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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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짠데 어떡하라고요. 듣기 싫으면 좀 웃어 보든가.” 

“누가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고……. 억제 순찰을 하는 거잖습니까. 불미스러운 사건,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거라고요. 저 중에 나쁜 의도를 품은 자라도 있으면 누구 옆이 제일 안전할 것 같습니까?”

그래서 내 보디가드를 하시는 거다? 거참 웃기지도 않단 말이지. 어디 보디가드가 지나가는 행인들을 위협한단 말인가.

범죄 예방이 목적이라고 핑계 대기엔 신시가지는 시선이 닿는 곳마다 하나같이 융성하고 풍요로운 장소였다.

몬스터 출몰 지역. 대륙에서 가장 위험한 숲이 존재하는 도시. 모험가와 용사 지망생, 사냥꾼, 용병으로 가득 찬 이자리스의 한 동네……라는 오명이 민망할 정도로.

번성한 거리와 사람들의 화려한 복식들 좀 봐라. 도대체 이곳 어디에 범죄의 우려가 있다는 건지.

구시가지는 마법사들의 드센 반발과 저항에 부딪혀 제대로 손대지 못했지만, 신시가지는 도시의 어연번듯한 모양새를 이미 모두 갖추고 있었다.

레스토랑, 학교, 공원, 상점, 살롱, 사교계, 도서관…….

‘아, 도서관?’

풍경 속의 건물들을 차례대로 나열해 보던 태리는 문득 한 곳에 생각이 미치곤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지. 도서관은 클로드가 만든 게 아닐 텐데.’

도서관은 게임을 시작할 때부터 이미 지어져 있는 건물이었다.

사용자가 퀘스트를 해결하는 데에 단서나 자료를 제공해 주는 곳이었고, 때때로 업적이나 발견물 같은 걸 보고해 가면 이벤트처럼 경험치를 얻기도 했던 곳.

그걸 모아 레벨 업을 시키면 캐릭터를 성장시킬 수 있었으니 일종의 게임 안내자이자 도우미 역할을 하는 셈이었다.

……근데 여기선 어떻게 시작했으려나?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언제부터 허락받고 물어봤다고.”

“도서관 있잖아요. 그거 언제부터 있었어요? 누가 지은 거죠?”

“도서관이요?”

웬 엉뚱한 질문이냐는 듯 클로드는 의아한 얼굴로 반문했다.

“그건 마법사인 공주님이 더 잘 아실 것 아닙니까.”

“내가요?”

“저걸 만든 사람은 마법사일 거라고 다들 추측하는데요.”

……그런 쪽으로는 생각도 못 해 봤는데.

이쪽은 확실히 주인공의 영역, 그러니까 기사들의 영역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째서 거기서 갑자기 마법사가 튀어나온담.

“처음 도착했을 당시 도서관은 이자리스에서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가 남아 있는 건물이었습니다. 신시가지가 생기기 전부터 이곳에 있었고 그걸 기점으로 새 마을을 만든 겁니다.”

즉, 본인이 도착하기 전부터 존재했었던 데다가 대재앙 속에서도 굳건히 보존된 건물이었으니 당연히 마법사들의 건축물이라고 여겼단 소리였다.

‘하지만 그건 딱히 누구의 소행도 아닌걸. 그냥 있는 거지.’

게임하다가 죽으면 자동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태초의 리셋 장소쯤이나 될까.

“들어가 본 적 있죠?”

주인공으로서는 필수적인 장소이니 당연히 그랬으리라 확신했는데, 클로드는 의외로 기억을 더듬으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처음 한두 번 정도는.”

“……한두 번밖에 안 갔다고요?”

“갈 이유가 없는데요.”

‘대체 내가 거길 왜?’ 하는 표정의 클로드는 오히려 과민 반응하는 태리를 이상하게 보고 있었다.

“거긴 도서관이라기보다는 기록관 같은 곳입니다. 이자리스와 소네티 왕가에 관련된 서적들이 대부분이죠. 역사서라든지 마법서라든지.”

도서관의 장서는 어느 모로 보아도 전부 마법사에 관련된 책들뿐이었다.

그들의 뛰어남을 설명하든 그들의 실수를 서술하든 간에.

그들이 어디에서부터 왔고 어떻게 괴멸당했는지 오로지 ‘마법사’들의 이야기들로만 가득 차 있었다.

