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흑기사단으로 와!”
쿨럭. 벌써 세 번째 기침이었다.
모두 플로라의 침대 옆에 목석처럼 서 있는 남자 때문이었다.
‘안녕! 또 보네! 나는 하키라 제니카온이고, 흑기사단의 단장이야.’
마치 시몬이 황제임을 알았을 때처럼…… 위엄 같은 건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는 발랄한 자기소개에 한 번.
‘내가 뇌물을 좀 가져왔어! 같이 식사하자!’
천연덕스럽게 함께 식사하자는 말에 또 한 번.
그리고 세상 무해한 얼굴로 입단을 권유하는 말에 또다시.
그 사이 플로라에게 인사할 시간 따위는 허락되지 않았다.
“저는 플로라입니다. 반갑습니다. 하키라 단장님.”
겨우 침대에서 벗어난 플로라는 하키라 단장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하키라는 반갑다며 악수를 청했다.
“침대에 앉아 있어도 되는데. 움직이기 힘들지 않아?”
“괜찮습니다. 단장님께서 같이 식사하자고 하셨잖아요.”
“아, 그렇지. 참. 내 정신 좀 봐. 얼른 테이블에 앉자.”
하키라는 어제 보았던 정복이 아닌 편한 단복을 입고 있었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 화려하다는 수식어를 붙였던 만큼 오늘도 가슴께에 붉은 보석이 박힌 커다란 브로치를 한 채였다.
플로라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다가 테이블로 향했다.
하키라가 자신이 가져온 음식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나 지금 좀 산만해? 엄청 떨려서 그래. 그만큼 꼭 데려가고 싶어서.”
“……저를 왜요?”
“띄워주길 바라는 거야, 아니면 솔직하게 말해주길 바라는 거야?”
“솔직하게요.”
“넌 마스터가 될 재목이니까. 강하면 기사단에 큰 도움이 되기도 하고.”
“…….”
“검도 잘 써, 활도 잘 써, 마력도 지니고 있어, 참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 같잖아. 갈고 닦으면 흑기사단 최고의 보물이 될 거야.”
그가 눈까지 반짝반짝 빛내면서 얘기하는 턱에 뭔가 분위기가 자연스레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했는데, 왜 결국 띄워주기로 끝난 것 같지…….
이든에게 단장님들이 직접 병문안을 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한껏 긴장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하키라가 가볍게 대해주는 덕분에 조금 여유가 생겼다.
플로라는 하키라를 ‘좀 산만하지만 편한 사람’으로 정의했다.
그와 식사를 하면서 궁금했었던 것을 묻자, 의외로 진지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흑기사단에선 주로 어떤 임무를 받나요?”
“원래 흑기사단은 마수 토벌을 주 임무로 삼았지만 지금은…… 많이 변했어. 마굴은 계속해서 생겨나는데, 토벌을 할 만한 인원이 부족하거든. 그래서 지금은 백기사단이나 흑기사단이나 같은 일을 한다고 보면 돼. 서로 인원이 많이 부족해서.”
하기야 어제 치른 시험의 합격자 수만 봐도 왜 기사단에 인원이 부족한지 알 것 같았다.
플로라가 그럼 사람을 더 뽑으면 되지 않느냐고 묻자, 하키라가 어색하게 웃었다.
“두 번째 시험은 우리가 기사로서 살아갈 때, 최악의 경우 어떤 일까지 당해야 하는지 미리 보여준 경고였어. 딱 보기에도 견딜 수 없는 사람은 걸러야지. 자칫 잘못했다간 평생 잊지 못할 트라우마를 안고 살 테니까.”
플로라가 겪어본 바로 이해 못 할 얘기는 아니었다.
아까 이든에게 팔을 치료받을 때 솔직히 무서웠다. 기억 속에 영영 아픔이 자리 잡은 채, 자신을 괴롭힐까 봐.
