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저기…… 오라버니, 괜찮아요?”
그때 누군가 그에게 다가왔다. 아이든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은빛 머리칼에 검은 동공을 한 작은 아이였다. 아이든은 이 아이를 잘 알았다.
“너, 뭐야?”
주군도 특별히 이 아이를 돌보고 있었다.
주군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에게 쏟아져야 하는데, 이런 성가신 아이에게도 빼앗기고 있으니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상황은 더더욱 불편했다.
뭐냐는 물음에 아이가 배시시 웃었다.
“나는 다섯 번째 아이예요.”
눈매가 접힐 정도로 예쁘게 웃는 것이 참으로 웃겼다.
아아. 다섯 번째 아이.
아이의 입에서 들으니 묘한 희열감이 느껴졌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하루 종일 울기만 하고 난리를 치던 것이…….
이렇게나 온순하고 귀여워졌다.
모든 것이 그의 영약 때문이었다.
‘신. 내가 이 모든 사람의 신이야.’
아이든도 배시시 웃었다.
“그런데 오라버니. 아까 전하께 맞은 데는 괜찮아요?”
아이가 그렇게 묻기 전까지는, 기분이 썩 좋았던 것 같다.
아이든은 표정을 확 굳히고 앞으로 내려온 앞머리를 밀어 올렸다.
이 맹랑한 것이 숨어서 모든 걸 다 지켜본 모양이었다.
“전하께서는 왜 자꾸 오라버니를 때려요? 오라버니가 불쌍해요.”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입술을 삐죽이는 것이 짓밟아 버리고 싶을 만큼 짜증이 났다.
왜 자꾸 때리냐고 하는 걸 보니 한두 번 훔쳐본 솜씨도 아닌 모양이었다.
하. 그의 입가에서 짧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누가 누굴 불쌍하게 여긴다는 건지.
“……내가 불쌍해?”
아이는 말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 많이 아프지요? 내가 호 해줄게요.”
그리고 아이는 허락도 없이 멋대로 다가와서는, 볼에 바람을 호 하고 불었다.
뺨이 간지러웠다.
참으로 오랜만에 꾼 꿈이었다.
* * *
벌써 내일이면 제도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산에서는 더 이상 마수가 나타나지 않았다.
근래의 마굴은 예전보다는 적게 나타나는 편이라, 임무를 끝내자마자 다른 지역으로 원정을 갈 일도 없었다.
그러니 카신도 믿고 신입을 보낸 것이겠지만.
아무튼 백작령에는 언제 마수가 나타났었냐는 듯 평화로운 일상이 지속됐다.
기사들은 교대 근무가 아닌 이상은 먹고, 마시고, 마을을 돌아다니는 등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플로라도 사르트와 얼결에 지난번 보초를 함께 서던 경비가 알려준 맛있는 음식점에 다녀왔다.
오랜 시간 훈제로 구운 바비큐를 파는 곳이었는데, 솔직히 맛은커녕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뒤늦게 생각해도 그 맛이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플로라의 마음은 여전히 폭풍전야였다.
더 이상 쪽지가 오지도 않고, 의문의 사람이 그녀에게 접촉하는 일도 없었다.
그게 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성으로 돌아가고 싶다.’
직접 시몬의 상태를 확인하지 않는 이상 이 불안은 잠재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하키라 단장에게 급한 전령이 오지 않는 걸 보면 무사하다고 생각해도 될지.
혹여 오늘은 올까, 내일은 올까 노심초사한 나날들이었다.
왜 마음이 조급할 때는 유독 시간이 안 가는 것 같은지도 모르겠다.
“플로라, 요새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플로라는 앞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언제 온 것인지 폴이 맞은편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니…… 없어.”
플로라가 흐릿한 미소를 짓자 폴이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그녀의 대답을 결코 믿지 않는 눈치였다.
“너 요새 좀 이상한 거 알지? 식사하다가도 갑자기 멍해지고.”
“백작령 공기가 나랑 안 맞나봐. 머리가 멍하네.”
말이 되는 소리냐는 듯 폴이 웃었다. 그러다 짐짓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아니야.”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털어놔도 돼. 나도 비밀을 털어놨잖아. 친구 좋다는 게 뭐야.”
“별거 아냐. 활 때문에 그래.”
활 이야기가 나오자 폴이 시무룩한 표정을 했다.
“그래. 그 활 말이야. 도대체 누가 그랬을까?”
주변을 경계하듯 휙휙 돌아본 폴이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상체를 플로라 쪽으로 쭉 빼고 속삭였다.
“활을 쏠 때마다 명중이라고, 사람들은 네가 바람을 다스리는 것 같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네가 주목받으니까, 누군가 배 아파서 그런 짓을 벌인 게 분명해.”
“누가?”
폴이 어깨를 으쓱였다. 여전히 플로라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평소 네 능력을 질투하던 상관들 중 한 명이겠지. 내 상관들이 그렇게까지 치졸하다고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 말이야.”
그 옆에 놓였던 쪽지만 아니었다면 플로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였다.
“그런가.”
“이유가 그것밖에 없잖아. 아니면…….”
“아니면?”
