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파르베의 머릿속에 플로라 외에 또 다른 사람이 떠올랐다.
플로라를 엄호했던 기사, 사르트 엘펜네.
중요하지 않은 기사의 이름 따위 잘 모르지만, 마굴 토벌대에서 같은 조로 수색을 담당한 데다 꽤 유려한 실력을 가지고 있어 기억하고 있었다.
제국의 마스터. 그가 3급 마수에게 썼던 마력도 직접 보았다.
그걸 떠올리자, 사르트에게 베였던 팔이 괜스레 욱신거리는 듯했다.
자칫 잘못했다간 보고를 올리기도 전에 사르트의 손에 죽을 것 같아, 그대로 도주했다.
그렇게 살아남은 파르베의 마음에는 분노와 복수심이 남았다.
독으로 몸에 흠집이라도 냈어야 한다는 아쉬움 또한 일었다.
플로라를 공격해 없애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지만, 목숨을 잃을까 그대로 도망쳤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웠다.
그런 감정을 안겨준 사르트, 그 또한 제 손으로 꼭 죽이고 싶었다.
“내 허락 없이 어리석은 짓을 벌인 건 용서하겠다. 하지만 다음은 없어. 이곳에서 며칠 묵으며 근신해라. 몸이 많이 상한 것 같으니.”
하지만 아이든은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듯,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파르베가 애원하듯 자신의 주인을 올려보았다.
“플로라가 하네칸으로 갔다면, 어차피 정면승부가 일어날 거다. 그때까지 우린 준비를 해야 해. 괜한 감정에 사로잡히지 마.”
번복은 없었다.
“제국의 마스터와 싸웠습니다. 마력을 가진 존재는 무척 강했습니다. 저는 그 또한 죽이고 싶습니다.”
파르베는 맹세하고 가슴 깊숙이 새기듯 아이든에게 자신의 소망을 이야기했다.
아이든은 그런 파르베를 이해했다. 그건 자신이 느꼈던 열등감과 같은 감정이었다.
마력과 검기를 동시에 뿜어내는 존재. 이 세계의 불평등함이었다.
“그래. 파르베 경. 그를 죽이고 싶거든 더 강해져야지.”
툭. 하고 머리 위로 얹어지는 투박한 손길에 파르베는 고개를 떨궜다.
“무엇보다 플로라를 뛰어넘어야 해. 지금은 비록 애물단지처럼 마력을 가지고만 있지만, 그 아이 또한 본능을 알게 된다면…… 네가 보았던 제국 마스터의 위력을 낼 테니까.”
“…….”
“일단은 돌아가서 몸을 회복하는 데에 집중해. 다 나으면 네게 꼭 해보고 싶은 실험이 있다. 강한 힘을 가져다줄 거야.”
그 말에 파르베가 눈을 반짝이며 아이든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실험에 성공하신 것일까.
강한 힘.
말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오르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희열이 느껴졌다.
* * *
창밖에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오랜만에 보는 빛이었다.
살짝 눈을 찡그렸던 플로라는 메마른 한숨을 내쉬었다.
입술 주변이 쓰리긴 했지만 지난번에 깨어났을 때보다는 한결 움직이기가 수월했다.
‘얼마나 누워 있었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참에 방으로 신관이 들어왔다. 지난번 잠시 정신이 들었을 때 보았던 여자 신관이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놀란 듯한 얼굴에 플로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도 덩달아 작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잘 이겨냈다는, 수고했다는 말을 하는 것처럼 따뜻한 표정이었다.
이윽고 신관에게 물을 받아먹고 나니, 조금 더 멍했던 정신이 돌아왔다.
“레이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든이 모습을 드러냈다.
플로라는 그를 향해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최대한 반가운 마음을 표현한 것인데, 다시금 아랫입술이 찢어지는 듯한 따끔한 느낌에 도로 표정을 풀어야만 했다.
“이든…….”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플로라는 멍하니 이든을 바라보았다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입술 새로 마르고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촉촉하게 젖은 듯한 두 눈과 약간 불그스름해진 뺨이 마음을 자근자근 밟는 것만 같았다.
‘우는 거야?’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이 맞을까.
지금 눈에 비치는 이든의 모습이 왜곡된 것이든 아니든, 자신을 걱정한 것에는 틀림이 없어 보였다.
저리 울먹이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막상 실제로 눈에 비치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괜찮아요.”
미안해진 플로라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한 자씩 천천히 끊어 말했다.
가만히 선 채 주먹만 꽉 쥐고 있던 이든은 그 말에 고개를 숙여 눈가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윤기가 흐르고 반짝이는 머리칼을 쓸어 올린 뒤, 다시 고개를 든 그의 얼굴은 처음 봤을 때보다는 한결 더 차분하고 따뜻하게 변해 있었다.
“괜찮으시다니 다행입니다. 레이디.”
말갛고 따뜻한 미소를 마주하자 플로라도 한결 마음이 놓였다.
