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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리가 간지러운 손끝으로 지저분해진 앞머리를 깨끗이 정돈해 줄 때마다 심장이 펄떡펄떡 뛴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녀는 눈앞에서 계속해서 조르는 듯한 말투로 설득을 이어 갔다.
클로드는 그 꾐에 넘어가지 않으려 냉철하게 정신을 집중한 뒤, 그녀의 손을 잡아 치우곤 딱 자르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이번 한 번만 들어주는 겁니다.”
그러곤 부끄러워서 도망가는 소년처럼 후다닥 일어나선 닫혀 있던 밀실의 문을 열어 미리엘을 크게 불렀다.
“무슨 일이야, 동생동생?”
“두 번씩 부르면 말 안 할 거야.”
“넌 너무 쌀쌀맞아, 클로드. 매번 그러면 형도 상처받는다고.”
“시끄러워. 지금 당장 밖으로 몰래 빠져나가야 돼. 궁 바깥으로.”
서운한 것처럼 풀이 죽어 있던 미리엘은 듣자마자 눈이 띠용하고 커지는 것처럼 표정이 돌변했다.
그러더니 뺨이 붉어진 클로드와 호기심이 가득 찬 태리의 눈동자를 번갈아 보곤 잠시 후에 굉장히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사랑의 도피인가? 그런 거면 더 빨리 뛰어오라고 미리 말해 줬어야지!”
“아니다, 멍청아.”
“그런 거 아닌데.”
성급한 결론에 두 사람이 즉시 부정을 했지만 미리엘의 실눈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깊고 얇아졌다. 콧김을 뿜뿜 내뿜으며 그가 당장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 * *
“권력을 가진 종교란 없다!”
“황실은 당장 교단과의 유착 관계를 끊고 스스로 우뚝 서 군림하라! 종교는 국가를 대신할 수 없다!”
“교단은 내정에 관한 간섭을 멈추고 물러서라! 물러서라!”
와…….
허름한 복색으로 갈아입은 뒤 비밀 통로를 기어서 맞닥뜨리게 된 수도의 광장은 말 그대로 항쟁의 현장이었다. 갖가지 사회 운동이 판을 치고 정치적인 선전들이 난무한다. 신자유주의나 반계급주의에 대한 견해들로 가득 찼달까.
태리는 클로드와 함께 성난 시위대의 물결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알아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안전한 태리와 달리 클로드는 전국구 규모의 유명 인사라 ‘종교와의 투쟁이 아니라면 죽음을!’이라는 시위대의 극단적인 문구를 빨간 물감으로 얼굴에 도배해 위장했다.
그러고도 불안해서 한쪽 소매로 코와 입을 가리고, 다른 쪽 손은 태리의 팔을 잡은 채 숨 막히는 현장 속을 헤치고 다녔다.
“빨리 이 중에서 공화파 사람이 있는지 찾아봐 줘요. 듀폰 경 본인이라면 더 좋고요.”
“안 그래도 그러고 있는 중입니다.”
“어? 저기 머리핀 팔 것같이 생긴 가게!”
“지금은 그런 곳 들어가면 안 돼!”
“그래도 약속했으니까 난 사 주고 싶은데.”
“사 주는 건 내가 해. 내가 다 사 준다고!”
대체 자기를 얼마나 더 비참하게 만들 거냐고 하는데 태리는 이해를 못 했다.
클로드가 눈으로 목표물을 찾는 동안 태리도 놀지 않고 열심히 일을 했다. 시위대의 의심을 사지 않도록 바닥에 떨어져 있던 피켓을 주워서 구호에 맞춰 흔들었고, 얼떨결에 넘겨받은 포스터를 호외 뿌리듯 쉬지 않고 흩뿌리고 다녔다.
“교단과 황실은 각성하라!”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
황제와 교단에 대한 비판으로 사방에서 빗발치는 고함 소리에 클로드는 즐거워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싱글벙글거렸다.
“제국의 시민들이 이렇게나 깨어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냥 고모가 욕을 먹어서 기쁜 게 아니라요?”
“잘못을 했으면 욕을 먹어야죠.”
그러면서 시위대의 함성에 간간이 소리를 보태기도 한다. 황제가 제일 문제라는 둥, 아 황제만 똑바로 살면 다 잘 살게 될 거라는 둥, 역시 황제가 악의 근원이라는 둥.
정말 즐거운가 보네. 태리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지금 이것이 얼마나 웃긴 상황인지를 되돌아보게 됐다.
본인은 성검을 물려받은 신성 기사단장이지, 형은 교단의 우두머리가 되는 성하이고, 아버지도 신관 출신일 것이다. 가족 전체가 황실의 가장 가까운 방계 혈족. 그런데 그런 남자의 입에서 쏟아지는 말은 교단과 황실에게 반성과 성찰을 요구하는 비판뿐이다.
본인이야 추호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웃음이 터지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다. 손을 잡혀 걸어가며 소리 내어 키득거리자, 영문을 모르는 눈길이 이유를 물어 왔다.
입고 왔던 화려한 옷 따위 미련 없이 벗고, 허름한 평복에 낙서가 잔뜩 된 순수한 얼굴로.
자신 때문에 저런 꼴로 만들어 놓아서 그게 너무 미안하고 고마우면서도 어쩐지 들뜨는 듯한 감정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와는 연애에 가까운 그 무엇도 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꼭 그런 걸 해야만 관계가 달라지는 건 아닌지도 모른다.
이런 사이가 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 함께 보내는 시간이 쌓여 갈수록 눈앞의 남자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를 하루하루 알게 되어 간다.
