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플로라가 한숨 더 자고 깨어났을 때도 이든이 곁을 지키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기는 버거웠지만, 이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부려 바로 건너편 방에 있는 폴에게 다녀왔다. 그의 얼굴은 마치 시체처럼 창백했다.
“……폴.”
이든에게 들었던 대로 그는 확실히 좋지 않은 상태였다.
이 몸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함에 화가 났다. 어쩔 수 없었다는 건 변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만 돌아가시죠. 레이디.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어요.”
플로라의 표정이 서늘하게 변하자, 이든이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그녀를 만류했다.
“일어나자마자 여기서 뭘 하는 거야.”
이든의 말에 고개를 작게 끄덕였던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플로라가 무언가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으로 굳어 섰다. 몸이 고장 난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플로라.”
이든이 한 걸음 물러서고, 그가 다가왔다.
소용돌이치던 분노의 감정이 단숨에 가라앉았다.
그 대신, 울컥하고 복받치는 감정에 눈가가 따가워졌다.
“……폐하.”
플로라는 용기 내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지만 그것뿐이었다.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실제로 확인하고 나서야 진짜 안심이 되었다.
“방으로 돌아가자.”
시몬은 플로라에게 손을 뻗어 붉어진 눈가를 부드럽게 만져 주었다.
그 역시 플로라와 같은 감정이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말을 들었지만, 계속 깨어나지 않아 불안했다. 상태가 어찌 되었건 지금은 이리 눈을 뜬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플로라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기다렸다는 듯 이든이 그녀를 부축했다.
시몬도 곁에 서서 넘어지진 않을까, 걷는 것이 불편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따랐다.
멀쩡한 상태로 걸었으면 1분도 안 되었을 거리를 한참 걸어 방으로 돌아온 플로라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나 이든과 시몬의 계속되는 재촉에 결국 몸을 눕혔다.
“……폐하.”
시몬은 플로라의 손을 양손으로 꼭 붙든 채 기도하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침묵뿐인 공간이었음에도 불편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을 만나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했다.
평생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들이었다.
그래서 이 하네칸을, 시몬의 곁을 떠나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든은 어느새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주었고, 에르네 역시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 보다 방을 나갔다. 그러고도 한참 뒤에야 시몬이 고개를 들었다.
그사이 불쑥 치밀던 감정들을 단순명료하게 정리해버린 것만 같았다.
그는 눈꼬리를 접어 예쁘게 웃었다.
“……걱정을 끼쳐 드려 송구합니다.”
“무사히 깨어났으면 됐어.”
시몬은 한 손을 뻗어 플로라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해주었다.
그의 손끝으로부터 느껴지는 감각이 간지러워서 슬그머니 눈을 피해 버렸다.
“보고 싶었다.”
난데없이 훅 끼쳐온 그의 말에 플로라는 다시 시선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늘 전유물처럼 달고 다니던 장난기 어린 말투와 표정이 아니었다. 플로라가 어떤 대답을 내어놓아야 할지 몰라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자 다시 시몬이 해사하게 웃었다. 소년처럼 맑게 웃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눈이 부셨다.
어쩜 저렇게 잘생겼을까. 저도 모르게 덩달아 미소를 지었던 플로라는 찢어진 아랫입술이 아파져 오자 반사적으로 입가를 손으로 꾹 눌렀다.
언제 보아도 찬란한 미모였다.
* * *
“그러니까, 애초에 널 노린 공격이었군.”
어느 정도 분위기가 진정되고 난 후에야 플로라는 백작령에서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시몬에게 보고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왔던 쪽지의 내용과 기사단 혹은 성 내부에 첩자가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전하자, 시몬이 짐짓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조심스레 말했다.
“네게 묻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들이 왜 널 쫓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이해할 수 없으니 조금 혼란스럽군.”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가 필사적으로 숨기려던 비밀을 줄곧 궁금해했던 시몬이었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숨겨진 것 같다는 직감에 이끌려 성에 데려오기까지 했고.
하지만 플로라가 민감하게 생각하는 문제라는 걸 알아서, 내가 베푼 자비에 너도 화답하라고 독촉할 수 없었다.
시몬은 오래 시간을 가지고 느긋하게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는 원래부터 성정이 그러했으니까.
발톱을 감추고 납작 엎드리거나 감정을 숨기는 것에는 도가 튼 사람이었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생존 본능은 이제는 시몬의 성격으로 자리 잡게 되어 버렸다.
그런 성정이 독이 되어 버린 건 아닐까.
