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4화 (174/186)

174

포말을 일으키며 잔잔하게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처럼 태리는 소년의 이유를 듣고 너의 마음을 모두 이해했다는 듯이 고요히 끄덕였다. 

그럴 거라 예상했고 확인하러 온 것이었으니까. 소중한 대상을 잃어버린 현실을 견디지 못해 이 외로운 신은 추억이라는 과거 속에 자기 자신을 가뒀다.

그것이 잘못된 선택인 줄 알면서도 허망한 빈자리를 채우고 그리움을 달래 가며 하루하루를 이어 나가는 것이다.

잠시라도 허우적거림을 멈춘 순간 바닷속으로 가라앉게 되는 망망대해 위의 처량한 인간처럼. 그런 발버둥이 보는 사람을 울적하고 착잡하게 만들었다.

이런 너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알아차려 줬어야 했는데. 누군가는 더 서둘러서 이 안타까운 존재를 자유롭게 해 줬어야 했는데.

태리는 안타까움이 담긴 손으로 빌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짚어 보았다. 그것에 응답해 그녀를 바라보는 세로로 길고 또렷한 붉은 안광에는 역시나 애정이 빛나고 있었다. 그녀를 통해 그녀와 비슷하게 닮아 있던 자신의 옛 친구를 추억하듯이.

그에게 과거보다 더 집착해야 할 다른 무언가는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태리는 두어 번 마른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가 알 법한 과거의 것을 꺼냈다.

“저번에 이곳에 왔을 때 우연히 아버지의 일기장을 얻었어.”

“일기장? 아! 그 백과사전같이 두꺼운 거 말이야?”

“아는구나.”

“당연하지. 실리가 이 자리에 앉아서 매일매일 일기를 얼마나 열심히 썼는데. 그럼 난 옆에서 턱을 괴고 다 쓸 때까지 항상 기다렸어.”

사소한 옛이야기에도 즐거워하는 소년 앞에서 태리는 또 한참을 머뭇대다가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었다가 빼며 반으로 접혀 있는 쪽지를 꺼냈다. 건네줄 때는 일기장 속에서 발견한 거야, 라는 나지막한 말을 덧붙였다.

익숙한 필체에 빌의 눈가가 단숨에 그리움으로 얼룩지는 것을 지켜보며 그녀가 천천히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이야기했다.

“나한테 저주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했었잖아. 혹시 그 일에 도움이 되는 게 있을까 해서 아버지의 일기장을 여러 번이나 꼼꼼히 살펴 읽었어. 그러다가 그걸 찾았지. 처음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어. 아버지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이것을 남겼을지 전혀 종잡을 수 없었거든.”

쪽지에 담긴 문장은 길지 않았다. 읽는 데에 긴 시간이 걸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빌은 좀체 그것으로부터 고개를 들지 못했다. 태리가 기묘한 목소리로 ‘그래서 말인데 내가 찾아온 방법 좀 들어 볼래?’ 하고 물었을 때조차도 미동이 없었다.

“망각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

성서의 구절을 따라 읊었기 때문일까. 신은 그녀가 아닌 빌임에도 그 순간에는 마치 그녀가 신처럼 고고하게 느껴졌다. 찬 바람을 두른 듯한 목소리도, 핏기가 없는 것처럼 창백해서 초연하게 느껴지는 흰 피부도.

“쪽지에는 그렇게 쓰여 있지. 그게 내가 찾은 방법이야. 난 그걸 해석해 왔어.”

“…….”

“풀이 과정은 좀 틀렸을지도 몰라.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 위해 남긴 게 맞는지도 여전히 알 수 없지. 하지만 이 뜻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자라면, 그자는 이것만으로도 쉽게 정답까지 도달할 거야. 네가 말한 대로지. 기억은 마법과도 같아.”

수만 가지의 감정이 요동치는 듯한 빌의 얼굴에서 그 순간 생기가 싹 걷혔다. 이윽고 드러나는 것은 두려움이었다. 소년은 두려움으로 벌벌 떨었다.

그가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 단두대의 칼날처럼 뚝 떨어졌다.

“넌 알고 있었지.”

“아, 아니야!”

“넌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어. 어떻게 해야 저주를 되돌릴 수 있는지. 그 방법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었어.”

