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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점잖게, 성숙하게 잘 버텨 보려고 했는데.
여유 넘치고 어른스럽고 그런 근사한 모습만 보여 주려고 했었는데.
안 되겠다. 이건…… 도저히 못 이기겠다.
불가항력으로 그녀에게 끌려 당겨지는 사람처럼 클로드의 얼굴이 꺾여 내려왔다. 앞머리가 스쳤고 길게 늘어진 속눈썹 끝이 태리의 눈가를 간질였다. 그다음은 호흡이 어우러졌고 애절한 청혼이 속삭임을 타고 흘러들어 왔다.
“결혼해 줘. 당신이 영원히 내 것이게 해 줘. 누구와도 나누지 않도록 나와 결혼해 줘.”
뜨거운 체온이 담긴 손아귀가 태리의 턱과 뺨을 감싸며 들어 올렸다. 애가 타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녀가 고집을 피우며 그에게 보챌 때 그러했듯이 감정이 격해진 클로드도 마찬가지로 성마르게 졸랐다.
피부 위로 끼얹어지는 열망에 살갗이 화끈거렸다.
“결혼해 줘, 지금 당장.”
먼 길을 돌아 지나갔던 청혼이 다시 되돌아오고 있었다. 간직하는 것조차도 애달파서 그 자리에 모두 내려놓고 와야만 했던 헤어지던 날의 속삭임까지도 모두 바람을 따라 되돌아온다.
사랑하는 나의 클로드. 헤어지던 그날의 무수한 거짓말 속에서도 오직 그것만큼은 진심이었다. 사랑하는 나의 클로드.
입가에 어렸던 미소가 더 깊어졌다. 이마를 간질이는 클로드의 부드러운 앞머리를 쓸어 올려 준 태리가 발끝을 들어 올려 낙인이나 다름없는 입술을 꾹 찍으며 화답했다.
“응, 그럴게. 지금 당장.”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을 때 잠시였지만 스치듯 고였던 그의 눈물을 본 것 같았다. 누가 울보 아니랄까 봐. 이런 남자를 두고 가면 그는 매일 밤 어디에선가 울고 있을지도 몰랐다.
다시는 그를 울리고 싶지 않았다.
천 아래로 꿈틀거리듯 움직이는 클로드의 단단한 어깨 근육을 손끝으로 느끼며 태리는 조금씩 입을 벌려 안으로 침범하는 그를 받아들였다. 아랫입술을 핥던 혀가 쏟아져 들어오며 억눌러 왔던 욕망을 울컥 토해 냈다.
* * *
양초에서 촛농이 똑똑 떨어지며 점점이 이어져서 구불구불한 길을 이루었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찍힌 지점은 대서고로 들어가는 입구, 서리나무 문 앞에서였다.
“이제 다 끝난 겁니까.”
“탑 전체에 깔았으니까. 급한 대로 1차 결계 정도는 완성됐죠.”
그동안 태리는 몰래 성안을 들어오고 나가며 이 결정화 마법을 대서고가 있는 탑 전체에 야금야금 깔면서 준비해 왔었다. 단순한 촛농으로 보이지만 이 점들을 하나의 선으로 연결하면 탑 전체를 옭아매는 거대한 마법진이 된다.
그녀가 그것을 발동시키는 순간 촛농들은 결정화되며 그물망을 형성할 터였다. 거대한 몸집의 드래곤을 붙잡아 두는 데 물론 효과적인 매였다.
들어가기 직전 순간 이동 마법 스크롤을 꺼내 클로드와 하나씩 나누어 가진다. 정확한 이동 좌표가 찍혀 있는 것으로, 찢는 순간 시전자를 설정한 그 장소로 이동시켜 주는 스크롤이었다.
당연히 목적지는 도서관. 여기서 빌을 설득하지 못하거나 충분한 시간을 끌지 못했을 경우 그들도 즉각 도서관을 파괴하는 측에 합류하기 위함이었다.
“그럼, 갈까요.”
“잠깐만.”
