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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골랐으니까 어, 얼른 사고 나가야겠다.”
더 머무르면 민폐가 될 거라는 판단에 태리가 잽싸게 골라 두었던 양산과 모자를 집어 들었을 때였다.
“야, 잠깐 기다려 봐. 지금 입은 그거 구리니까 벗고 이걸로 갈아입어.”
“그래, 친구야. 내가 널 위해 예쁜 핑크색 드레스를 골라 왔어.”
“그딴 애들 옷은 저리 치워.”
“이게 왜 애들 옷이야. 댁이 가져온 게 지나치게 나이 들어 보이는 거지.”
그러나 이즈와 브리짓의 성화에 뜻대로 되질 않았다. 서로 자기가 골라 온 옷을 입으라며 옷걸이째로 갖다 들이대는 통에 그녀는 계산대로 가지 못하고 가운데에 서서 시달려야 했다.
너는 외모가 앳되니까 이게 더 어울린다, 아니다, 얘는 팔다리가 긴 편이니 기장이 짧고 목이 깊게 파인 게 좋다……. 이러쿵저러쿵 참견하는 말을 몇 줄 들은 클로드는 심기가 가파르게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미간에 절로 힘이 들어가고, 심호흡이 깊어지며 열이 오르고 심술이 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도저히 끼어들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저는 이대로가 제일 예쁘다고 생각합니다.”
저놈들에게 지고 싶지도 않았고.
“지금 입고 계신 옷이 제일 잘 어울립니다. 다른 말들은 그냥 무시해 버려요.”
밀리거나 뺏기고 싶지도 않았다.
그게 뭔지는 정확히 몰라도.
그가 의견을 내놓자 자기주장을 하던 하이에나 두 마리가 뭔 개소리야? 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그게 제일 별론데 헛소리하네.”
“왜, 난 예쁜데.”
“뻔하지. 은근슬쩍 지 취향대로 입히려는 수법 아니겠어? 고자 취향을 대체 누가 좋아해.”
“너도 별반 차이 없다는 거 안다.”
그리고 진짜 예쁜데 왜.
거짓말 한 점 보태지 않고 지금의 공주는 충분히, 넘칠 정도로 예쁘고 예뻤다. 진짜 엘프는 저 미친놈이 아니라 공주가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로.
그녀가 말없이 눈을 내리깔 때면 은은한 꽃잎 위에 앉아 있는 요정 같아서 순간순간 가슴이 찌르르해져 놀랄 때가 있었다.
“친구야 이거 벗고 내가 가져온 거 입자, 응? 지금 건 디자인이 너무 얌전해. 목이 덮여 있어서 답답해 보인단 말이야. 쇄골 라인이 살짝 드러나야 보기 좋아. 망토 같은 것도 벗어 버리고.”
쇄골? 벗어? 귀가 확 잡아 뜯기는 소리였다. 덮여 있는 게 뭐가 어때서. 클로드가 턱에 힘을 주며 칼같이 쳐 냈다.
“노출이 있는 건 안 돼.”
“우리 공주님은 너한테 잘 보일 일 없어. 신경 끄라고. 어디 가서 접시에 코 박고 죽든가! 아니, 이렇게까지 저주를 퍼붓는데 왜 안 죽는 거야?”
그러나 때 아닌 노출 소리에 반색을 하며 달려든 건 방심을 하고 있었던 이즈리얼 쪽이었다. 그가 흔들고 있던 스커트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빼더니 자신이 고른 옷을 강력하게 추천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노출하면 이거지. 봐, 이 옷은 안에 걸려 있는 속옷까지 한 세트라고. 이유가 있지 않겠어? 푸른색 속옷은 말이야―”
그리고 거기에서 클로드의 머릿속에서 뚝 선이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꺄악!”
천을 가를 때 쓰는 왕가위가 허공을 가르는 것을 본 점원이 비명을 지르며 책상 밑으로 숨었다.
* * *
결혼식장은 공원의 한편, 야외에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쏟아지는 햇빛과 정성스럽게 가꾼 조경이 잘 어우러져 나들이 나온 사람들마저 하객처럼 곳곳에 모여들었다.
“축하해요, 율리아.”
태리는 입구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 신부에게 다가가 먼저 환한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어머나, 공주님! 정말 와 주셨군요!”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이건 선물이에요. 던전에서 찾아낸 광명의 원석을 가공한 건데 어두운 곳에서 지니고 있으면 예쁜 빛을 내요.”
