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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여기사에게 구원받았다 (24)화 (24/154)

24.

“내일 오찬에 흑기사단장 하키라 제니카온 님이 병문안을 오신다고 하셨어요. 만찬 때는 카신 르벨로티아 님이 오실 거고요.”

치유를 마친 이든은 플로라에게 말을 전하며 아까 숙소 복도에서 마주친 두 단장을 떠올렸다.

두 단장이 플로라의 병문안을 가는 것으로 서로 먼저 가겠다며 실랑이를 벌였으니, 그녀에 대한 얘기가 소문이 안 나려야 안 날 수 없었다.

유치한 말싸움은 끝이 없어 보여 결국 중재는 이든이 해야 했다. 그가 순서를 정해주니, 다행히 두 단장이 군말 없이 받아들인 덕에 상황은 종료되었다.

한동안 그 웃긴 모습들을 떠올리면 울적한 기분도 단번에 좋아질 것 같았다.

그 사이, 이든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플로라가 물었다.

“원래 기사단장님들이 시험 직후 병문안을 오는 게 관례인가요?”

“아니요. 그런 관례는 없어요. 아마 입단 권유를 하러 오시는 게 아닐까요?”

“……아?”

그의 말대로라면 백기사단, 흑기사단에서 모두 입단 권유를 한다는 건데…….

“멋있어요. 레이디.”

설마 했는데 진짜 그런 건가……?

떨어질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해서 그런지 두 기사단장에게 모두 입단 권유를 받는단 소리가 얼떨떨했다.

“저는 곧 저녁 기도 시간이라 가봐야겠어요. 레이디, 그럼 편안히 쉬고 계세요.”

“아, 네. 항상 감사하고 있어요. 이든.”

“아, 복도에 성기사가 있을 거예요. 혹여 배가 고프시면 그에게 길 안내를 부탁하면 돼요.”

이든이 눈을 접어 웃어주곤, 이내 방을 나갔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꿈을 향해 내디딘 첫발이 어쩐지 순조로운 것 같아 느낌이 썩 나쁘지 않았다.

* * *

“플로라 님!”

이든이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루가르가 병실에 찾아왔다.

양손 가득 뭘 들고 온다고 낑낑거리며 문을 열고 제대로 닫지도 못한 채, 정신없이 구는 그녀를 플로라는 넋 놓고 바라보았다.

그녀는 시녀복이 아닌 여명기사단의 단복을 입고 있었다.

“단복이 잘 어울리네요. 루가르 님.”

“아이…… 아니에요.”

플로라의 칭찬에 손을 내저으며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퍽 사랑스러웠다.

“몸은 괜찮으신 거예요?”

“완전 멀쩡해요. 방금 이든이 다녀갔거든요.”

“하기야…… 이든 님 치유력이라면 확실히 믿을 만하죠. 그러니 폐하의 주치의도 맡으시고, 대신관님께서 후계 수업도 하시는 것 아니겠어요?”

“…….”

루가르가 들고 온 쟁반을 탁상 위에 올려두고 중얼거렸다.

그 말에 플로라는 헛숨을 삼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혀 몰랐던 사실을 알아 버렸다.

황제의 주치의, 그리고 대신관 후계……!

아니, 이든…… 엄청 대단한 사람이었잖아? 이 나라는 능력과 미모가 비례한 건가.

이쯤 되면 하나는 확실했다. 아르제카 신께서는 미남들을 좋아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나저나 시험은 잘 보셨어요?”

“최선을 다했어요. 결과는 노력한 만큼 나오지 않을까요?”

“플로라 님이라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거예요.”

플로라는 구태여 두 단장이 내일 방문하기로 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아직 입단 권유를 받은 것도 아니니, 섣불리 기대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혹시 두 번째 시험은 어떠셨어요? 새로 생긴 그 시험이 악명 높기로 유명하거든요.”

