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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빛으로 붉게 물든 눈을 비비며 태리는 그동안 하고 싶었던 얘기들을 와르르 쏟아 냈다. 이 말을 하려고. 이 말을 하고 싶어서 홀로 긴긴 세월을 버텨 내 온 사람처럼 헐떡이며 떨어져 나온 말마다 애끓는 숨결이 어렸다.
“사실은 너무 좋았어. 나한테 결혼하자고 얘기해 줬을 때 너무 기뻤는데…… 기쁘다고 말하지 못했어. 그 전에도, 그보다 훨씬 전에도 나, 날 좋아한다고 얘기해 줬을 때도 한 번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어……. 사실은 그때 나도 그렇다고 말해 주고 싶었는데, 그런데…….”
“왜 자꾸 그런 소릴 해.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내가 없어질지도 몰라. 그런 미래가 있었어. 이자리스를 구하고 나면…… 나는 여기서 영영 사라져 버릴 같아서, 그래서 한 번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어.”
대답하지 않은 건 그 역시 교만으로부터 비롯된 행동이었다. 숨길 수 있다고 자신했었다. 아무리 가슴 아파도 끝까지 못되게 굴 수 있을 거라고. 그런 뒤 원래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모든 짐을 떠안고 홀로 사라질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이제 난 그마저도 못할 정도로 비겁해졌나 봐.”
비겁하게도 사라지지 않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어 버렸다.
그건 생존을 온전히 장담할 수 있는 확신도 아니었다. 그저 운이 따라 준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가능성 정도.
그런데도, 겨우 그 작은 희망에도 마음이 돌변할 정도로 비겁해져서, 이 남자를 잃지 않아도 된다는 일말의 가능성에 목매고 매달리는 것이다.
고작 젊은 날에 있었던 한 철의 추억을 잊지 못해 추운 땅에 오렌지 나무를 심고, 이미 죽어 버린 친구를 놓지 못해 영웅의 손에 처단될 날만을 기다리는 그 어리석고 이기적인 미련들을 태리는 이제 그만 이해할 것도 같았다.
나는 다를 줄 알았지.
그녀는 늘 자기 자신에 대해 오만했었다. 언제나 혼자였으니 다시 혼자로 되돌아가라는 삶을 수긍하는 건 제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거라고 자만했다. 이미 정해진 운명이 그렇다는데 그 앞에서 떼쓰고 싶지도 않았다.
외로움. 이곳에서 그런 걸 배워 간다 한들 늘 무심하고 고독했던 사람에게는 괜찮을 거라고 얼마나 끈질기게 곱씹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난 이제 못 해……. 나는…… 나는 당신이 필요해. 혼자가 되기엔 너무 많이 사랑받아 버렸어.”
이제는 그렇게 못 한다. 혼자인 게 당연한 거라고, 너의 운명은 늘 그랬노라고, 놓쳐 버린 이들이 아쉬워도 그냥 놓친 대로 보내 주면 되는 거라고 더는 그렇게 순순히 고개 숙이지 못하겠다. 이 사람이 퍼붓는 그 많은 사랑을 남겨 두고 더는 그딴 방식으로 이루어진 외로운 삶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이 남자가 필요했다. 그와 대화를 나누고 눈을 마주치며 함께하는 시간들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울먹이며 두서없이 말을 쏟아 내던 태리는 이제 어리광을 부리듯이 그를 놓지 못하겠다고 반복해서 이야기했다. 싫어, 나는 못 해. 나는, 나는 너무 힘들고 외로워. 이러다가 쓰러질 것 같아. 매일매일 힘든데 내가 왜 혼자 있어야 해? 내가 왜 당신 없이 혼자 살아가야 해?
언제나 어른스러웠던 건 그녀이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건 제 쪽이라고 여겼었는데.
눈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엉엉 우는 여자가 잠시라도 외로움을 느끼게 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클로드는 그녀를 두 팔로 꽁꽁 감싸서 제 품 안에 소중하게 넣었다.
절대로 너는 혼자도 아니고 앞으로도 영원히 홀로 남게 되는 일 따위 없을 거라고 밀착된 체온으로 각인시켰다.
“절대로 혼자가 아니야. 그렇게 사라지도록 놔두지도 않을 거고, 어디론가 간다면 내가 끝까지 따라갈게. 그러니까 날 떠나지 않겠다고 말해.”
“아, 안 떠나.”
“그리고 하고 싶었던 말도 다 해 봐. 나한테 그동안 안 하고 숨겼던 얘기들, 전부 다 해.”
그의 가슴팍에 뺨을 비비며 눈물을 닦는 듯했던 태리는 그 말에 곧장 얼굴을 들어 올렸다. 작은 입술로 몇 번이나 뻐끔하는 게 귀여워서 쳐다봤더니 금세 터진 봉오리처럼 급하게 말을 쏟아 냈다.
“좋아해. 너무너무.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도 하고 싶었어. 처음 봤을 때부터 나한테 잘해 준 거, 그것도 너무 고마웠어. 얼마나 안심이 됐는지 몰라. 나 그때 사실 너무 무서웠어. 아는 사람도 하나도 없고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매일 나 보러 와 줬잖아.”
“그건 보러 간 게 아니라 감시한 거였잖아. 그게 뭐가 잘해 준 거야.”
“아니야, 잘해 줬어. 얼마나 잘해 줬는데. 그리고 내가 어딜 가든 늘 함께 다녀줬지. 그때 붕방붕방 따라다니는 강아지 같았는데 그렇다고도 말 못 했어.”
“하아, 강아지라고 표현하지 마. 차라리 개 같다고 해.”
“그런데 그런 개라도 난 엄청 좋았어.”