“세상에나, 이렇게 와 주신 것만으로도 영광인데.”
율리아는 입을 가리고 작게 감탄했다. 그러다가 문득 화사한 공주의 외모를 한 번, 그녀의 뒤편에 있는 어두침침한 무리를 한 번씩 번갈아 보더니 말을 흐렸다.
“그런데 두 분이서 같이 오셨네요. 아니, 세 분이서…… 아니…… 네 분인가요?”
제 뒤를 따라왔을 그들이 누구일지 뻔했기에 태리는 말없이 쓴 미소를 지었다.
가위를 표창처럼 던지며 시작됐던 옷가게에서의 혈투는 현장의 일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을 정도로 심각했었다.
이즈리얼의 곱고 아름다운 긴 머리칼이 뭉텅 잘려 나갔고, 클로드의 입술은 두 군데나 터져 나가 뱀파이어처럼 새빨갛게 물들었으며, 브리지테의 드레스는 상하단의 장식이 전부 뜯겨 너덜너덜하게 변했다.
세 명이 엉켜서 난투를 벌이는데 과장 한 점도 없이 무슨 동물의 왕국이라도 보는 줄 알았다.
목줄을 끊고 나온 야생의 들짐승도 그 정도로 날뛰진 않을 텐데.
말리고 말리다가 도저히 안 돼서 태리는 혼자 간다고 선언하고 나와 버렸었다. 아니, 탈출했다.
그랬더니 세 놈이 다 저렇게 입이 댓 발 튀어나와선 자기들끼리 멀찌감치 떨어진 채로 쫓아온 모양이었다.
“네가 율리아. 음, 확실히 여자군.”
태리의 등에 딱 붙어 선 클로드가 왜소한 체구의 신부를 험악하게 훑어보았다. 세관 검사라도 하듯이 아주 꼼꼼하고 철저하게.
“총독님께서 어떻게 이런 곳까지……. 그런데 얼굴이 혹시 누구한테 맞으신 건…….”
“누가 봐도 긁힌 상처가 아닌가.”
“네에……? 아아, 네, 네! 그렇네요. 제가 괜한 말을.”
“결혼 축하하지.”
본인은 전혀 쫓아오는 게 아닌 것처럼 주머니에 손을 꽂고 설렁설렁 걸었지만 사실은 누가 봐도 제일 가깝게 태리의 뒤에 붙어서 따라온 인물, 클로드.
그는 겁도 없이 친한 척을 하며 청첩장을 보낸 녀석이 너였냐, 하는 시선으로 신부를 겁주더니 태리의 매서운 눈 째림을 받곤 머쓱하게 손에 쥐고 있던 걸 내놓았다.
“급하게 참석하느라 선물을 미리 준비 못 했는데 이거라도 괜찮다면 받아라. 눈에 마귀가 씐 변태를 처치할 때 사용했던 용맹한 무기다. 그대도 여성이니 호신용으로 지니고 다니면 좋겠지.”
아니, 저 철부지가 의상실 가위를 여기까지 들고 왔어?!
그러나 기가 막히기엔 아직 이르다. 속속들이 도착한 말썽쟁이들이 입장권이라도 내듯 급조한 선물들을 하나씩 새 신부에게 안겼다.
“딱히 가진 건 없고 내 머리카락이나 몇 가닥 줄게. 그래, 그 가위에 잘린 거야. 엘프의 머리카락은 행운을 가져다주는 희귀 마법 재료 1급으로 분류되는 거 알지? 그럼 들어간다?”
“여길 들어가려면 뭘 내놓고 가야 되는 건가 보네. 흠, 지금 멀쩡한 건 이 부채밖에 없는데 이것도 괜찮을까요, 신부님. 표면에 독을 잔뜩 발라 놨으니까 함부로 펼쳐서 흔들지는 말구요. 뭐, 아주 나중에 혹시라도 남편 분이 바람이 나면 그때는 유용한 도움이 되겠지요. 호호호!”
불청객 주제에 말도 안 되는 잡동사니까지 선물하곤 그들은 몹시 떳떳하고도 당당했다.
‘아, 지쳐.’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벌써부터 지치기 시작한다. 저것들이랑 알은척을 하질 말아야지. 태리는 양산을 펼쳐 얼굴과 상체를 가리곤 가장 끝 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나 숨은 게 의미 없게도 옆의 의자가 드르륵하고 냉큼 당겨졌다.
