어났다고?’

“가자.”

카신의 말에 플로라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녀의 걸음이 평소보다 배로 빨라졌고, 카신은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군말 없이 그 속도를 맞춰 주었다.

* * *

시몬은 급하게 자리를 뜨는 플로라와 카신을 바라보며 영문 모를 감정을 느꼈다.

그저 기사단장과 부하의 사이일 뿐인데 뭐 저리 친근해 보이지?

분명 카신 또한 플로라에게 폴 경의 의식이 돌아왔다는 말을 전하려고 왔을 것이었다.

자신 말고도 다른 사람이 그녀를 신경 써주는 건 좋은 일인데…….

그런데 이 초조한 감정은 무엇일까.

“에르네.”

눈앞에서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노려보던 시몬이 침울한 목소리를 냈다.

가만히 그런 황제를 안쓰럽게 지켜보던 에르네는 네, 하고 짧게 대답했다.

“이제 그만 플로라와 대화를 하는 게 어때?”

<주군께서 명하신다면 받들겠습니다.>

“눈 뜨고 코 베인 기분이야.”

에르네에겐 저주일지도 모르는 능력이 오늘따라 시몬에게는 유독 부러움을 안겼다.

멀리서도 대화를 전할 능력이 있었다면 눈앞에서 다른 이에게 뺏기진 않았을 텐데.

플로라를 보러 움직인 것이 생각보다 오랜만이라, 그 아쉬움은 배로 느껴졌다.

* * *

폴은 정신을 차렸지만, 아직 제대로 말을 하지는 못하는 듯했다.

치유가 막 끝난 듯 이든이 플로라와 카신에게 길을 내주었다.

폴의 눈동자가 천천히 카신과 플로라에게 닿았다. 두 사람은 알아보는 눈치여서, 플로라는 안심했다.

“폴, 정말 다행이야…….”

눈을 뜬 모습을 보니,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자신 때문에 폴이 휘말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기에 더욱 감정이 복받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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