“몇 권 들춰 봤는데 큰 의미는 없었습니다. 기사인 제 눈엔 사실 이해가 안 가는 책들이 대부분이고요. 읽지 못하는 것들도 많고. 특히 마법서 같은 건 뭐 말도 안 되는 내용들이……. 그래도 애들은 좋아하는 것 같더군요. 동화책이라도 보는 것 같겠죠.”

아니 그렇다고 관심을 끄고 살았단 말이야?

도서관이 기록관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당연하다. 사용자의 원활한 게임 진행을 돕기 위해 힌트에 가까운 정보들을 제공해 주는 곳이었으니까.

“어느 마법사가 후대를 위해 남긴 유물 같은 거 아니겠습니까. 나라의 재건을 시도하려면 그런 자료들이 필요하긴 할 테죠.”

“그건…….”

“둘이서만 무슨 심각한 대화를 하나 했더니 도서관 얘기 중이었어?”

오면서 대화를 엿들은 건지 접시에 음식을 한가득 담아 온 브리짓과 이즈가 남은 자리에 끼어들었다.

“그걸 누구 만들었냐가 과거에 큰 화두가 된 적이 있긴 했지. 근데 결론은 우리 마법사들도 잘 몰라. 정확히는 그만한 천재적인 마법사가 남아 있는 사람들 중엔 없었달까?”

딸기를 오물오물 씹으며 브리짓이 말했다.

“그게 대재앙 직후에 생긴 건 맞긴 해. 그때 어른들이 그랬거든. 강 건너에 뭐가 보인다고. 처음엔 정체를 모르니 무서워서 못 들어가 봤고, 들어가 본 후엔 다들 놀랐지.”

“왜?”

“왜긴 왜야. 그런 곳에 그만한 수준의 책들을 기록해서 보유하려면 현자나 대마법사쯤은 되어야 한다니까.”

그래서 난 결론이 모른다, 였다고 했다.

“아무도 모르면 유령의 집이냐?”

수명이 긴 엘프로선 인간들의 단출한 기억력이 우스운 듯, 이즈가 유령의 집이냐고 비아냥댔지만 태리는 일편으로는 내심 그 의견에 동의했다.

‘꼭 나 같잖아.’

출처가 불분명한 존재. 하나는 사람이고 하나는 건축물일 뿐이다.

설계해 둔 설정에 구멍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설정해 둔 ‘데이터 자체가 없음’이었다. 유령처럼.

하지만 그런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태리뿐.

클로드는 음식으로 가득 찬 접시와 태리의 빈손을 번갈아 보더니 불쑥 브리짓의 접시에서 가장 큰 머핀을 집어 빈 무릎 위에 올려놔 주었다.

“아, 뭐야!”

브리짓이 곧장 살쾡이 같은 눈을 했지만 머핀이 어디로 갔는지를 보곤 억지로 참는다. 그러곤 클로드가 했던 짓 그대로 이즈리얼에게서 음료를 뺏어 태리의 나머지 손에 쥐여 주었다.

이 미친 것들이 내 것에 손을 댔다며 왁왁대는 이즈의 욕설을 한 귀로 흘리며 태리는 머핀을 한 입 베어 먹고, 단내가 나는 포도주를 삼켰다.

‘얘들은 내가 굶고 사는 줄 아나 보네. 하지만 맛있어. 다 먹고 가서 또 가져와야지……. 음?’

불현듯 왼뺨으로 싸한 감각이 들었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씹던 행동이 멈췄다.

지독한 시선이다. 그렇게 느꼈다. 지독하다고.

불쾌감이 등을 타고 올라오는 거머리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뚫어질 정도로 쳐다보는 건지.

입 안에 남아 있던 것을 한 번에 삼켜 버리고 태리는 역공하듯 불시에 그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눈앞으로 환한 빛이 터졌다.

눈을 감을 새도 없이 곧이어 연달아서 팟팟팟, 하고 플래시 소리가 터진다. 소리만 들으면 대여섯, 아니 얼추 잡아도 열이 넘었다.

신문사에서나 나온 기자들이 그녀가 그쪽을 본 순간 단체로 사진기의 셔터 버튼을 눌러서 벌어진 참사였다.

눈을 부시게 했던 빛은 나팔관처럼 생긴 카메라의 커다란 플래시 전구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험상궂은 얼굴로 일어선 클로드 덕분에 얼마 안 가 모두 후다닥 꽁지를 빼기는 했지만 잠깐 사이에 혼이라도 빠져나간 것 같았다.