어제 마주했던 마수의 섬뜩한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손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였다. 웬만한 사람들은 그 공포를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카신 경과 내가 단장이 되기 전 기사단의 위신은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어. 돈과 학벌, 혈연이면 누구나 입단이 가능했지.”
“…….”
“지금은 그런 것들을 천천히 바꿔가려고 노력 중이야. 지금 황실 기사단에는 내 한 몸 바쳐서라도 제국을 수호할 용기를 가진 사람이 필요해. 어제 봤잖아. 어지간한 용기로는 이 일 못 해. 작위 받고, 월급 받으면서 태평하게 성만 지킬 생각인 사람들은 당장 도망가라고 친 시험이야.”
플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원이 안정되면 임무는 다시 분리될 거야. 아까 말했듯 흑기사단은 마굴 토벌을 위주로 하고, 백기사단은 황실 수호가 주목적이지만 국경 수비와 제도에서 일어나는 큰 사건들도 담당해서 처리해.”
“…….”
“너 같은 인재는 흑기사단에 와서 마굴 토벌을 해야 해. 물론 강요는 아냐! 네가 백기사단에 간다고 해도 괜찮아. 내가 애들한테 좀 구박받을 뿐이고…….”
“…….”
“어차피 지원 요청하면 되니까.”
“……예?”
진지하게 잘 말하다가 능청스레 웃는 모습에 플로라가 넋을 놓았다.
그렇게 하키라와의 오찬은 끝이 났다.
* * *
저녁에는 카신 르벨로티아가 방문했다.
조금 무뚝뚝하고, 차가워 보이기는 해도 카신은 하키라에 비하면 정말 평범한 사람이었다. 불필요한 인사치레 대신 그는 짧은 소개와 함께 곧장 테이블에 앉았다.
어제 시험 때 말을 무시하고 도망친 일로라도 뭐라 할 줄 알았더니, 식사를 시작할 때까지 끝끝내 그에게선 아무 말이 없었다.
“어떤 기사가 되고 싶나?”
그리고 식사가 다 끝나갈 무렵에서야 카신이 처음 입을 열었다.
플로라는 갑작스러운 그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카신은 재촉하지 않고 그녀를 잠자코 기다려주었다.
플로라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저는…… 지금까지 제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든 외면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약자를 수호하고, 대의를 위해 정의를 버리지 않는 기사로 살고 싶습니다. 그런 기사가 되고 싶어요.”
어떻게 해야 멋있게 들릴지는 모르겠다.
그저 플로라는 그동안 마음에 담아 두었던 자신의 꿈을 꺼냈다.
하네칸에 머물기로 마음먹으며 구체적으로 꾸기 시작한 꿈들.
어제 라벨리우 가의 영식에게도 했던 말이지만, 이상하게 그때보다 지금 더 벅찬 감정이 밀려들었다.
카신이 플로라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난 네가 마음에 든다.”
“…….”
“실력에 대한 칭찬은 하키라 단장이 이미 입에 침이 마르도록 했겠지. 부족한 면도 있지만 확실히 신입인 걸 감안해서는 완벽해. 바로 임무에 투입된다고 해도 문제없을 정도야. 게다가 장차 마력을 다룰 수 있게 되었을 때, 제국 마스터만큼의 위력을 낼 수 있는가도 기대되고.”
“…….”
“그리고 방금 말한 네 생각도 마음에 든다. 나는 다른 것보다 네 꿈을 지켜주고, 응원하고 싶어. 그런 기사가 될 수 있도록 내가 이끌어주고 싶은데.”
묵직한 목소리가 심장에 철렁 내려앉았다.
“백기사단으로 오겠나?”
따뜻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말 한마디에 정이 묻어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꿈을 지켜주고, 응원하고 싶다는 말이 플로라에겐 마냥 따뜻하게 들렸다. 어떤 미사여구보다 좋은 말처럼 느껴졌다.
플로라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여버리고 말았다.