본인이 해 보라고 하긴 했지만 막상 이렇게 한꺼번에 듣고 싶었던 얘기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온 것에 클로드는 전혀 면역이 없다. 이렇게 행복해서 좋아 죽다가 머리가 펑 터지려고 그러는 건지 피가 얼굴로 다 몰렸다.
그동안 숨겨 두었던 얘기들을 마구마구 떠들 때마다 듣는 족족 타오르기 시작하는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태리는 이번만큼은 울먹이지 않고 토씨 하나하나까지 꼭꼭 눌러 가며 야무지게 발음했다.
“있잖아. 만약에.”
“응?”
“만약에…… 모든 일이 다 끝나고 내가 여전히 곁에 있게 되면 나한테 한 번만 더 청혼해 줄 수 있어? 그러니까 전에 나한테 줬었던 그 반지. 호, 혹시 버리거나 마음이 달라졌거나 그런 거 아니면 딱 한 번만 더 청혼해 주면 안 돼……?”
부탁이야, 정말 딱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이면 돼. 나 다시는 거절하지 않을 테니까.
자신이 없어서인지 매달리고 조르면서도 태리는 클로드의 옷깃을 두 손으로 꽉 움켜쥔 채 붙들었다. 그에게서 긍정적인 답변이 나오길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다렸다. 입술이 마르고 혀가 바짝바짝 탔다.
하지만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클로드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없다.
싫은가, 아니면 혹시 실망해서 그때 버려 버렸나, 하고 낙담해서 고개를 푹 숙이자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당황스럽고 어벙한 낌새의 말투가 흘러나왔다.
“그게, 안 그래도 내가 노력 중에 있었는데……”
노력 중? 그게 무슨 소리야? 태리가 주먹으로 젖은 눈을 비비며 빼꼼히 올려다보자 궁지에 몰린 듯한 클로드의 행동과 목소리가 점점 더 크게 부산스러워졌다.
“아니, 나도 눈치라는 게 있으니까 아무리 뭘 몰라도 지금은 당신한테 그런 얘기로 부담을 줄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단 말이야. 그래서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었던 건데.”
전에는 그런 걸 구분할 줄 몰라서 대차게 까이고 말았지. 그따위 어설픈 실수는 한 번이면 족했다. 그는 신도 아니어서 한 번 망쳐 버린 것을 없던 일로 만들 능력이 없었으니 매 순간마다 각별히 신중해야 했다. 소중한 만큼 더더욱.
그래서 참고 또 참고, 조심하고 또 조심해 가며 지금은 그녀에게 결혼해도 좋을 만한 남자처럼 느껴지기 위해 나름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전처럼 무작정 반지부터 갖다 바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나와 결혼할 마음이 들까? 고민해 가면서.
“하지만 호텔에 와서도 나한테 아무것도 안 했잖아. 맛있는 것만 만들어서 잔뜩 먹였잖아.”
“그건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그랬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단 말이야. 전이랑 똑같이 얘기하면 또 날 피할 거고, 그렇다고 장난처럼 다가가면 제대로 안 받아 줄 것 같은데 그럼 어떡하라고.”
호텔에서 그녀의 곁을 맴도는 내내 클로드는 그런 고뇌에 휩싸여 있었다. 좋아해와 사랑해 보다 더 우월한 표현 같은 걸 발명할 수는 없을까 하는 불가능한 난제를 붙잡고 연신 끙끙거렸다.
태리가 아랫입술을 삐죽거리며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오두막에선 막 같이 살자고 했으면서.”
“그때는 내가 잘못해서 실수로 튀어나온 거야. 원래는 그거보다 훨씬 더 괜찮은 말들이 잔뜩 있었어.”
“그래서 반지는 언제쯤 다시 줄 건데?”
“완벽한 상황이 다 갖춰지면.”
“그런 상황이 언제야.”
“용을 무찌른 기사는 보통은 공주랑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자격이 생겨. 책에서도 많이 나와. 전설도 있고 신화도 있어. 그러니까 내가 꼭 그 상황부터 만들어 놓을게.”
한마디로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어서 꽃가마를 들고 금의환향할 계획이었단 소리였다. 그 정도면 그녀에게 청혼해도 될 만한 남자로는 취급받을 수 있겠지 싶어서.
서두르다가 이별을 통보받았던 남자는 그렇게 두 번째 도전에만은 신중을 기하고 싶어 했다. 분위기를 파악해 가며, 어울리지도 않는 점잔을 빼 가며 한 치의 오차도 내지 않겠다는 각오로.
하지만 그런 여유 같은 건 부릴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것처럼 태리가 그의 계획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용을 무찌르지 못하면?”
“……그건.”
“그러다가 내가 어떻게 되거나 당신이 어떻게 되거나 하면?”
“내가 어떻게 되는 게 낫지.”
“그럼 나랑 결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은 거네?”
“그럴 리가 없잖아!”
하고 싶지 않냐니. 하고 싶다. 하고 싶어서 죽겠다! 하고 싶으니까 이렇게 미친놈처럼 날뛰는 거 아닌가.
고집부리듯이 따져 들던 그녀가 옷깃에 바짝 붙어서 매달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매달린 상태로 애써 힘들게 유지하고 있었던 클로드의 여유를 통통 부숴 가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단숨에, 그리고 단호하게 내뱉었다.
“그럼 지금 해.”
“어……?”
“나도 같이 살고 싶어.”
“……어어?”
“같이 살고 싶다고.”
다른 의미로 헷갈릴 수조차도 없는 단도직입적인 고백이었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나랑, 나랑 살고 싶다고……. 클로드는 정신이 홀라당 증발해 버린 것처럼 그 말을 듣고 얼이 나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