플로라가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니 여유로웠던 인내심은 금세 바닥을 보였다.
아무 정보가 없어 범인의 윤곽조차 잡지 못하는 스스로가 얼마나 무능하고, 한심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범인이 길길이 날뛰고, 완전히 종적을 감출 때까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발톱을 감추고 있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지 몰랐다.
플로라가 깨어나지 않는 동안 시몬은 그런 지옥의 시간을 버텨야 했다.
“……시몬.”
플로라는 시몬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불편해하지 않을 선에서 말을 골라가며 묻는 듯한 그의 태도에 플로라는 짐짓 진지한 얼굴을 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탓이다.
황제는 더 이상 제게 눈치를 보아선 안 됐다.
이제 플로라는 그의 충직한 기사였다.
대놓고 묻지 못하는 시몬의 태도에 플로라는 오히려 불편해졌다.
예전에는 이것을 어떻게 편하다고 여겼는지 모르겠다. 상황을 이렇게까지 만든 것이 자신이란 것을 알기에 바로잡고 싶었다.
“그동안 시몬이 저를 배려해주신 것 압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당신의 기사입니다. 제게 어떤 명령을 내리셔도 저는 성실히 답할 것입니다.”
“난 나의 기사를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다.”
“…….”
“단지 네 상처가 걱정되었을 뿐이야. 마음이 조금 괜찮아진다면 그때 알아서 얘기해주겠지 생각했어. 방금 내가 질문에 머뭇거린 것은 그 때문이야. 내 명령으로 네가 상처를 억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여전히 아이든과 센칸을 떠올리면 분노가 불처럼 온몸을 스쳤고, 가끔은 두려움에 몸이 떨리기도 했다.
오랜 시간 곪아 있던 상처는 지금도 아물지 않은 채 남아 있었지만, 시몬의 곁이라면 어떤 풍파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플로라는 충성을 보이기로 결심했다.
“그들이 저를 쫓는 이유는, 제가 그들이 숨겨온 중요한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시몬에게 말하지 못한 것은 신뢰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안위가 걱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비밀을 아는 존재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죽이려 할 테니까요.”
“…….”
“아무 준비도, 생각도 없이 말해버리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제가 시몬을 지킬 수 있는 자리에 있을 때 말하고 싶었어요. 성에도 분명 그들의 첩자가 있을 테니까요.”
그리곤 플로라는 에르네를 불러달라고 말했다.
그녀의 말들을 곱씹으며 잠시 고민하던 시몬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들을게.”
“…….”
“넌 좀 쉬어야 해. 플로라.”
이야기가 길어질 것을 염려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방금 깨어났잖아.”
“시몬.”
“네가 말했잖아. 나의 기사라고.”
“…….”
“난 내 기사가 몸을 회복하는 게 더 중요하다. 지금 내 앞에 누워 있는 것이 다른 기사라 할지라도 같은 말을 했을 거야.”
시몬이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그러니 어서 나아. 다음 말은 그때 들을 테니. 이왕 참은 김에 좀 더 기다릴게.”
그의 눈빛이 단호해서 플로라는 결국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 * *
플로라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방문객이 늘었다.
가장 잦게 방문하는 사람은 역시나 시몬과 이든이었지만 그 뒤를 동기들이 이었다.
동기들은 훈련이 끝날 때마다 찾아와 걱정해주고, 한참 수다를 떨다 돌아갔다.
그들은 자신이 정신을 잃은 사이 있었던 일들을 여과 없이 말해주었다.
폴과 플로라를 공격한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으며 제대로 된 윤곽도 잡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번 토벌 임무에서 목숨을 잃은 기사들과 괴한에게 중상을 입은 신입 기사들 때문에 기사단의 분위기는 무척 흉흉해졌다고도 했다.
상관들은 일이 늘어 짜증이 배로 늘었고 훈련의 강도 또한 높아져 동기들은 힘든 나날을 보내는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기를 카신 단장님은 안 그래도 뾰족했던 사람이 더 날을 세웠다고, 눈빛이 스칠 때마다 검에 베이는 것 같은 섬뜩한 기분이 든다며 몸서리를 쳤다.
더 뾰족해진 카신 단장님은 동기들이 가고 난 뒤에야 플로라를 찾아왔다.
그가 매일 아침 이곳에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곁을 지켜주던 여신관에게 들은 말이었다.
“그냥 누워있어라.”
플로라가 카신을 보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가 행동을 저지했다.
동기들이 말했던 ‘더 뾰족해진’ 면모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