그는 이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사람이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면 헤어지게 될 운명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제는 그런 걸 잊어버리고 싶을 만큼 그가 좋았다.
때가 되어 제 곁에서 사라진다면 그때의 아득함을 견딜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질 정도로.
갑자기 한 무더기의 군중들이 옆을 지나쳐 가며 주변이 시끄러운 소음으로 확 뒤덮였다. 방금 전까지는 가까이에 있으면 서로의 말 정도는 들을 수 있었는데 순간적으로 그마저도 묻힌다.
그래서 그가 자신을 보며 ‘왜?’라고 묻는 듯한 입 모양밖에는 읽히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태리는 숨기지 않고 또렷하게 발음할 수 있었다.
“그냥, 좋아서. 너무 좋은가 봐.”
꽃처럼 활짝 핀 미소가 덧대어졌다.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지만 클로드는 순식간에 둘만 있는 공간으로 밀려난 것처럼 귀가 멍해졌다.
가슴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미소를 받았을 때는 숨이 격하게 가빠졌다.
나한테 저렇게 환하게 웃어 준 적이…… 있었던가? 이제껏 그녀에게서 수많은 미소를 받았지만 이번 것은 어딘가가 달랐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감정이 담겨 있다.
태리가 흘린 말소리를 하나도 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래도 괜찮은 기분이다. 평소라면 놓친 말소리에 안달했을 테지만 그것까지 들었다면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했을 것 같았다.
지금도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뻐서 죽을 것 같았으니까.
사 준다는 것들은 전부 됐고 싫다더니, 원하는 게 이런 거였다면 몇 번이고 몸 담그지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눈물이 날 정도로 좋아 죽겠는데 이런 게 대체 뭐가 대수라고.
클로드는 의욕이 활활 불타올랐다.
‘투쟁이 아니라면 죽음을!’이라고 도배된 얼굴 낙서에 아주 잘 어울리는 눈빛이었다.
“가죠.”
어디든 네가 원하는 곳이라면 내가 끝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팔을 잡고 있던 손이 느릿하게 손목을 매만지고 내려와 천천히 다섯 손가락 사이로 깍지 껴 들어갔다.
깊숙한 부분까지 엉켜 들어오는 힘을 태리는 함께 꽉 마주 잡았다.
* * *
질서 없이 뒤섞인 시위대의 안쪽까지 들어가 둘은 그 뒤로도 한참을 더 헤매고 다녔다.
서서히 클로드의 시야에 익숙한 얼굴의 귀족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는 태리에게 바쁘게 그들의 대해 설명해 나가며 중심부로 파고들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 사이에서 공화파의 당수인 듀폰 경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저 사람입니다.”
등 뒤로 깃발을 꽂고 탄압에 맞서는 사도처럼 쉴 새 없이 무언가를 외치고 있는 남자였다. 사전에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하더라도 우두머리라고 지목할 만한 모습이었다.
혈기왕성하고 패기 넘쳐 보인다.
찰나에 클로드와 눈빛을 주고받은 태리는 지체 없이 그쪽으로 이동했다. 어깨가 부딪치며 이리저리 밀려 뚫고 나가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거의 근접했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돌연 꺄아악, 하는 비명이 광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이런, 치안대가 떴다! 다들 도망쳐!”
갑자기 사람들이 혼비백산하며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외곽 쪽을 바라보니 저편에서부터 성인 남성의 키를 웃도는 거대한 방패 벽이 빠른 속도로 군중들을 향해 밀려오고 있었다.
즉시 소동을 멈추고 해체하라는 흉흉한 경고성 협박이 광장을 쩌렁쩌렁하게 뒤흔든다.
꼬리에 불붙은 생쥐처럼 후다닥 달아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태리는 한 시민을 붙잡고 캐물었다.
“갑자기 다들 왜 이러는 거죠?”
“왜 이러긴! 치안대에서 진압 부대를 출동시켰잖소! 잡혀서 철장 신세를 지고 싶지 않거든 서둘러 도망치시오!”
“하지만 저는 듀폰이라는 사람을……”
“어서!”
카랑카랑한 외침과 함께 방패벽 너머에서부터 거대한 물대포가 사람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물벼락을 맞은 사람들은 더더욱 새된 비명을 내지르며 각자 살길을 찾아 흩어져 나갔다.
젖은 머리를 털어 내며 클로드가 숨 가쁘게 이야기했다.
“공주님, 듀폰 경이 보이지 않습니다. 광장을 벗어나 극장가 쪽으로 달아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가 치안대의 목표물인 듯하군요.”
“쫓기는 거라면 따라가야 돼요. 구할 수 있으면 우리가 구해야 되고요.”
여기서 그가 치안대에 붙잡히면 세웠던 계획이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만다. 운 좋게 또 다른 기회가 생긴다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인파와 겹쳐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따라잡기에도, 구해 주기에도 점점 더 거리가 벌어져 간다.
치안대의 단속을 피해 한 건물 벽에 몸을 숨기듯 붙어 선 태리는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떡한담. 방해 없이 신속하게 뒤를 쫓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열심히 머리를 쥐어짜 내고 눈동자를 굴린다. 그러다가 문득 기대어 있는 건물의 외벽에서 1층부터 옥상까지 쇠파이프로 세로로 길게 연결되어 있는 수도관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걸 타고 올라가면……?
건물의 옥상에서 옥상으로 뛰어넘어서 이동할 수 있다면 혼잡한 땅에서 달리는 것보다 훨씬 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머릿속의 결론보다 손이 먼저 파이프의 한 곳을 움켜잡았을 때였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그보다 더 큰 손이 그녀가 잡은 위치보다 한 뼘 더 위쪽에서 쇠관을 감싸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