“아주 극성이네, 극성이야.”

의자를 끌어 시선을 가로막아 준 브리짓이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클로드를 탓했다.

“고자 때문에 이게 다 무슨 고생이람.”

“내가 뭘 어쨌다고.”

“네가 지금 우리 공주님이랑 이런 데서 같이 있는 게 얼마나 특종거리인지 몰라서 그래? 안 그래도 둘이 같이 있는 증거 찾으려고 혈안이었을 텐데. 쓸데없이 스캔들 재료만 제공한 셈이 됐잖아.”

그러면서도 덧붙이길 ‘천년의 수도승처럼 굴더니 남자는 남자였구나!’를 신문 기사의 헤드라인으로 뽑으면 백만 부는 그냥 따 놓은 당상이라고 그를 비꼬았다.

“이 독방구가 사사건건…….”

“하? 뭐야. 센 척하더니 여자 한 번도 못 만나 본 애송이였던 거야? 어쩐지. 속옷 하나에 발작해서 지랄하더라니. 기본기가 전혀 없었구만?”

또 뺏기기 전에 나머지 음식을 입으로 우걱우걱 밀어 넣던 이즈는 그 지점에선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입술에 묻은 소스도 닦지 않은 채 미친 듯이 박장대소했다.

“아, 너무 웃어서 눈물 나네. 이렇게 순수한 놈인 줄도 모르고 괜히 진지하게 받아 줄 뻔했잖아.”

“순수한 게 아니라 안타까운 거지. 한창때를 아무것도 모르고 보내는 거야.”

당장 닥치지 않으면 쌍으로 혀를 도려내 준다며 클로드가 이를 갈았지만 그런 반응을 즐기듯 둘은 더욱 신나게 그를 놀려 먹으며 성질을 긁었다.

‘진짜 여자가 하나도 없나? 호감 가는 상대라도?’

반면에 태리는 혼자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공식적으로 여기 세계관의 장르는 액션 알피지. 로맨스라곤 한 스푼도 없다.

그렇지만 잘나가는 주인공에게 운명의 여자가 하나둘씩 붙는 건 보통 만국 공통의 법칙 같은 거 아니었나.

신에게 기사의 맹세를 했다고 해서 성혼이 금지된 것도 아니고.

물론 성기사인 만큼 대체로 금욕과 절제를 권장하긴 하지만 곁에서 본 클로드는 그런 교리들을 숭배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오히려 세상아 덤벼라, 이런 느낌이었지.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진 그녀가 넌지시 찔러 보듯이 물었다.

“진짜 이성이랑 교제해 본 적 없어요?”

“…….”

낭패감 어린 표정에 달라붙은 그의 침묵은 ‘없다’라는 대답을 대신한다.

언뜻 보이는 낌새가 ‘너마저 그런 말을 해?’ 하는 배신감으로 읽히기도 했다.

실수했다는 마음에 급히 사과하려 했지만 터진 댐에서 밀려 나오는 홍수처럼 속사포로 쏟아지는 그의 말이 더 빨랐다.

“저는 열셋부터 열여덟이 될 때까지 남자만 있는 수도원에서 생활했습니다. 서훈을 받고 그곳을 나온 뒤엔 1년 중의 절반 이상을 전쟁터에서 보냈고요. 그렇지 않더라도 관심도 없었겠지만 애초에 여성을 만나기가 어려웠단 말입니다.”

세상에, 저런. 정말 착실하고 성실하게도 세계를 구할 영웅다운 삶을 살아왔구나. 그러니까 줄곧 일만 하고 살았단 얘기였다.

“웃기시네. 그게 변명이 될 거라고 생각해? 만날 사람은 다 알아서 만난다고. 장인은 도구 탓을 안 한다.”

“닥쳐라, 독방구.”

“주변에 여자가 없으면 가끔 볼 때 더 환장했었어야지. 설득력이 없는데?”

“입 닥쳐, 귀쟁이.”

골려 먹기에 맛을 들인 둘은 이래도 불신, 저래도 불신인 것 같았지만 태리는 그의 설명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커리어를 챙기면서 살 때는 그녀 역시 연애 정도는 포기하면서 살았으니까. 억지로 누굴 만나야겠다는 생각도 없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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