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시간이 지나자, 폴의 불규칙적이던 숨소리가 고르게 변했다.
어딘지 인위적으로 느껴졌던 얼굴 표정 또한 편안해 보였다.
‘잠들었나 보네.’
혼자 두면 다시 잠이 들지 못할까 봐, 곁에서 계속 감시했던 게 도움이 된 듯했다.
플로라는 잠든 폴을 안쓰럽게 보았다.
그는 며칠 힘든 수색을 함께 하면서 같은 조원이었던 기사들에게 정이 든 모양이었다.
자신의 두려움으로 인해 그들을 잃었다는 죄책감을 느끼는 마음은 백번 이해가 되었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이 얼마나 스스로를 무겁게 만드는지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녀 역시 살아오면서 곁을 내어줬던 많은 사람들을 잃어 봤으니.
그저 그 생각에만 잠식당해 스스로를 더 괴롭게 만들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플로라는 폴의 방을 나섰다.
복도를 나서자마자 사르트와 맞닥뜨렸다.
“플로라 경.”
“안녕하십니까. 사르트 경.”
“어디서 나오는 거지?”
“아, 폴 경의 방입니다. 병문안을 왔습니다.”
“상태는 좀 괜찮은가?”
플로라는 정자세로 서서 사르트가 하는 말에 대답했다.
“제도로 떠날 때쯤엔 거의 나을 거라고 신관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다행이군. 그럼 상처 말고는 괜찮은가? 두려움에 떤다든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익숙한 것처럼 퍽 담담한 어조였다.
플로라는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전사한 동료들에게 죄책감을 좀 가지는 것 같습니다. 간밤에는 잠도 제대로 못 잔 듯하고요. 이제 겨우 잠든 걸 보고 나왔습니다.”
사르트는 그의 상태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로서 언젠가 한 번쯤은 겪어야 할 일이었다. 잘 이겨낼 수 있도록 네가 동료를 잘 챙기도록 해. 그럼 이따 수색에서 보지.”
“……알겠습니다.”
플로라는 사르트와 헤어진 뒤 곧장 방으로 돌아왔다.
곧 있으면 플로라가 속한 1조가 산지로 수색을 떠날 시간이었다.
활을 챙기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플로라는 문을 연 채로 잠시 굳어 섰다.
방을 비운 시간은 한 시간 정도.
그 사이 누군가 다녀간 흔적이 보였다.
침대 위에 부러진 활과 반으로 접힌 쪽지가 놓여 있었다.
방에 조용히 들어선 플로라는 일단 누군가 숨어있을 만한 장소를 살펴보았다. 옷장 속, 침대 밑 창문 너머까지도.
이미 떠난 모양인지 타인의 흔적은 없었다.
플로라는 카신에게 선물 받았던 활을 들었다. 활대를 반대로 휘어 부러뜨린 듯 깔끔하게 두 동강이 나 있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플로라는 미간을 구긴 채 쪽지를 펼쳤다.
[네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을 앗아가겠다. 배신자 플로라.]
그리고 짧은 내용의 문구를 전부 읽어 내린 플로라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활이 부러진 것을 봤을 때까지만 해도 침착하게 분노를 다스렸던 그녀의 머릿속이 공포로 얼룩진 건 순식간이었다.
잠시 이 평화에 취해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언제나 흥분으로 도취된 듯 보이는 탁한 분홍색 눈동자와 헝클어진 금발 머리, 그리고 창백한 피부에 늘 딱딱하게 엉겨 붙은 핏자국.
아이든의 얼굴을 떠올린 순간, 심장이 터질 듯 조여오며 머리가 어질해졌다.
단순히 그녀를 시기하고 질투했던 기사의 유치한 소행 중 하나일 거라고만 막연히 짐작했다.
한데 쪽지를 보니 예측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플로라는 다리에 일순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겨우 침대에 앉았다.
센칸이 자신을 계속 추적해올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시몬의 품이 너무 안온해서 그 위협이 몸으로 직접 체감되지 않았을 뿐…….
플로라는 밀려드는 불안감에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었다.
그동안 느꼈던 평화가 한순간 와장창 깨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달콤하고 평온했던 꿈은 깨지고, 다시 지옥의 소용돌이 같은 현실이 찾아왔다.
‘……저, 다녀오면 꼭 할 말이 있어요.’
이 일을 끝내고 돌아가면, 시몬에게 모든 것을 말하려 했다.
자신이 살아온 과거에 대해서. 그리고 센칸에 관해서.
처음부터 말하지 못했던 것은 시몬 역시 플로라에게 수상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제국의 수장이라는 자가 함부로 굴러 들어온 불법 이민자를 정착할 수 있게끔 도와주었을 뿐만 아니라, 맹목적으로 따뜻하게만 대해주니 분명 무슨 수가 있을 거라고 짐작하고 경계했다.
하지만 시간이 차츰 지나면서 경계하는 마음은 허물어졌고, 그를 걱정하는 마음이 커졌다.
센칸은 강대국인 하네칸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래도 첩자를 심는 능력은 탁월했다.
센칸의 영웅이었던 플로라가 ‘적국’인 하네칸에 충성을 맹세한 것을 알면 라비우와 아이든이 그녀를 가만히 둘 리 없었다.
성에 센칸의 사람은 한 명도 없이 깨끗할 거란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
일하는 시녀, 기사를 심었을 수도 있고 귀족을 매수했을지도 모른다.
그걸 경계했다.
자신이 비밀을 말하면, 또한 말했다는 것을 센칸이 아는 순간, 모든 위협이 불시에 자신뿐만 아니라 시몬에게도 덮칠 것은 자명한 일이었으니까.
