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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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딱 한 글자로 이루어진 대꾸였지만 그 아니꼬움의 농도와 깊이가 남다르다. 고요히 노려보던 클로드의 분위기가 단숨에 영 도 이하로 서늘해졌다. 

보통 그의 앞에서 주눅이 들지 않는 부류는 거의 없다. 클로드 데본셔라는 인물이 가진 지위와 배경, 분위기, 가문, 힘 따위에 의해 사람들은 자동으로 기가 꺾이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굴러왔는지도 모를, 야시시하게 생겨선 한주먹거리도 안 될 것 같은 이 엘프가 그의 압박감을 팔꿈치로 툭 치듯 밀쳐 냈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제 밑으로 눌러 보려고까지.

알고도 얌전히 넘어갈 성정은 아니었기에 클로드는 윤기가 나는 은빛 머리통을 깔아 보며 엘프의 정체를 단정 지어 주었다.

“가까이서 보니 뭔지 알겠네. 귀쟁이네. 낡고 오래된 종족.”

천박한 은발 자식. 말로는 하지 않았지만 눈빛이 딱 그랬다.

만난 지 고작 몇 분 만에 생긴 어마어마하게 부정적인 선입견과 그릇된 색안경, 악의와 고의성이 담긴 평가였다.

이즈는 그걸 듣고 목청을 울리며 웃더니 광기가 싹 스민 눈으로 단숨에 클로드의 코앞까지 쇄도해 들이닥쳤다.

“벌레 같은 게. 뭐라고 했냐?”

날렵함이 특기인 엘프답게 그는 클로드에 비해 키가 작고 체형이 훨씬 호리호리한 편이다. 하지만 일대일로 대치한 상황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푸른 불꽃이 타닥타닥 튀었다.

“인간들 사이에선 뭐라도 되는 축에 속하나 본데 그거 믿고 설치다간 칼 맞아. 네들 수명이 아무리 짧아도 지금 나이에 모가지가 잘리면 태어난 게 좀 아깝지 않아?”

“내가 뭐라도 되는 건 맞고. 목이 잘리든 말든 그건 네가 알 바 없고.”

“와, 이 자식 이거 진심이네? 존나 골 때리잖아!”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런 눈빛을 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라면서, 이즈는 히죽대는 얼굴로 살얼음이 낀 클로드의 패기를 아낌없이 칭찬했다.

그러면서도 광기 어린 즐거움을 담아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던 태리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너 아는 애야?”

순수한 질문처럼 보이지만 진의는 다르다. 아는 애인지 아닌지는 별로 관심이 없을 것이다. 태리가 느끼기에 저건 그냥 이런 뜻이었다.

‘이런 애는 찔러보면 맛이 기깔 나겠는데? 너 해 봤어?’ 하는.

‘저 미친 사이코패스가.’

안 된다. 내 주인공한테는 손대지 마라. 내 동아줄이란 말이다.

태리는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둘을 떼어 놓으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끼어드려는 것을 기민하게 알아챈 클로드의 등에 의해 먼저 행동이 저지당했다.

이즈를 내려다보는 클로드의 분위기는 그 짧은 틈에 더 차갑고 살기 어린 쪽으로 심화되어 있었다. 지글지글 끓는 시선이 무용수 같은 섬세한 라인의 어깨에 못 박혔다.

“옷 꼴이 이게 뭐야. 옷이 왜 이래.”

그가 매섭게 지적한 것은 다름 아닌 보풀이 잔뜩 올라온 헐렁한 카디건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태리를 돌아보면서 카디건이 흘러내린 탓에 쇄골이 살짝 엿보인 불건전한 이즈의 모습 그 자체다.

어디 이런 헐벗은 꼴로……. 클로드는 아주 끔찍한 표정이 되었다.

“공주님 앞에선 옷을 제대로 입어라. 벗지 말고. 알겠나.”

만지기 싫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그가 손가락을 집게처럼 만들어 양모 재질의 천을 목 부근까지 바짝 끌어 올려 주었다.

이즈는 차가운 손끝이 닿은 부위를 힐끗 내려다보더니 한쪽 입가를 픽 올리며 도발했다.

“뭐야. 설렜냐?”

“돌았나.”

이 천박한 귀쟁이가 정신이 나갔나. 즉시 혐오성 발언이 튀어 나갔다. 옷 끝을 잡았던 손을 외투에 비벼 닦으며 클로드는 더러운 것에서 물러나듯 뒷걸음질했다.

“은발에 미형인 하이엘프. 이렇게까지 두루두루 다 갖추긴 솔직히 힘들지. 벌레 자식, 너 내가 여자였으면 들이대려고 했지?”

