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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58)화 (58/154)

58.

오랜 시간 기대와 희망에 휩싸였다 보니, 그만큼 절망과 고통도 컸을 테다. 이제는 확신이 들지 않는 이상, 헛된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 크게 상처받지 않는 길이라는 걸 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 거다.

시몬은 아직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이 그렇지 않았다.

시몬 역시도 리비에르가 딸의 시신을 찾거나 오래전 제국을 뒤집어 놓았던 살인과 납치 사건에 대한 작은 실마리라도 찾아내길 바랐다.

단순히 마음에 남은 ‘짐’을 내려놓고 싶은 것은 아니었고, 오래전 어린 자신을 제 딸만큼이나 살뜰하게 돌봐주었던 스승님에 대한 진심 어린 마음이었다.

괜한 기대는 시몬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다.

하지만 리비에르가 더 이상 그 주제로는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 지금 마법부에 관한 이야기들로 대화의 방향을 틀었다.

업무와 직결된 대화들뿐이었는데도, 전혀 지루할 틈이 없었다. 안부를 주고받고, 그동안 세상을 떠돌았던 여행기를 듣는 것만큼 재미있었다.

시몬은 스승님을 잘 따르던 시절, 이리 도란도란 제국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미래를 꿈꿨던 적이 있었기에 그에겐 그저 행복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오찬 시간이 다 되었을 때쯤에는 다른 대마법사들도 집무실에 모였다. 함께 식사를 하기로 미리 약속을 정해두어 시간 맞춰 방문한 것이다.

“리비에르 님이 돌아오셔서 기뻐요!”

“이 놈팡이 같으니라고. 이제 내가 휴가를 갈 테니, 당신이 내 일까지 다 해. 아니지, 아예 그만둬버릴까.”

네이라는 신입이지만 리비에르와 구면이었기에 그가 돌아온 것에 무척 감격했다.

그리고 소피는 리비에르와 비슷한 시기에 대마법사의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 시절, 많은 우여곡절을 함께한 사이니 그만큼 가깝기도 했다.

소피는 리비에르가 딸을 찾는 여행을 떠나며 마탑을 비웠을 때 많이 쓸쓸해했다. 아무리 입양한 수양딸이어도 많은 시련을 거쳐 데려왔던 아이이니, 그 상심을 이해해서 말리지 못했다. 그게 이리 시간이 지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네게는 정말 미안해. 소피.”

“말이면 단줄 알아.”

“업무에 좀 적응하고 나면 너도 푹 쉬어. 일은 내가 다 할게.”

“당연히 그래야지? 오늘부터 특훈이야.”

시몬은 틱틱거리는 소피와 쩔쩔매는 리비에르를 바라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소피가 말은 퉁명스럽고 살벌하게 해도 표정을 보니 그를 반가워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 * *

식당을 빠져나가자, 소식을 듣고 찾아온 귀족들이 근처에서 서성거리다 시몬과 리비에르를 발견하고 헐레벌떡 뛰어와 인사했다.

어쩜 이리 하나 같이 연기가 어설프기만 한지, 코웃음이 쳐질 뻔했지만 꾹 삼켜내며 뒤를 돌았다. 골치 아픈 사람들과는 되도록 말을 나누고 싶지 않아서였다.

식당 앞에 대기하고 있던 근위대와 함께 돌아선 시몬은 얼마 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폐하.”

“……아. 네이라.”

근위대가 길을 열어주자, 네이라가 천천히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할 이야기가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야?”

“그 소식 들으셨죠? 칸나 영애가 돌아왔다는…….”

“아. 맞아. 그 일로 네게도 할 말이 있었는데 경황이 없어 잊고 있었군.”

네이라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고개를 갸웃했다.

“어떤…….”

“다 같이 시간 맞춰 한번 모였으면 해서. 오랜만이잖아, 우리.”

대마법사 네이라와 백기사단장 카신, 그리고 근위대장 에르네와 고위 귀족 가문의 순수혈통 칸나, 마지막으로 시몬까지.

그들은 아카데미를 함께 다닌 친한 친구 사이였다. 졸업한 이후로 다섯 명이 한자리에 모이기는 쉽지 않았기에 이 약속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다 함께 얼굴을 봤었는지도 가물가물했다. 네이라가 대마법사로 즉위하던 날이었던가.

친구들을 아끼고 좋아하는 네이라는 시몬의 제안에 반색했다.

“저는 좋아요! 다른 분들께 시간을 맞출게요.”

“알았어.”

네이라가 시몬에게 하려고 했던 얘기는 이게 요지가 아니었지만, 오늘은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친구들과 다 함께 만나면 뭐든 알게 될 테니까.

칸나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또 황제와 혼인하게 될 거란 소문을 듣고 나니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던 참이었다.

마음에 돌이 얹어진 것처럼 묵직하고 아팠는데, 이리 또 시몬의 얼굴을 보니 마냥 좋기만 했다.

아아. 짝사랑 같은 건 정말…….

네이라는 겨우 마음을 다잡고 시몬을 향해 다시 한번 정중하게 인사했다.

“살펴 가세요. 폐하. 그럼 저는 연락을 기다리겠습니다.”

* * *

“어이. 플로라 경.”

“……네?”