“아, 뭐예요. 왜 여기에 앉아요. 다른 데 빈자리 많은데!”
“일행이니까.”
태연하게 옆 좌석을 꿰찬 클로드는 얻어맞아 입술이 다 쥐어 터진 채로도 문학클럽에 드나드는 고위 자제처럼 말끔하고 단정해 보였다.
방금 전에 어디 가서 깽판을 치고 온 장본인이라곤 누구도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물론 세력도 있고 힘도 있는, 확실한 우두머리이니 굳이 저런 내숭을 떨지 않아도 그를 이곳에서 쫓아내진 못하겠지만…… 뭐랄까 좀 얄미웠다.
‘우씨, 엄청 열받네.’
사고 치고 온 주제에 혼자만 여유 있어 보이는 낯짝이 심술 나 태리는 양산 속에 숨어 낮은 목소리로 따졌다.
“초대장도 없으면서 뻔뻔하기도 하지.”
“초대장은 둘 중에 하나만 있으면 되는 거죠. 독방구야 공주님 시녀로 온 거고, 귀쟁이는 사람으로 안 치니까 됐고, 그럼 마침 딱 파트너 자리가 비죠. 적당하게.”
“난 가위살인마는 파트너로 필요 없는데요?”
가위살인마……. 그 말에 울컥했는지 클로드가 양산의 가장자리를 거칠게 들추고 들어와선 성대를 긁듯이 말했다.
“그딴 변태 놈은 죽어 마땅했죠. 날이 빗나간 게 안타까울 정도인데.”
그냥 말로만 아쉽다고 하는 게 아니라 목을 꿰뚫기엔 약간 부족했었던 각도와 팔의 힘이 원통해서 죽을 것 같다는 말투였다.
살해 시도를 한다면 이즈리얼 쪽일 거라고 생각했지, 설마 클로드가 먼저 이럴 줄은 몰랐다.
언제나 1열에 앉아서 수업에 집중하던 범생이가 갑자기 안경을 벗어 던지고 소주병을 한 박스나 깬 느낌?
손바닥 뒤집히듯 살벌해지는 기운에 태리는 그를 세뇌시키듯이 꾹꾹 눌러 말했다.
“이즈를 죽여선 안 돼요.”
걔도 널 죽여선 안 되지만 너도 마찬가지다. 둘이 협동해서 엔딩을 보는 시나리오니까.
그러나 클로드는 그딴 놈을 두둔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들썩였다.
“그 천박한 귀쟁이는 저질스러운 말로 당신을 모욕했습니다. 내가 똑똑히 들었다고. 어떻게 속, 속…… 속……”
속…… 속옷…… 속옷을……. 너무 외설적이고 망측해서 단어조차 제대로 끝맺지 못하고 클로드는 귀 끝이 불탔다.
완벽한 기사도가 몸에 배도록 교육받은 그로서는 그것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발언이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이즈는 심지어 그게 농담도 아니었을 텐데. 그냥 일상적인 언어 습관 내지는 평범한 발언 정도였을 텐데. 앞으로도 계속, 쭉 그런 식으로 말할 텐데.
‘아니, 무슨 주인공이 이렇게 유교적이냐고!’
온실 속의 사군자라도 되는 건가. 그의 머리에 갓이 얹어져 있을 상상을 해 보니 썩 잘 어울릴 것 같긴 했다.
“아무튼 아까처럼 난동 부리기만 해 봐요. 여기가 남의 결혼식이란 걸 잊지 말라고요. 구겨진 얼굴도 좀 펴고! 총독 때문에 사람들이 이쪽으로 잘 못 오잖아요.”
공주와 기사.
함께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낭만적이었고 꽃과 햇살을 배경으로 나란히 앉아 있으니 동화 같은 장면으로 보이긴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기사가 고결하고 정의롭긴커녕 뒷세계의 보스처럼 살벌한 기세로 공주의 옆을 지키고 있다는 거다.
덕분에 아무도 이 근처로 오질 못했다.
이 무슨 공주와 산적도 아니고.
공주에게 인사를 하고 싶은 이들은 눈치만 보다가 그 험상궂은 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뭐가 그렇게 화가 났어요, 대체?”
“제가 뭘요.”
“누구 하나 죽일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잖아요. 완전 찌그러지고 못생긴 1쿠퍼짜리 삶은 감자 같애.”
“그렇게 가격까지 구체적으로 덧붙일 필욘 없잖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