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186)


 

100

건물 꼭대기에 도달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클로드의 어깨에 매달려 단숨에 도시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정상까지 올라온 태리는 그가 먼저 달려 나간 길을 그대로 따라가며 건물과 건물 사이를 겁 없이 점프하며 질주했다.

디딜 공간이 좁은 난관에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어지럽게 설치되어 있는 빨랫줄 사이사이를 유연하게 피해 나가며 마음대로 공중을 누볐다.

평평하지 않은 지붕을 만나면 경사면을 엉덩이로 쭈욱 타고 내려와 곧장 디딤대를 박차고 허공으로 도약했고, 주저 없이 팔을 뻗어 그다음 건물의 가장자리에 매달렸다. 그러면 먼저 건너간 클로드가 가뿐하게 그녀를 위로 끌어 올려 주었다.

살짝만 헛디뎌도 추락사할 수 있음에도 둘은 멈추는 법 없이 도시의 지붕들을 거침없이 밟으며 앞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팔다리의 힘이 월등한 클로드는 웬만한 너비나 높이 정도는 전부 다 우습게 넘거나 타고 올라갈 수 있었다.

그의 속도에 뒤처지지 않도록 태리는 소매의 박음질을 팔꿈치까지 뜯어서 손목에 착용한 로프 런처를 쏘아 기동력을 높임으로써 보폭을 완벽히 맞췄다.

그러면서도 모든 것이 작게 보이는 지상을 날렵한 눈썰미로 훑으며 시야를 확보해 나갔다.

클로드가 정찰하는 매처럼 듀폰 경이 사라진 방향을 추적해 내면, 태리가 얼른 그의 등으로 달라붙는 식이었다.

“찾은 것 같습니다.”

“알아요, 나도 봤어요.”

하늘에서 수십 개의 건물들을 가로지른 끝에 둘은 치안대에 의해 쫓기고 있는 듀폰 경의 머리꼭지를 찾아내는 데에 겨우 성공해 냈다.

깃발을 매단 남자는 간발의 차로 몰려오는 치안대를 따돌리며 도망치고 있는 중이었다.

아래쪽 상황을 훤히 내려다보던 태리는 그가 잡힐 위기일 때마다 적절히 마법을 사용하여 치안대를 교란시켰다. 과일이 잔뜩 쌓인 수레의 밧줄을 끊어 버린다거나 갑자기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히게 한다거나.

그리고 목표물을 완전히 다 따라잡아 땅으로 뛰어내리기 직전에는 치안대가 달려오는 길목으로 길게 얼음 함정을 깔았다.

모르고 그 위를 밟은 치안대원들의 다리가 얼어붙어서 묶였다.

“뭐지? 마법인가! 주의해라! 근처에 마, 마법사가 있는 것 같다!”

클로드가 화들짝 놀라며 그녀의 행동을 가로막았다.

“여기서 마법을 사용하면 공주님의 정체가 쉽게 발각됩니다!”

“아, 그렇지.”

실수했다는 듯이 태리는 혀를 살짝 깨물었지만 사실은 실수가 아니다. 말해 주지 않아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알면서 쓴 것이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하지만 모른 척했다.

“나도 모르게 구해야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져서 그만…… 어?”

코끝에 톡 하고 빗방울이 떨어졌다.

“방금 빗방울을 맞았어요.”

“네, 저도.”

“비가 내리면 도망치기가 더 어렵지 않을까요?”

“반반이라고 해야 될 겁니다. 도망치기 어려우면 따라잡기도 어려워지니까. 하지만 이렇게 번잡한 거리에서는 쉽게 목격자가 생길 테니 듀폰 경에게는 확실히 더 힘들어진 상황이긴 합니다.”

광장으로부터 동쪽, 예술지구. 작은 회전목마가 한가운데에서 돌고 그 주변으로 뱅 둘러싸듯 각 극장마다 걸어 놓은 대형 포스터와 서커스단의 천막이 뒤섞인 곳이었다.