플로라는 그새 자신의 직속상관을 정했다.

정예 기사에서 고르지 말라는 법은 없는 데다, 본인 역시 대놓고 저를 선택하라는 말을 했기에 플로라는 더 고민할 것도 없이 ‘사르트 알펜네’를 자신의 상관으로 결정했다.

사르트는 한동안 임무에 나가지 않고, 제도에 남아 카신과 함께 이번 마굴 토벌대 사건에 대해 조사할 것이라고 했다. 그 때문에 카신도 승인해주었다.

어제는 국경 지역으로 나섰던 럼 경이 돌아왔는데, 이 남자는 플로라가 기사단 시험을 보던 날 괴한인 줄 알고 죽일 뻔했던 그 사람이었다.

“사르트 경을 상관으로 삼았다며.”

그가 플로라의 앞에 있었다. 정확히는 사르트와 럼이 훈련하는 곳에 그녀가 참관을 나선 것이지만.

“그렇습니다.”

“나도 가르칠 신입 기사 한 명 있었으면 좋겠네. 근데 그러기엔 임무가 너무 많단 말이지. 사르트 경은 당분간 제도에 머물기로 했다며?”

“그렇게 들었습니다.”

“경은 좋겠네. 사르트가 귀찮음이 많아서 그런 거 싫어했는데, 신입 기사를 가르친다고 해서 좀 의외였어. 흔치 않은 기회니 배울 수 있을 때 많이 배워둬.”

플로라는 ‘네!’하고 결의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땀을 대충 닦아내며 물을 벌컥 마시던 럼이 돌연 눈을 반짝였다.

“플로라 경, 나와 대련을 한번 해볼래?”

“……네?”

럼은 플로라가 자신을 죽일 뻔했다는 사실에 여전히 분노하면서도, 이리 대놓고 이런저런 말을 걸어오는 것을 보면 완전 싫어하는 것까진 아닌 듯했다.

플로라는 럼의 제안에 멀찍이 떨어져 훈련하는 자신의 상관을 보았다. 그리곤 곤란한 듯 웃었다. 상관이 자신이 훈련하는 것을 보고 기억해두라고 명령을 내렸던 참이었다. 이미 다 외우긴 했지만 그렇다고 독단적으로 다른 행동을 할 수 없었다.

럼도 플로라가 곤란해하는 걸 눈치채고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나는 사냥 대회까지는 즐기다 다시 국경 지역으로 갈 거야. 그전까지 기회는 언제든 열려 있으니 시간 날 때 한번 해보자고.”

“……네!”

“무투 대회도 즐기면 좋으련만. 내가 우승할 자신이 있는데 말이지.”

국경 지역으로 다시 떠날 생각을 하며 럼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때 훈련을 잠시 중단한 사르트가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

“잘 보고 있으라니 다른 짓을 하고 있었군.”

“아…… 죄송합니다.”

럼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잘못은 잘못이었다.

플로라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자, 럼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눈을 흘겼다.

“군기 잡기는. 그러면서 은근히 나한테도 면박 주는 거지?”

“잘 아십니다. 선배는 훈련 안 하십니까?”

“나 어제 제도로 돌아온 사람이야. 원래였다면 휴가를 즐겨야 했고. 너랑 놀려고 왔더니, 훈련이나 가자고 하고! 난 쉬엄쉬엄해도 되잖아. 너무 피곤해.”

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벽에 등을 기대고 땅에 털썩 앉았다.

사르트도 더 이상의 잔소리 없이 그저 땀을 닦아내곤 럼의 곁에 앉았다.

“편히 있어. 플로라 경. 휴식이다.”

사르트의 말에도 두 사람 곁에 같이 앉기는 뭐해서, 플로라는 벽에 등을 기대어 편히 섰다.

“다들 소문은 들었어?”

“무슨 소문 말씀이십니까?”

기사단 사이에서 이슈는 빠르게 퍼진다. 매일 고된 훈련의 연속이었으니, 그런 심심찮은 소문에라도 빠삭하지 않으면 삶이 얼마나 팍팍해지는지 몰랐다.

소문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저 씹을 거리, 재미있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것이면 충분했다.

기사들은 요새 앞으로 있을 사냥 대회와 격투 대회 같은 기사단의 공식적 행사에 대해 주로 대화했지만, 제국 내에 도는 소문도 놓치지는 않았다.

소문이라면 질색하는 플로라였지만, 요즘은 좀 달라졌다. 훈련이 고되거나 힘들 때 그런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듣는 것은 무거운 기분을 환기하는 데에 조금 도움이 되었다.

“내가 어제 돌아오자마자 술이 마시고 싶어서 광장에 나갔단 말이지.”

“예.”

럼이 플로라에게 손짓했다.

“경도 앉아. 올려다보면 뒷목 빠질 것 같아. 난 우리 단장님이랑 폐하 말고는 누구 올려다보는 거 싫어해.”

플로라가 그의 말에 하는 수 없이 주섬주섬 자리에 앉자, 럼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술집에서 다들 이상한 얘길 하더군.”

“…….”

사르트가 뭔데 이리 뜸을 들이냐는 듯 미간을 좁히자, 럼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폐하께서 곧 혼인을 하실 것 같다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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