“끔찍했어요. 마법으로 만든 마수와 십 분 동안 싸웠거든요.”

“……맙소사.”

루가르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곤 끔찍하단 말을 되뇌다가 플로라를 유심히 살폈다.

“정말 괜찮으신 거죠?”

“네. 괜찮아요.”

순수한 걱정이 비치는 옅은 갈색의 눈동자가 구슬처럼 데구루루 굴렀다.

“설마 혼자 싸우진 않으셨겠죠?”

“…….”

“설마요. 혼자요?”

루가르가 뿔이 난 듯 눈을 찡그리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리곤 아무 일 없어서 다행이라며 고생했다고 플로라를 다독여주었다.

플로라는 찰나의 침묵을 깨고 루가르를 향해 말했다.

“……루가르 님,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루가르 님은 어느 기사단에서 여명 기사단으로 가신 건가요?”

플로라의 질문에 순간 루가르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딘지 불안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플로라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 저, 그…….”

“아, 혹시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라면 안 해주셔도 돼요.”

아랫입술을 꾹 물고, 고개를 숙였던 루가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는, 황실 기사단이 아니라, 지방 기사 출신이에요. 우연찮게 대장님을 만나서 여명 기사단으로 입단했어요.”

황실 기사단 출신이 아니라는 게 그녀의 자신감을 떨어트린 걸까.

플로라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는 루가르를 보았다.

하기야 아카데미 출신이 아니라고 무시부터 하고 보는 기사도 있는데,

황실 기사단 출신이 아니라고 깔보는 사람들이야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루가르 님.”

“네, 네?”

루가르를 보면 이따금 르네 생각이 날 때가 있었다. 지금처럼.

플로라는 그녀의 손 위에 가볍게 제 손을 포개었다.

“루가르 님께 누가 뭐라 하든, 신경 쓰실 것 없어요. 지금 루가르 님은 여명 기사단이자, 황제 폐하의 직속 근위대잖아요. 그러니까 좀 더 당당해지셔도 돼요.”

“……플로라 님.”

“얼마나 대단하고 멋있어요. 루가르 님께 뭐라 하는 사람들은 다 부러워서 그런 거예요.”

말하고 보니 좀 낯간지러웠지만, 루가르의 마음이 좀 풀린 것 같으니 그걸로 됐다.

“그렇게 말해주셔서 감사해요. 저 좀 더 용감해질게요! 사실 출신을 얘기하고 나면, 은근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아무리 들어도 무뎌지지가 않네요.”

“그런 마음 잘 알아요. 여자라는 이유로 무시하고, 또 출신이 천하다고 멸시하고…… 하지만 오늘 아침에도 루가르 님이 제게 그러셨잖아요. 콧대를 납작하게 해줘야 한다고요. 루가르 님도 그러셔야 해요! 루가르 님은 폐하를 모시고, 에르네 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잖아요.”

“저도 노력할게요! 그래야 제가 후배 플로라 님도 지키니까!”

루가르가 결의를 다지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런 루가르를 바라보며 플로라가 속삭였다.

“믿을게요. 선배.”

그녀의 말에 루가르의 얼굴이 단박에 화르르 붉어졌다.

루가르에겐 미안하지만, 너무 귀엽고 투명해서 계속 놀리고 싶다.

“저어, 근데요. 출신은 왜 물어보신 거예요? 다른 궁금한 게 있으셨나요?”

“아, 네. 백기사단과 흑기사단이 각각 하는 일이 무엇인지 궁금했어요.”

“아아…… 기사단 내부의 임무까지는 저도 잘 모르지만, 요즘은 거의 비슷한 일을 하는 것 같아요. 인원이 많이 줄어서요.”

“……그래요?”

“플로라 님께 시험에 대해 말만 들어도, 왜 인원이 줄어든 건지 알 것 같네요!”

루가르가 다시 뿔이 났는지 눈에 힘을 주었다. 그 모습에 플로라가 옅게 웃었다.