그만 포기해. 너만 포기하면 돼. 너만 잊으면 돼. 그것은 악몽 속에서 수없이 그를 다그치던 실리의 목소리와도 같았다.

넌 이미 방법을 알잖아.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잖아?

“아니야, 아니야!”

소년은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도리질 쳤다.

하지만 태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가 쥐고 있는 기억들은 모조리 사라져야만 했다. 이 가엾은 신을 떠나보내기 위해서. 이 땅에서 저주를 걷어 내기 위해선 그의 망각이 반드시 필요했다.

“정답이 다시 떠올랐다면 이제 그만 하던 일을 마무리해. 넌 처음부터 해주법을 알고 있었어. 하다가 그만뒀을 뿐이지.”

“아, 아니야, 나는……!”

“제발 이번에는 다른 선택을 해 줘.”

네가 잊어 줘. 네가 포기해 줘.

태리는 신 앞에 두 무릎을 꿇었다. 현실을 부정하려는 그에게 빌고 설득하고 간청했다.

“한 번의 실수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우린 모두 내 가족과 내 나라를 잃었고, 겨우 죽을힘을 다해 버티고 있을 뿐이야. 이제는 그것과 다른 선택을 해야 돼. 여기서 끝내야 돼.”

하지만 빌에게 그 말은 차갑고 외로웠던 바벨로 되돌아가라는 말이나 다름없이 들렸다.

흔들리는 눈앞으로 친구와 닮은 얼굴이 물기에 얼룩져 일그러졌다. 영영 만날 수 없게 되어 버린 그가 이 눈물 속에 겨우 살고 있는데 공주는 이것을 잊으라고 하고 있었다.

“난 그렇게 못 해. 그 기억만은 절대 내 손으로 못 버려. 차라리 날 죽이도록 해……. 날 죽여서…… 내 시체와 함께 그 기억을 묻어. 그리고 영웅이 되도록 해.”

신을 꺾은 용사로. 드래곤을 물리친 위대한 영웅으로.

아.

결국 이렇게 되어 버리고 마는 결말 앞에 태리는 허물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고 정해진 그 길을 걷어찼다.

“아니, 나는 절대로 너를 죽이지 않을 거야.”

선전 포고와 함께 그녀가 두 다리를 움직이려는 순간, 책상 위의 역삼각형의 눈동자가 갑자기 번쩍 눈꺼풀을 뜨며 부르르 요동치기 시작했다. 동공이며 흰자위며 모조리 붉게 충혈되어 당장이라도 터져 나갈 것처럼 팽창하는 게 느껴졌다.

도서관이 공격받고 있었다. 붕괴가 시작되려는 것이다.

뒤늦게야 그녀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빌의 목구멍에서 핏덩이가 맺힌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네가 감추고 있던 비밀을 찾아낸 거지. 네 손으로 지우지 못하면 내가 해 줄게. 내가 전부 지워 줄 테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고 울고 고함치고 날 평생 원망하면서…… 그만 떠나.”

“안 돼! 부탁이야. 나한테서 그 기억을 뺏어 가지 마. 난 너무 외로웠어! 난 내 친구를 잊고 싶지 않아!”

통곡하는 소년이 그녀를 붙잡고 매달렸지만 태리는 한번 내린 결정을 되돌리지 않았다.

“미안해. 나는 널 죽이지 않을 거야, 절대로. 하지만 네 기억만은 반드시 살해하고 말 거야.”

그리고 단호한 그 말에 빌의 얼굴이 돌변했다. 당치 않은 광경을 목격한 절대자처럼 삽시간에 전신이 절대 영도로 얼어붙어 경직되더니 강렬한 한기를 사방으로 분출한다.

등줄기가 섬뜩해져 태리는 황급히 물러섰지만 이미 짐승의 적안이 머릿속을 꿰뚫었다.

그리고 그것이 불붙인 양초의 불꽃처럼 순식간에 길쭉해져 황홀하게 타오르더니, 검은 비늘로 이루어진 웅장한 형체가 순식간에 일어서며 진노한 목소리로 덮쳐들었다.

“감히 전지전능한 내 친구의 잠자리를 침범했다!”