자유분방하고 낭만적인 활기가 가득했다.

때 아닌 치안대의 술래잡기 소동으로 인해 거리의 인적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사람이 많은 편이다. 특히나 휴일에 거리의 문화를 즐기러 나온 젊은 남녀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회전목마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가 점점 더 굵어지는 빗줄기에 의해 지워져 가고, 우산이 없는 사람들이 후다닥 어디론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위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클로드는 도망치는 듀폰의 동선을 예상하곤 아래로 내려와 꺾어지는 골목에서 미리 대기했다.

그러곤 물을 튀기는 긴박한 뜀박질 소리가 귓가에 거의 근접한 순간, 깃발을 짊어진 남자를 잡아당겨 입을 틀어막곤 천막 안으로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납치에 격렬히 저항하던 남자는 바깥에서 간발의 차로 우르르 지나가는 군화 소리를 듣곤 버둥거리던 다리를 멈춘다. 자신을 구해 줬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눈치가 빨라서 다행이었다.

그가 조용해지자 클로드는 천천히 입을 막았던 손을 놓아주곤 그늘진 구석으로 숨듯이 물러났다. 그 대신 모습을 감추고 있던 태리가 선수 교체하듯 듀폰의 앞에 정체를 드러냈다.

“……당신들은 누구요?”

신비로운 분위기의 여성과 얼굴을 물감으로 칠한 키가 큰 남성. 듀폰은 꼬리를 바짝 세워 응대했으나 상대는 대화를 어렵게 풀어 갈 생각이 없다는 듯 스스로를 거리낌 없이 까발렸다.

“처음 뵙겠어요. 나는 공주예요, 이자리스에서부터 온.”

“……!”

듀폰은 흠칫하며 여성의 눈을 마주 봤다가 등골이 쭈뼛 섰다. 어두운 천막 안임에도 공주의 눈동자는 뭐라도 씐 것처럼 홀로 빛나고 있었다.

“아, 악마……!”

“네에?”

경험과 지식을 초월하는 낯선 것은 단순히 알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사람에게 쉽게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마법사에 대해 알지 못하기에 보고 곧장 ‘악마’라고 토설해 버린 듀폰의 행동에 태리는 실소를 머금었다.

“난 악마가 아니에요.”

자신을 비웃는 듯한 말속의 웃음기를 읽곤 듀폰은 황급히 이성을 챙기려 애썼다. 능력도 없이 허투루 한 세력의 대표가 될 수는 없다. 흐트러진 정신머리를 그가 신속하게 세워 되받아쳤다.

“그쪽이 진짜 이자리스의 공주인지 아닌지 제가 뭘 믿고 확신한단 말입니까.”

“그렇네요. 딱히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요. 그래도 일단은 경을 한 번 도왔으니까 잠깐이라도 그런 줄 알고 믿어 보면 어때요. 길 필요도 없어요. 한 10분?”

“도운 게 아니라, 목적이 있어서 접근한 거 아닙니까.”

“그 정도로 눈치가 빠르면 내가 가짜가 아니란 것도 분별해 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압도적이고 여유로운 말씨에는 확실히 공주다운 자태가 진하게 묻어 나오긴 했다. 사람에게는 무슨 짓을 해도 좀처럼 숨길 수 없는 분위기란 것이 있는 법인지라.

하지만 여자가 진짜 공주라면 그건 또 그것대로 심각한 일이라서, 듀폰은 더욱 바짝 정신을 차려 대꾸했다.

“정말로 당신이 공주님이라면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런 방식으로 절 찾아오셨는지 굳이 밝히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요?”

“뭘 노리셨든 쓸데없는 시도입니다. 저는 제국민이고, 제가 아무리 폐하와 반목한다 하더라도 조국의 실리를 추구함에 있어서는 뜻이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의 군주에게 힘을 싣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다는 뜻이죠.”

“현명한 사람이네요. 분별력 있는 신하고요.”

하지만 태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의 어림짐작을 기꺼이 칭찬했다.