한참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날이 어둑해져 있었다.

루가르는 슬슬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별의 시간이었다.

플로라는 입단을 하면 본부 숙소로 가야 했으니, 이제 루가르와 하루 종일 붙어 있을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 시간을 맞추거나, 임무를 같이 할 일이 없다면 얼굴 보기가 힘들어지겠지. 루가르도 그게 아쉬운 모양인지 서서도 한참 머뭇거렸다.

“루가르 님도 들으셨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곳에 오기 전까지 쫓기는 신세였어요. 그래서 항상 혼자였고요.”

“…….”

“사람들과 평범하게 섞여 사는 게 꿈이었는데, 그동안 루가르 님과 같이 사는 것 같아서 좋았어요. 없던 언니가 생긴 것 같고, 전엔 몰랐던 즐거움들도 깨달을 수 있었어요.”

“…….”

“시녀로 위장하는 일이 싫으셨을 법한데도, 계속 제 곁에 남아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하네칸에 잘 적응할 수 있었어요.”

“플로라 님…….”

루가르가 아랫입술을 잘게 떨며 와락 플로라를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당황했지만, 플로라는 이내 웃으며 그녀의 등을 다독여주었다.

“저, 사실은 이 일 너무너무 싫다고 처음엔 투정도 많이 부렸는데요…… 그래도, 지금은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

“플로라 님이 나쁜 사람일 거란 생각 안 해요. 제가 겪은 플로라 님은 그래요. 그러니까 혼자 안고 있는 그 상처요. 조금 무뎌지고 나면 언젠가 제게도 꼭 말해주셔야 해요!”

플로라는 다독이던 손을 잠시 멈칫했다가, 결국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기사단으로 가시든, 제가 한가할 때마다 꼭 본부 주변에서 기웃거릴게요. 단장님께 걸리면 도망가야겠지만……!”

루가르는 결국 끝까지 루가르다웠다.

플로라는 울먹이며 외치는 그녀의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 * *

“두 사람, 많이 친해진 것 같아. 그치?”

시몬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생각에 잠겨 뒤따르던 에르네가 주군의 말에 살짝 고개를 들었다.

<예.>

“네가 보기엔 아직도 위험한 사람 같아?”

<……숨기는 것이 있으니까요. 폐하가 가까이하는 인물이니, 어떤 위험 요소도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에르네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해 말하곤, 방금 전 신전 복도에서 엿들었던 루가르와 플로라의 대화를 상기했다.

‘루가르 님께 누가 뭐라 하든, 신경 쓰실 것 없어요. 지금 루가르 님은 여명 기사단이자, 황제 폐하의 직속 근위대잖아요. 그러니까 좀 더 당당해지셔도 돼요.’

……조금은 괜찮은 사람일지도.

에르네의 보랏빛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았다.

“나는 그게 그 사람의 상처 같아서 함부로 들춰 보기가 힘들더라고.”

<…….>

“언젠간 먼저 말해주지 않을까? 네가 나에게 그랬듯이.”

에르네가 다시 자신의 주군을 보았다.

주군은 어느새 자신을 바라보며 걷고 있었다.

달빛이 내려앉은 얼굴은 무척 온화하고 따뜻해 보였다.

처음 그를 만났던 그 날처럼.

<그러다 넘어지십니다. 앞에 보세요.>

“아쉽다. 나도 플로라랑 잔뜩 얘기하고 싶었는데 말이야. 루가르한테 뺏겼으니, 네가 나랑 대신 말동무 해줘.”

<오늘도 밤새우셔야 합니다.>

“그런 거 말고. 재미없는 놈아.”

결국 에르네도 설핏 웃고 말았다.

언제나 그렇듯, 자신은 군주를 이길 수 없었다. 작은 고집조차도.

그가 유일하게 이길 수 없는 두 명이 신뢰하는 사람이니, 조금은 마음을 놓아보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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