“……폴은, 괜찮나요?”
눈을 뜬 순간부터 한시도 지난 기억이 잊히지 않았다.
얼룩덜룩 독에 물들어 있던 피부와 사경을 헤매는 듯하던 창백한 얼굴이.
플로라가 함께 다쳐 돌아온 기사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든은 마른 침을 삼켰다.
미리 철저하게 준비하기라도 한 듯 하고 싶은 말들이 줄줄이 머릿속에 들어차 있었지만, 플로라를 안심시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걱정했다고, 깨어나서 다행이라고, 당신의 눈빛과 목소리가 그리웠다고.
그런 말들은 온통 속으로 삼켜낸 채 이든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먼저 시작했다.
“치유는 하고 있지만 애초에 독이 너무 많이 퍼진 상태였습니다. 치명적인 상처도 많았고요.”
“…….”
“의식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차도는 보이고 있어요.”
독에 오래 노출되면 될수록 퍼지는 속도는 빠르겠지. 당연한 이치였다.
그래서 폴이 죽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플로라에게는 큰 위안이 되었다.
이곳에 와서 자신을 거리낄 것 없이 대해줬던 동료들이, 저 때문에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늘 그래왔듯이 또다시…… 시작되는 저주.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 저주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것이 혹 아르제카의 뜻이라고 할지라도 거스르고 싶어졌다.
“……폐하는 무사하신가요?”
그녀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또 한 사람.
플로라가 시몬의 안부를 묻자, 이든이 눈을 깜빡였다.
“폐하께도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니요. 그저 폐하의 안부가 궁금해서요.”
“폐하께선 무탈하십니다. 어제 검진을 다녀왔을 때도 이상이 없으셨어요.”
“……다행이네요.”
플로라는 옅은 한숨과 함께 잠시 눈을 꾹 감았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말은 무엇이든 막기에 늦지 않았다는 뜻과 같았다.
정말 다행이야.
긴장이 풀리자, 다시금 졸음이 쏟아져 왔다.
“……아직 몸을 움직이긴 힘드실 거예요. 좀 더 쉬세요.”
“고마워요. 이든…….”
무언가 망설이는 듯하던 이든이 축 늘어진 손을 꼭 잡아 왔다.
손과 손 사이로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한 번도 상처에 손을 대고 치유한 적이 없던 터라, 그의 접촉에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일렁거리는 마음을 조금 차분하게 만들어주었다.
나, 정말 살아 있구나.
플로라는 다시금 잠에 빠져들었다.
* * *
백작령에서 일어난 사건 덕분에 성은 발칵 뒤집혔다.
알 수 없는 독을 가진 괴한이 신입 기사를 습격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귀족들은 없었다.
후작 가문의 차남인 폴 카르틴이 그 참상의 주인공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영지의 주인인 마렌 또한 제도로 올라와 회의를 반복했고,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틈에는 시몬 역시도 끼어 있었다.
보기 드물게 회의에 꼬박 참여하는 황제의 모습에 놀라는 한편, 몇 귀족은 이 기회를 어떻게 이용해 먹을지 궁리해댔다.
시몬이 이리 열심히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회의에 참여하는 모습이 귀족들 눈에는 어리석고 우습게만 보였다.
습격당한 두 명의 기사 중 남은 한 명이 황제가 암암리에 성으로 데리고 들어온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시몬은 단순히 그녀를 걱정하는 이유만으로 회의에 참석한 건 아니었다.
그 일의 배후를 밝히는 일은 제 이익만 삼키려 드는 귀족들과 탁상공론을 하는 것보다 근위대를 통해 은밀히 알아보는 편이 빠를 테니까.
명망 있는 귀족가의 영식이 사건의 피해자로서 얽혀 있는 일이니, 황제도 조금이나마 이 참상에 책임감을 느끼고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려 한 것뿐이었다.
피라미들은 그것도 모르고 신이 나서 대안이랍시고 쓸데없는 것들을 들이 밀어대는 통에 굉장히 피로한 하루하루였다.
오늘도 그는 오전부터 시작되었던 긴 회의를 마치고 집무실에 왔다. 해야 할 일은 산더미였다. 대부분이 쓸데없는 안건이어서 보는 내내 짜증이 치밀었다.
<플로라 경이 깨어났습니다.>
그때 에르네가 집무실에 들어섰다.
머릿속에 울리는 그의 말에 시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리다 못해 벽에 쾅 부딪히는 소리에 수석 비서관 카디오크는 깜짝 놀라 펜을 떨어트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에르네의 말을 들은 것은 시몬뿐이었으므로,
카디오크는 그저 의아한 얼굴을 할 뿐이었다.
모처럼 요 며칠 집무실에 충실히 나오셔서 다행이다 싶었는데, 이번엔 또 무슨 기행이실까.
카디오크는 일말의 언질도 없이 빠르게 방을 빠져나가는 황제와 근위대장 에르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침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