당장 시몬에게 위협을 더하고 싶지 않았다.
분명 자신부터 공격해올 것이란 걸 알았기 때문에 혼자 내부 상황을 파악할 시간을 벌 생각이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너무 평온해서…… 그 행복에 잠시 눈이 멀어 마음을 놓았다.
소중한 것을 앗아간다는 말이 평소보다 더 무섭게만 느껴졌다.
‘시몬만큼은 안 돼.’
지킬 것이 생긴다는 건 이런 감정이구나.
플로라는 자신의 태양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 * *
“안녕하십니까. 단장님.”
“어? 플로라 경. 안녕. 잘 쉬었어?”
“예. 잘 쉬었습니다.”
하키라는 1조 집합 장소인 성문에 이미 나와 있었다.
플로라가 먼저 단장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자, 그가 살랑 눈웃음을 지으며 안부를 물었다.
하키라도 푹 쉰 모양인지 며칠 산에서 먹고 지내며 보았던 지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하키라의 눈이 빠르게 플로라를 훑었다.
“오늘은 검만 챙겼네? 활은?”
“……네. 부러졌습니다.”
“으응? 어쩌다가! 그거 완전히 새것처럼 보였는데?”
둥그렇게 변한 눈이 얼른 이유를 설명해달라는 것 같았다.
하키라가 자신의 무기가 부러진 것처럼 충격받은 얼굴인 반면, 플로라의 표정은 아주 차분했다.
이미 방 안에서 혼자 분노할 대로 분노하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힘 좋은 사람이 거꾸로 휘면 금방 부서질 겁니다.”
“……경,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정확히 말하자면 부러져 있었습니다.”
하키라는 플로라의 차분하지만 조금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무얼 뜻하는 건지 생각해보다가, 설핏 미간을 구겼다.
“그럼 누가 부러트렸다는 거야?”
“네.”
“……범인은 모르고?”
“네.”
“어떤 겁 없는 놈이 기사의 무기에 함부로 손을 대지?”
하키라는 생각만 해도 화가 난다는 듯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플로라는 침묵했다. 방에 몰래 들어온 이가 무기를 부러트리고 갔다는 것밖엔 해줄 수 있는 이야기가 없었다.
“짐작 가는 놈은 없고?”
“……예.”
“흠. 성 내에서 방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이라……. 심지어 여자 숙소는 다른 층이잖아? 물론 용건이 있으면 누구든 올라갈 수도 있기야 하겠지만. 그럼 성의 고용인이나, 기사들 중 하나란 소린데.”
“…….”
“……아니라고 믿고 싶다.”
하키라는 혼자 범인에 대해 추리를 시작했다. 그러다 무슨 끔찍한 생각을 한 건지 혼자 고개를 휘휘 저었다.
“경, 무슨 원한 살 일을 한 것도 없어?”
원한 살 일이야 많았지. 물론 하네칸에선 아니었다.
플로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 사이 1조가 전부 모였다.
인사를 나누자마자, 기사들은 그녀의 활의 행방을 궁금해했다. 아주 곤란하게도.
그녀가 어제 엄호했던 일로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이 있어 이제 활이 상징이 되어버린 듯했다.
어떤 사람은 마치 바람의 신 같았다고 칭찬해주기도 했다.
플로라는 그저 어쩌다 부러졌다고만 짧게 이야기하고 수색을 떠났다.
* * *
“널 데리고 오는데 들인 금화가 얼마나 되는 줄 아나. 아이든.”
짝. 아이든의 뺨이 돌아갔다.
“게다가 네게 매달 지급되는 금화도 만만치 않아.”
“…….”
“그저 놀고먹으라고 데려온 줄 아나?”
다시 한번 짝, 소리가 나며 이번엔 완전히 바닥에 철퍼덕 넘어져 버렸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아이든이 무릎을 꿇은 채 제 앞에 선 왕을 올려다보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에 비하면 이 정도 맞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귀가 얼얼했지만, 참을 수 있었다.
‘주군께서 내게 실망해서 그런 거잖아. 실망해서.’
아이든은 주먹을 꽉 쥔 채로 울지 않기 위해 참았다.
“제대로 된 걸 만들어 내. 내게 도움 되는 짓을 좀 하란 말이야.”
라비우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 아이든을 내려다보았다.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를 내려다보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었기에 이 또한 자연스러웠다.
“예…… 예, 전하.”
“조금만 더 노력해. 알았어?”
겁을 잔뜩 집어먹은 아이든의 모습에, 라비우가 한숨을 푹 쉬더니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그에 아이든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옅은 웃음을 지었다.
“네가 이 섬사람들의 신이 되는 거야.”
“……신?”
아이든의 앞에 쪼그려 앉은 라비우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그래. 신.”
라비우는 손을 뻗어 아이든의 금빛 머리칼을 세차게 헝클어뜨렸다.
아이든은 환상에 갇혀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라비우가 떠나고도 아이든은 한참을 바닥에 주저앉은 채 있었다.
‘신. 신이 되는 거야.’
아이든은 주문처럼 그 말을 되뇌었다.
라비우는 아버지에 의해 미친 연금술사에게 팔려 갈 뻔한 자신을 구해주었다.
그것도 모자라 먹고 마실 것을 풍족하게 주었고, 하고 싶은 연구와 공부도 전부 하게 해주었다.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연금술로 만든 영약을 팔고, 마른 빵 한 조각 먹는 날이면 그게 다행이던 시절은 이제 없다.
이 섬에서 완벽한 창조신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었다.
온몸 가득 짜릿한 희열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