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8/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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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여기도 별수 없는 파벌 정치입니다. 고모님이 마음껏 군림하는 것 같아도 궁정은 황제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왕당파과 그렇지 않은 공화파로 나뉩니다.” 

“아까 전에 홀에 모여 있었던 그 사람들이 왕당파죠?”

클로드를 둘러싸고 태리의 등장을 떨떠름하게 여겼었던 그들. 태리는 그중에서 오거스 백작을 목격했었다. 예전에 이자리스로 직접 찾아와선 황제의 초대장을 전하고 간 그 건방진 관료.

황제를 위해 죽는 시늉이라도 할 것 같았으니 그들이 왕당파였다.

클로드가 바로 보았다며 긍정했다.

“맞습니다. 대다수가 서북부의 부유한 대귀족 출신이고 독실한 신자들이기도 합니다. 마법사에 대해 가장 적대적인 부류이기도 하고요.”

신의 존재를 열렬히 신봉하면 그만큼 마법의 존재에 대해 극렬하게 부정하게 된다. 어쩔 수 없는 연관성이었다.

“그럼 그 사람들을 설득시키기는 어려운 일이겠네요.”

누굴 설득? 클로드가 어림도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거기는 변하지 않는 가치를 고집하는 것을 으뜸으로 치는 인간들뿐입니다. 그들을 설득하느니 차라리 하나씩 죽여서 제거해 버리는 게 더 낫습니다.”

“막 죽여도 돼요?”

“한 서른 명쯤은 죽여도 행정이 돌아가는 데에는 크게 지장이 없을 겁니다.”

“좋아요, 그럼 다른 쪽은요?”

“남부 귀족과 시민 대표가 모여 있는 공화파죠. 지금은 남부 토박이인 듀폰 경이 이끌고 있을 겁니다.”

“아는 사이인가 보죠?”

“안다기보단 그쪽이 일방적으로 저를 싫어하는 거죠.”

“왜 싫어하는데요?”

“제가 성기사단의 단장이니까요.”

“단지 그것만으로?”

“단지 그것만으로도 그에겐 충분한 사유가 되긴 합니다.”

기사를 명예로운 직업으로서 존중하는 국가에서 일국의 기사단장을, 그것도 신의 그늘 아래에 있는 신성 기사단의 단장을 미워할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클로드는 정확히 바로 그 지점이 그가 자신을 미워하게 된 계기라고 말했다.

“제국민은 누구라도 아가사 여신을 성실하게 섬기지만 그것이 꼭 교단에 우호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교단과 척을 지고 원수지간이 된 사람도 허다하죠.”

“공화파의 당수가 그런 사람이란 뜻이네요.”

“예전에는 황제의 권위에 흠집을 내면 신의 이름으로 손쉽게 처벌이 가능했습니다. 그의 외가가 그렇게 무너진 곳 중 하나죠.”

“그런데도 용케 높은 위치까지 올라왔네요.”

“그러니까 용을 쓰고 높이 올라오려 한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그런 이유로 그는 교단과 연루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도 포함이죠. 저만큼 신의 이름을 앞세워 피를 본 사람이 또 없을 테니까.”

그와 그의 기사단이 출정하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 상관없이 무조건 성전(聖戰)이라고 불렸다. 이것은 신께서 원하신 일이고, 거룩한 전쟁이라고. 실제로는 황명에 의한 정복전쟁이었지만 성기사단이 갔기 때문에 그렇게 탈바꿈되는 것이다.

클로드 역시 그것에 문제가 있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가 끊임없이 교단을 향해, 그리고 궁극적으로 고모님을 향해 비판을 던지는 이유죠. 황제의 행보에 제재를 거는 건 여간한 담력으로는 하지 못합니다.”

“바른 소리를 따박따박 한다는 거죠?”

“예, 심심치 않게. 그는 황제에게 쓴소리를 날릴 수 있는 두 세력 중 하나입니다. 인권 문제라든가 은근한 독재라든가, 더러운 비리라든가. 고모님이야 깔려고 하면 깔 수 있는 게 수도 없이 쏟아지시는 분이라…….”