* * *
앞으로 일주일 동안은 이곳에서 휴식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찢어질 듯 아팠던 팔이 다행히 하루 만에 돌아왔으니 앞으로 남은 시간은 그저 먹고, 자면서 마음을 정돈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리고 이번엔 잊지 말고 이든과 신전 구경도 해야겠다고 생각한 찰나였다.
“식사는 했어?”
익숙한 목소리에 플로라가 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뭐예요. 이번에는 마법사로 위장한 거예요?”
“비슷해 보이긴 하다만 틀렸어. 그냥 제도에서 산 로브야.”
시몬은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쓴 채였다.
플로라가 그의 행색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도 못 알아봐요?”
“응. 고개 숙이고 있으면.”
“다시 온다면서 이리 늦게 오실 줄은 몰랐어요.”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시험이 끝난 직후였다.
이든에게 치유를 받을 때 자리를 비켜주면서, 다시 오겠다고 해놓곤 며칠 만인지 모르겠다.
내심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플로라는 저도 모르게 속내가 튀어나왔다.
“일이 많았어. 설마 기다렸나?”
“아, 아니요. 그냥 해본 말이에요.”
“뭐야. 그런 말 그냥 하는 거 아니야. 듣는 쪽은 심장이 철렁했다고.”
시몬이 제 심장을 문지르는 행동에 플로라는 또 허풍이라는 듯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를 기다린 이유가 있었다. 얼른 말해주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몬은 이미 소식을 듣기야 했겠지만, 그래도 그에게 제일 먼저 말해주고 싶어서 지금까지 꾹꾹 참아왔다.
이든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잠깐씩 틈내서 방에 들르는 루가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시몬, 저…… 백기사단에 입단하기로 했어요!”
그녀를 보던 시몬이 눈꼬리를 접었다. 놀라지 않는 걸 보니 역시 듣긴 들은 모양이었다.
“그래. 축하해. 백기사단 소속 플로라 경.”
그래도 따뜻한 얼굴로 칭찬해주니 기분이 몽글몽글해졌다.
시몬은 손을 뻗어 그녀의 은빛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파티해야지. 진짜 내 제국민이 되었으니.”
“어떻게 할까요?”
“휴가는 얼마나 받았나?”
“일주일이요. 이제 6일 남았어요.”
“그렇군. 팔도 괜찮아졌다고 들었는데.”
“네. 멀쩡해요.”
그런 것도 일일이 다 보고 받는구나.
잠깐 쓸데없는 생각에 휘말렸던 플로라가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세게 가로 저었다.
“왜?”
“아…… 아니에요. 잠깐 다른 생각이 들어서요.”
그런 건 직접 확인하러 와줬으면 좋겠다는, 터무니없고 경솔한 생각.
왜 갑자기 그런 생각에 휘말린 건지 알 수 없었다.
플로라는 혼란을 지워내기 위해 얼른 화제를 바꿨다.
“파티는 어떻게 할 거예요?”
“놀러 가자.”
“어디로요?”
“일단 오늘은 하네칸 제도 관광?”
그리고 시몬은 그녀의 머릿속에 자리한 혼란을 완벽히 몰아낼 만한 말을 해주었다.
“……성 밖에 나가자는 말이에요?”
“그러려고 이런 차림으로 왔는걸.”
“그래도 돼요? 우리 둘만?”
“아마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있는 녀석들이 있겠지만, 응. 표면적으로는 우리만.”
“아무리 그래도 위험하지 않을까요?”
“괜찮아. 대낮에 멀리 떨어진 사냥터도 다녀오던 사람인데.”
플로라는 시몬의 말에 그와 처음 만났던, 자신의 옛날 집을 떠올렸다.
“그럼…… 혹시 그때도 있었어요? 에르네 님이요.”
“아, 그렇지? 음, 네가 놀라서 도망갈까 봐 숨어 있으라고 했어.”
“에르네 님이 그래서 저를 그렇게 싫어하는 거였어요.”
플로라의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을 시몬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