최종 보스를 앞두고 전투가 시작될 때 울리는 바로 ‘그 대사’였다.

‘폴리모프가 풀렸다.’

더 이상 소년의 모습은 없었다. 한눈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온 사방을 휩쓸 듯이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용이 기다린다.

태리가 기억하고 있던, 게임에서 수도 없이 보아 온 바로 그 몬스터의 자태였다. 드디어, 빌이 아닌 바벨을 만나게 되었다.

뇌가 흔들릴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포효를 견뎌 내며 태리는 자신이 찾아온 이 열쇠가 저주를 푸는 해답이 맞았음을 직감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면 된다. 사람들이 도서관을 무사히 부술 때까지 이 드래곤을 어떻게든 이곳에 붙잡아 둘 것이다.

그오오!

드래곤이 분노로 목울대를 떨자, 주변 공기가 경련하는 것처럼 흔들리더니 무수한 책들이 투두둑 아래로 떨어졌다.

태리는 재빨리 양손을 펼쳐 들어오기 전에 준비를 해 두었던 결계를 발동시키기 위해 수인을 맺었다. 하지만 어깨부터 손끝까지 미세하게 떨림이 전달되면서 캐스팅에 연속해서 실패하고 만다.

‘정신적으로 압박을 당하고 있어.’

드래곤이라는 무시무시한 존재 때문이었다.

자신보다 막강한 존재가 내뿜는 지배력에 무의식중에 짓눌려서 힘이 의지를 따라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억지로 마나를 회전시키자 머리에 깨질 듯한 두통이 몰아닥쳤다.

그 사이에 빌은 삐쭉하게 돌기가 나 있는 긴 척추와 꼬리를 두 사람을 향해 견제하듯 위협적으로 내리치며 대서고의 벽을 타고 오르려 했다. 탈출구로 노리는 것은 탑의 천장인지, 당장에 저 막힌 구멍을 뚫고 솟아올라 도서관으로 날아가려는 것 같았다.

“으읏!”

몸부림치듯 날뛰어 대는 드래곤의 기세에 못 이겨서 수많은 파편 덩어리가 낙하한다. 하중을 떠받치고 있던 대들보 하나가 우지끈하고 절반 정도 깨지면서 여러 개의 나뭇조각이 되어 흩어져 내렸다.

제 머리 위로 떨어지는 크고 작은 나뭇조각들을 알면서도 태리는 그것들을 쳐 내거나 움직여서 피하는 대신, 드래곤의 지배력을 떨치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서서히 조금씩 집중도가 오르면서 코어 안의 마나가 혈류처럼 흐르자 그녀가 주문을 완성시켜 방출했다.

수일을 걸쳐 짜 놓은 마법진이 막 구동하려는 엔진처럼 웅웅 바람 소리를 내며 탑 전체를 휘감고 돈다. 두꺼운 목을 흔들던 드래곤의 등허리 위로 촛농으로 이루어진 끈적끈적한 액체가 흐르더니 순식간에 결정화되어 굳으면서 그의 움직임을 일정 부분 고정시켰다.

움직임이 제한되자 드래곤은 더 격렬하게 몸을 뒤튼다. 그물에 걸린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발버둥 치던 꼬리에 후려 맞아 반쯤 남아 있던 대들보가 나머지 반쪽마저 결국 무너져 내렸다.

바로 아래에 있던 태리는 피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대신 저것을 맞고 머리통이 깨지면 곧장 힐링 포션을 주입시키기 위해 품 안에서 주사기를 뽑아낸다.

머리 위로 대들보가 낙하하는 것과 동시에 주사기를 밀어 넣기 위해 그녀가 위를 향해 똑바로 고개를 치켜든 순간이었다. 측면에서부터 날아온 클로드가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서 아슬아슬하게 충돌을 피해 냈다.

튕겨져 날아오는 자잘한 파편들을 등으로 막고 큼지막한 책장을 그쪽으로 밀어 넘어뜨려 임시방편으로 바리케이드를 치며, 신발 밑창으로 바닥을 주르륵 미끄러져 가며 멈춰 섰다.

땀으로 젖어 버린 흑발이 가라앉았다가 훅 몰아치는 바람에 얕게 들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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