“누군가 네 활을 만져보고 싶긴 한데, 너무 소심해서 부탁할 수가 없었던 거야. 그래서 네가 없는 틈을 타 몰래 방에 들어갔다가 사고를 쳐버린 거지.”
플로라는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넌 소설가나 음유시인이 되었어도 잘 됐을 거야.”
“누나가 읽는 책을 몇 번 뺏어 봤더니 상상력이 풍부해지긴 했어.”
폴도 가볍게 이야기 한 것이었는지 어깨를 으쓱이고 자세를 똑바로 고쳐 앉았다.
“어쨌든 수리는 될 것 같다니까 다행이야.”
“……응.”
식사를 마친 플로라와 폴은 식당을 나섰다.
폴은 아직 다리가 완전히 회복된 것이 아니라, 걷는 것이 불편해 보였다.
느리지만 멀쩡하게 걷다가도 금세 다리를 절뚝였다.
“다리는 좀 어때?”
“신관님이 신경 써서 살펴주신 덕분에 상처가 많이 아물었어. 근육이 파열된 게 아직 남아서 걸을 때 욱신거리기는 해. 그래도 오늘까지 치유를 마저 받으면 내일 제도로 걸어가는 데엔 지장 없을 것 같아.”
“다행이네.”
“신관님께서 조금씩 걸어주면 좋다고 해서 마을로 산책을 나갈 생각인데. 너도 같이 가지 않을래?”
“아…… 음, 미안. 난 조금 쉬고 싶어.”
“그래. 할 수 없지. 너 좀 피곤해 보이긴 한다.”
“부단장님께는 말씀드린 거지?”
“당연하지. 아까 식사하기 전에 허락받았어.”
플로라가 보기에 폴의 상태는 괜찮아 보였다.
다리가 아니라, 마음이 말이다.
안색이 여전히 파리해 보일 때도 있었지만, 잠을 아예 못 잔 것처럼 수척하지도 않았고, 웃기도 하는 것을 보니 어떻게든 잘 버텨 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마법으로 만든 마수와 싸워 얻은 후유증에서도 금세 벗어난 사람이었다.
또한 지금도 마음에 쌓인 무거운 짐을 그만의 방식으로 이겨내고, 어떻게 버텨야 하는지 터득해나가고 있을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니 폴은 앞으로 하네칸에서 유능한 제국의 기사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너무 멀리 나가지는 마.”
“알았어.”
폴은 마지막 날인 오늘이 되어서야 백작성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백작령은 살면서 처음 와본 곳이니, 구경할 겸 산책을 가봐야겠다며 떠났다.
그의 다친 다리가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그를 따라 산책을 나설 만큼 마음의 여유가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플로라는 폴과 헤어지고, 방으로 돌아왔다.
혼자가 되면 어둠은 익숙한 듯 그녀를 찾아온다.
적막과 고요, 그리고 불안과 긴장이 그녀뿐 아니라 온 방을 헤집고 다니는 더러운 느낌이 들었다.
‘설마 센칸의 사람이 아닌 건가……? 정말 내부 소행인가?’
다시금 쪽지를 두고 간 이의 정체에 대한 고민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플로라는 침대에 앉아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는 잠시 제쳐두고 마음을 비워야 하건만, 예삿일이 아니다 보니 의지와는 다르게 계속 생각이 났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 * *
“사르트 경, 혹시 폴 경을 못 보셨습니까?”
플로라는 어느새 제 옆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 사르트를 보았다.
“난 못 봤는데. 폴 경의 상태는 많이 나아졌나?”
“예. 그렇습니다.”
“완치된 건 아닐 테니 내일 많이 도와주도록 해.”
“……알겠습니다.”
플로라는 사르트의 말에 꼼꼼히 대답하며 눈을 굴렸다.
폴은 저녁 시간인데도 식당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야 식사에도 자유가 생겼다며 오늘 하루는 한 끼도 거르지 않을 거란 결의를 표현했던 그였다.
올 것 같던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궁금해졌다.
마을에 산책하러 나갔다가 더 악화된 것은 아닌지. 아니면 혼자 맛있는 거라도 먹고 와서 배가 부른 것인지.
사르트가 다시 말했다.
“내일부터는 힘든 여정이 될 거야. 다리를 다친 신입에게는 더더욱. 그래서 일찍부터 쉬고 있는지도 모르지. 정 걱정이 되면 식사를 마치고 방에 한 번 들러 보는 게 어떻겠나. 플로라 경.”
플로라가 알겠다고 대답한 순간이었다.
“여기 좀 도와주세요!”
어떤 남자의 고함 소리와 함께 시녀들의 짧은 비명이 들려왔다.
“무슨 소란이지?”
“……그러게 말입니다.”
“가봐야겠다.”
성에서 이리 큰 소리가 날 만한 일은 거의 없었다.
식사를 채 끝내지 못했음에도 사르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플로라도 분주하게 그의 뒤를 따랐다.
“폴?”
그리고 로비에 쓰러져 있는 폴을 발견했다.
플로라는 제 눈을 의심하듯 여러 번 눈꺼풀을 짙게 감았다 뜨길 반복했다.
비록 등을 보인 채 엎드려 있었지만, 옆으로 보이는 얼굴이나 행색은 폴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