문고리를 돌리기 직전 클로드가 태리의 손목을 붙잡았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더라도 최악의 수 같은 건 쓰지 마십시오.”
“어떤 거?”
“희생 같은 거. 분명히 말하는데 나는 망한 세상과 위기에 빠진 공주님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무조건 공주님입니다. 그러니까 봐서 정 안 되겠으면 내가 들쳐 업고 도망갈 테니까 그런 줄 알라고.”
태리가 소리 없이 웃으니 그는 이게 농담인 줄 아냐며, 본인은 진심으로 세상이 망하든 말든 아무 상관도 없다고, 그냥 망하라고 망나니처럼 거침없이 막말을 했다.
“그럼 한 번의 희생으로 역전의 각이 보일 때는?”
하아, 클로드가 또 무슨 고집을 부리냐며 한숨을 쉬었다.
“정 상황이 그렇게 굴러가는 것 같으면 그땐 내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뒤로 빠져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뭔가를 하면 내가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쓸데없는 소리. 알겠다고 대답 똑바로 안 하면 여기서 안 보내.”
“아, 알겠어요.”
“좋아.”
잡았던 손목을 놓아줄 때 하나씩 나누어 낀 반지가 달그락거리며 부딪혔다. 네 번째 손가락을 단단히 감싼 얇은 금속 테를 느끼며 태리는 심호흡 후 불타지 않는다는 서리나무 문을 열었다.
쥐 죽은 듯 잠잠한 고요 속에서 두 사람은 발소리를 죽여 대서고 안으로 들어간다.
납치된 미리엘을 찾으러 처음 출입했었던 그때와는 다르게 내부는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어질러진 책장도 모두 반듯하게 서 있고, 조각났던 바닥의 타일들도 새것으로 교체되었으며, 그 타일 사이의 작은 먼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깔끔해졌다.
그러나 태리는 겉보기에는 흠 하나 없이 정돈된 공간 속에서 어느 포악한 존재의 태동을 느꼈다. 마치 봉인에서 깨어나는 야수처럼 그늘진 응달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등 뒤로 칼을 숨기고 한 발, 한 발 다가가는 자객의 심정으로 그녀는 조금씩 걸어서 역삼각형의 눈동자 옆에, 낮잠이라도 든 것처럼 엎드려 있는 소년에게로 접근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꿈틀거리더니, 지척까지 다다랐을 즈음 빌이 기척을 알아차리고 먼저 고개를 들었다. 새빨간 용의 눈동자가 예고도 없이 똑바로 응시하는 것에 무심코 뒷걸음질을 칠 뻔했으나 단전에 꾹 힘을 실으며 자리를 지켰다.
“어서 와.”
빌은 그녀가 온 것을 거리낌 없이 반겼다. 일행이랍시고 클로드가 동행한 것에는 다소 언짢아하는 눈치였으나 그것이 태리에 대한 반가움을 삭일 정도는 되지 않는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 클로드는 한 줌도 안 되는 별 볼 일 없는 인간이었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없앨 수 있었다.
“……응, 이제 몸은 좀 어때?”
“전보다는 나아졌어. 회복이 더디긴 한데 이건 아마 내가 오랫동안 쉬질 않아서 그럴 거야. 그래도 괜찮아.”
“다행이네.”
“있지, 저번에 주고 간 마들렌 정말 맛있었어!”
“그것도 다행이고.”
“어디서 난 거야? 너희 호텔은 솜씨가 형편없다고 했는데.”
“우리 주방장이 만든 게 아니라 근처 유명한 빵집에서 사 간 거였거든.”
건조하다시피 할 정도로 짧게 웃곤 태리는 잠시 위를 바라보았다.
책의 보존을 위해 대서고에는 햇빛이 들어오는 흔한 창문조차도 없었다. 그래서 정확히 지금이 몇 시인지, 얼마나 지났는지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이때쯤이면 슬슬 부수는 작업을 시작했을 것이란 걸 대강은 짐작할 수 있었다.
위로 들렸던 시선이 다시 책상 앞의 소년에게로 내려왔다.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뭔데?”