“잠깐만요, 두 세력이요? 하나가 아니라?”

궁정의 세력 구도는 왕당파와 공화파로 나눠져 있고, 그중에 황제에게 반기를 드는 쪽은 공화파 하나로 듣고 있었는데? 그럼 하나여야 하는 거 아닌가? 태리가 의아해하자 클로드는 아, 하고 말을 끊더니 아주 당당하고 떳떳하게 밝혔다.

“두 세력이 맞습니다.”

“공화파와 그럼 다른 쪽은 또 누구죠?”

“나요.”

“……?”

“나라고.”

흐읍.

웃으면 안 되는데. 입술 끝에 간당간당하게 매달려 있는 웃음보를 터트리지 않기 위해 태리는 숨을 참았다.

황제의 친조카에 온갖 명예와 총애를 받고 있는 것 아니었나. 그러면 누가 봐도 왕당파 쪽 사람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클로드는 최선을 다해 한결같이 독재 군주에게 대들고 있는 중이라며 자신의 태도를 피력했다. 말할 때마다 앞머리에 꽂아 둔 나비 핀의 날개가 같이 흔들리는 광경이 귀엽게 느껴졌다.

“그렇게 열심히 싸우고 있을 줄은 몰랐네. 그럼 날 좀 도와줘요.”

“뭘 해 줄까요.”

어떻게 해 주면 되겠냐는 의욕이 활활 타오르는 눈빛 앞에 태리는 그를 살살 꾀어내듯 속닥거렸다.

“적의 적은 아군일지도 모르니까 그 공화파 쪽의 사람들을 한번 만나 보고 싶거든요? 어딜 가야 만날 수 있을까요?”

“그들이라면 요즘 한창 광장에서 농성 중일 텐데요. 교단의 권위를 축소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항의하고 있어서…… 궁에서는 마주치기 힘듭니다. 원하시면 제가 접선 자리를 비밀리에 마련해 보겠습니다.”

아하, 요컨대 시위 중이란 말이렷다? 좋네, 매우 적절하다. 가진 게 기름밖에 없어서 곤란하던 차에 만나야 할 상대가 횃불을 든 성난 누군가라면 대환영이고말고.

태리는 신나서 마구 물개 박수를 쳤다.

“딱 좋다. 그럼 오늘도 거기 있겠네요?”

“아마도?”

“우리 나갈래요?”

“……예?”

응? 생소한 단어를 들은 앵무새처럼 클로드의 머리가 갸웃하고 흔들렸다. 하지만 금세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파악했다. 나가자. 그러니까 놀러 나가자는 게 아니라 싸우러 나가자는 뜻임을.

그가 절대 안 된다는 듯이 뜯어말렸다.

“고모님을 상대로 정치적인 싸움을 걸어 보려는 거라면 안 됩니다. 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자신의 정적을 모조리 단두대로 보내 버린 사람입니다. 자기 앞길을 가로막으면 누구라도 예외 없이 목을 썰었단 말입니다.”

히익, 단두대라니. 목을 댕강댕강 잘랐다니. 공포스러운 얘기긴 하다. 태리가 어깨를 움츠리며 포르르 떠는 시늉을 했다.

“그런 얘기는 너무 무서운데!”

“무섭지, 당연히! 그러니까 하지 마!”

클로드는 구구절절이 황제가 벌인 악행에 대해 떠들었다. 정치에 관한 한 그녀가 얼마나 피도 눈물도 없으며 교묘하고 악랄했는지를. 한번 눈밖에 벗어나면 그게 누구든 간에 가차 없이 처분한다고 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태리의 두려움은 커진다. 그러나 동시에 일을 저질러야만 하는 필요성도 함께 커져만 갔다.

정치가 황제에게 그렇게나 민감한 영역이라면 반드시 건드려야만 한다는 것을.

“가서 살짝 분위기만 보고 오려는 건데.”