듀폰의 생각은 맥락 면에서는 분명히 정답에 가깝게 적중했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공식하에 그를 찾아온 건 맞았으니까. 하지만 세밀한 부분에서 영 꽝이다. 태리는 그를 제 편으로 꼬드길 계획이 조금도 없었다.

“그런데 당신은 날 안 돕고 싶을지 몰라도 난 그쪽을 좀 돕고 싶거든요.”

“필요 없습니다.”

“필요 없긴. 벌써 잡힐 뻔한 걸 도와줬잖아요.”

“자, 잡혀도 풀려날 겁니다!”

“근데 왜 도망가죠?”

“그건……!”

“황제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는 횟수에도 제한이 있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겠죠? 맞아요, 무서운 분이더라고요. 그런데도 이 짓을 계속 하는 걸 보면 경은 근성 있는 사람일 거예요. 그래서 못 본 척 못 했어요. 내 친구랑 비슷한 것 같아서.”

“거짓말. 누굴 등신으로! 나는 마법사와는 절대 엮이고 싶지 않습니다!”

“등신이 아니라면 빚으로 여기고 갚으면 되겠네요.”

손잡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건 광장에서의 열렬한 장면을 보고 진작에 깨달았다.

듀폰은 불꽃과도 같은 자신의 친구 브리짓과 비슷한 성향을 지녔다.

혈기 왕성한 젊은 투쟁가들에게는 보통 그런 패기가 있는 것 같았다. 세속적인 욕심을 가지긴 하지만 어떤 부분에서만큼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굽히지 않는 고집불통 같은 것들.

황제와도 타협하지 않는 인물인데 당연히 제게도 협조할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맞닥뜨린 낯선 이를 10분 안에 자기 편으로 만든다는 건 원래가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단 소리였다.

“흥, 빚이라고요? 그러니까 결국엔 나와 뒷거래를 원하는 거잖습니까! 분명히 밝히겠지만 나는 배신 따윈 하지 않습니다.”

“언제는 누구의 편이었다는 것처럼 말을 하네요.”

“이보십시오!”

“어차피 배신은 경의 몫이 아니에요. 물론 경의 근성에 감탄해서 어떻게 도움이 좀 되어 볼까 생각 정도는 하고 있었죠. 지금은 보였으니까 그냥 구해 준 것뿐이고. 빚으로 칠 수 있으면 쳐서 갚는다고 하면 좋은 일이고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주장을…….”

“경이 광장에서 떠들었던 백 마디의 외침을 내가 단 한 번의 행동으로 이 나라에서 가장 큰 화젯거리가 되도록 만들어 줄 수 있을 텐데도?”

요동치는 듀폰의 눈빛은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다고 부정하려 애쓰지만 단연 이 공주의 존재는 현재 이 나라에서 가장 큰 논란거리이긴 했다. 이자리스의 마법사. 그녀가 지나다가다 코만 풀어도 모두가 경기를 일으키며 주목할 터였다.

“나, 나는 폐하의 독단적인 행보를 조금이나마 막고자 한 것뿐 다른 흑심은 없습니다!”

“이유가 뭐든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죠. 중요한 건 경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란 거고. 나는 뭐 나대로 원하는 걸 얻을 거고. 아, 내가 뭘 얻냐고요? 그쪽 황제를 빡치게 하는 거요. 그걸 얻게 되죠.”

듀폰은 이제 이 공주가 미친 게 아닌지를 의심해 봐야 했다. 혈혈단신으로 남의 나라에 들어와선 대륙을 주무르고 있는 제국의 군주의 속을 긁겠다고?

“제정신이 아니군요.”

“조금 그렇긴 하죠. 하지만 그 역시도 경과는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말했죠? 배신은 경의 몫이 아니라고.”

얼핏 흘려들었던 문장이 다시 한번 목구멍을 쑥 찌르고 들어왔다.

“그렇다면 누구를……? 아니, 잠깐만. 그런 짓을 하면 정말로 우리 폐하께서 분노하실 겁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