“네가 기억하는 이곳 말이야, 그렇게나 아름다운 곳이었어?”
물음과 표정의 분위기가 서로 어긋나서였을까. 어렵지 않은 질문인 듯했으나 빌은 섣불리 무어라 답하지 못했다.
“그냥. 이렇게 아픈 걸 보니까 왜인지 궁금해서. 넌 몸이 상할 때까지 쉬지도 않고 내내 이 자리를 지켰잖아. 이 왕국에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 해서.”
“그 말은 너에겐 이자리스가 지킬 가치가 없는 곳이라는 뜻이야?”
“아니. 난 네가 어째서 이자리스를 떠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묻고 있는 거야. 내가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왔을 때 본 것들은 볼품없고 흉측한 것들이었거든. 오염된 숲과 마물들, 나를 흘겨보는 낯선 이방인들, 나라를 잃고 섬길 왕마저 잃어버린 자들의 폐허.”
“…….”
“쇠락해 가는 국가의 최후란 게 어떤 모습인지 그에 대한 모든 대답이 뭉쳐져 있는 곳이었어, 이자리스는. 그런데 넌 어째서 그것들을 모두 지켜보면서도 이곳을 떠나지 않았을까. 나라면 분명 도망가고 싶었을 텐데.”
“그럴 수 없었어.”
“왜? 넌 할 수 있었잖아. 너는……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존재잖아.”
그렇지 않니? 평온하게 떨어지는 어조였으나 그 속을 가든 채운 것은 확인 사살과도 같은 섬뜩한 칼날이라, 빌은 태리가 무표정으로 꽂아 넣는 비수에 뺨에 찬 물방울이 튄 사람처럼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존재. 너는 신이잖아.
그것은 곧 그가 빌이 아닌 바벨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암시와도 조금도 다르지 않은 말이었다. 우회적으로 가리켰으나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아둔하지도 않았으므로 빌은 얼마간 비 맞은 새처럼 몸을 떨었다.
한참 만에야 겨우 가라앉은 소년은 태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속마음을 꺼내 놓았다.
“나는 그런 존재로 살지 않아도 좋아, 라고 생각했으니까.”
“뭐……?”
세월을 초월하며 살아가는 태고의 존재, 우러러볼 수 없는 드높은 위치에 우뚝 서 있는 존재. 그러나 그때의 그는―
“전에는 무척 외로웠어.”
외로움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고독한 절대자였다.
“이곳이 아름다운지 아닌지는 몰라. 하지만 내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이거야. 여기 오고부터 나는 외롭지 않았어. 떠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야. 이곳에서 실리와 함께했던 시간과 추억만이 내게는 가치가 있어.”
진리의 바벨. 그 칭호를 언제 어떻게 얻었는지조차도 가물가물할 만큼 무궁한 시간을 일구어 온 그였다. 불러 주는 이가 없어서 그 이름이 온전히 제 것이라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던.
스스로 되짚기에 바벨이라는 이름에는 가치도 없었고 의미도 없었다. 겉포장만 남은 그저 낡고 오래된 삶에 불과할 뿐이었다.
하지만 빌. 이곳에서 새로이 얻은 그것은 달랐다. 거기에는 선명한 가치가 있었다. 실리가 아주 멀리서부터 자신을 향해 ‘빌 어디 있어?’라고 부르면 그는 그때마다 고개를 돌려 쳐다볼 곳이 있었다. 아, 나를 부르는구나, 누군가가 나를 찾는구나, 하고 심장이 뛰며 반응했다.
“넌 왜 하필 이곳에 남았느냐고 물었지만 난 이곳에 있어야만 살 수 있었어. 내가 여기 남아서 달래고 있는 것은 그리움이었으니까. 실리가 그리워……. 그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 하지만 그러면 뭘 해. 그는 없는걸. 그러니 이제 내게는 그와의 기억만이 남아 있어. 그 기억으로 소중했던 시간과 사람을 떠올리지. 기억은 마법과도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