손가락을 꼼질대며 클로드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여전히 탐탁지 않은지 눈썹이 일자로 굳어 있었다.

“정면 승부를 보자는 게 아니라…… 왜, 깔짝대면서 성가시게 구는 거 있잖아요. 승패가 목적이 아닌 거죠. 어차피 이길 생각도 없고요. 나는 내가 원하는 것만 얻어 내면 돼요.”

게임계에는 이런 무서운 명언이 있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으며, 즐기는 자는 이길 생각이 없다고.

이기고 지는 것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들. 그저 순간을 즐기기 위해 돌아다니는 사람들. 아니, 더 정확히는 오로지 다른 유저를 열받게 하기 위해서 게임을 하는 사람들.

하다 보면 알겠지만 그런 인간들이 게임 속에서는 제일 무서운 존재들이다. 그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뭘 열심히 해서 점수를 올리고 레벨을 올리겠다는 생각이 없다. 없고, 그냥 다른 유저들이나 괴롭히면서 자신만의 플레이를 즐기겠다는 생각밖에는.

그래서 어떠한 실력자도 그들을 이길 수 없는 것이었다. 만나면 반드시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기 때문에.

과거의 태리는 그런 행위들을 향해 비매너(BM)라고 매섭게 채팅을 치고 비판했었지만, 음…….

‘상황이 달라졌잖아?’

정정당당 일대일로 붙어선 승산이 없으니 비열한 수법이라도 쓸 수밖에. 무엇보다 지금의 목표는 황제를 이겨 먹는 것이 아니다.

상황을 즐기면서 살짝살짝 긁듯이 그녀를 거슬리게 하면 열이 받아서라도 자신을 쳐다볼 것이라고 확신했다. 일단은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 도중에 안 되겠으면 도망가면 되고.

하지만 자꾸 나가자고 무릎을 탕탕 두드리는 태리의 대범한 자세에 클로드는 거꾸로 미칠 노릇이었다.

무언가 전략적인 의도가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의 눈에는 아무리 봐도 위험한 줄타기로만 보였다.

그는 태리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자신이 쥐어짜 낼 수 있는 모든 유혹거리를 총동원했다.

사람들이 줄 서서 사 가는 유명 디저트 가게에 데려간다고도 했고, 웃기다고 소문난 희극 공연을 보러 가자고도 했으며, 의상실과 보석점을 순례하며 마음에 드는 걸 전부 다 사 준다고도 했다.

그러면 태리는 눈을 깜빡이면서 ‘그거 다 사 준다고? 진짜? 아, 그런데 시간이 안 되겠네. 아까워라.’ 하는 순서로 거절했다.

그리고 그는 그제야 비로소 선물을 거절하는 애인의 행동에 남자들이 왜 그렇게 괴로워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줬는데 안 받으면 겸사겸사 서로 절약하고 좋은 거 아닌가? 했었던 철없는 시절의 자기 자신을 되돌아본다.

뭐든 사 준다는 데도 필요 없다고 거절하니 정말 미칠 것 같았다.

그런 공황 상태와도 같은 심정이 전달됐는지 귓가에 자그마한 목소리가 달래듯이 다가와 앉았다.

“자꾸 됐다고 해서 미안해요. 그런 걸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할 일이 있어서 그런 거지. 알잖아요, 응? 이해해 줄 수 있죠?”

“……모르겠는데.”

입술이 저절로 뚱해져서 튀어나올 것 같다. 그것 좀 집어넣어 보라고 태리가 그의 머리칼에 꽂아 두었던 머리핀을 빼 그것으로 톡톡 쳤다.

“광장에 데리고 나가 주면 내가 지금 한 거랑 비슷한 핀도 사 줄게요. 앞머리 꽂아 두니까 안 내려오고 좋죠? 수술용 모자처럼 편하고 튼튼한 걸로 사 준다니까.”

수술용 모자? 그게 뭐지? 또다시 처음 듣는 희한한 단어로 생각이 빠지려 하는 찰나 헝클어진 머리칼로 불쑥 손이 닿아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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