이건, 이건 진짜 개미친놈이다. 클로드는 이를 갈며 널 죽여 없애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진심으로 죽여 버리겠다. 오늘 처음 만났지만 말이다.

태리는 당황해서 최대한 둘 사이를 중재하며 끼어들었다. 둘은 이런 식으로 만나면 안 된다. 원래도 상성이 안 좋아서 불씨만 붙어도 머리 박치기를 하긴 했지만 적어도 이런 관계성은 아니었다.

그녀가 서둘러 함께 있던 까닭을 설명했다.

“옷 고르는데 브리짓이 같이 와 준 거예요. 이즈는 새로운 동네 구경한다고 그냥 따라온 거구…….”

“이즈?”

“아…… 내가 총독한테 말을 안 했었나. 이쪽은 이즈리얼이라고…… 얼마 전에 새로 사귄 은발 친구예요.”

“얘가 웃기네. 내가 왜 네 친구야? 친하지도 않은데.”

“사귀었다고요?”

두 놈이 동시에 발끈했지만 클로드는 이번에는 엘프는 싹 무시하고 태리만을 향해 몸을 돌렸다.

“율리아인지 줄리아인지도 모자라서…….”

대체 어느 틈에 어딜 가서 새로운 사람을 그리 잘도 사귀어 오는 건지.

구시가지에 엘프가 출몰했다는 것은 그도 듣긴 했었다. 뭔 말 같지도 않은 진료소 따위를 차렸다는 것까지도.

하지만 그 생명체가 공주와 안면을 텄다는 건 처음 듣는 소리다. 놈이 공주의 옷 구경을 쫄래쫄래 따라올 만큼이나 가까워졌는데도 그는 둘의 관계에 대해 한 번도 접하질 못했다.

‘제드, 이 개자식이. 넌 가면 죽었다.’

죽여 버릴 테다. 기필코 죽인다. 대체 어디까지 소식을 거르고 전달을 안 한 건가. 사태가 이렇게 될 때까지 아무것도 몰랐다니, 자신이 오늘만큼 등신같이 느껴지던 때가 없었다.

“이런 놈과 어울린다는 말은 없었잖습니까.”

“난 당연히 총독이 알 줄 알고…….”

“말을 안 하는데 제가 어떻게 압니까!”

“그야 항상 보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근데 왜 화를 내고 그래요?”

“그러게, 부르지도 않았는데 온 주제에 무슨 자격으로 큰 소리래.”

남자 둘이 싸우다가 한 놈이 사망하게 되는 광경인 줄 알고 흥미진진하게 관전하던 브리짓은 돌연 불똥이 태리에게로 튀자 당장 소매를 걷어붙이고 끼어들었다.

“우리 중에 누구 그쪽 부른 사람 있나? 없지? 그런데 왜 난입해선 언성을 높이냔 말이야.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게 요만큼도 없어.”

열받는 말투로 지 하고 싶은 말만 하면 단 줄 아나. 클로드는 흡사 훼방꾼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브리짓을 쪼아 내렸다.

“너야말로 왜 여기서 얼쩡거리나. 하루 종일 내 욕 하고 다니느라 바쁜 줄 알았는데.”

독인지 차인지 모를 것을 파는 브리짓의 찻집은 온갖 날조와 언론 플레이의 온상이었다.

백작이 불만을 드러냈던 대로 현재 이자리스에는 공주에 대한 미담만 무성하고 클로드에 대한 이야기는 없거나 혹은 더러 부정적이다.

그가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 아양을 떨지 않는 성격인 것도 거기에 일조를 했겠으나, 근본적으로는 저 망할 찻집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악성 루머가 단단히 한몫을 하고 있었다.

“어머, 알고 계셨어? 그래서 어쩌라고. 알고 있는데 어쩌라고. 며칠 뒤에 공주님 꽁무니 쫓아다니다가 짠하고 추해진 총독에 대한 설이 기사에 실리면 그 범인은 나다, 이 벼락 맞고 뒤질 고자 놈아!”

“짠하고 추해진?”

“그래, 짠하고 추하지. 누구 만나나 졸졸 따라와선 간섭이나 하고. 본인이 무슨 짓을 하는지 자각은 하고 있어?”

“그런 게 아니라니까!”

“어머머, 아니면 아닌 거지 왜 진상을 떨어. 진짜 같게? 얼굴 좀 봐. 뼈다귀 뺏기고 날뛰는 오크 같네!”

이성이 흔들리는 클로드는 작정하고 덤벼드는 브리짓을 말로는 이길 수 없다. 자신의 승리를 예감한 그녀가 태리의 팔에 친근한 팔짱을 껴 넣으며 얄미운 소리를 쏟아 냈다.

“키 크고 체격 좋은 놈이 여자 앞에서 떼쓰면 그게 얼마나 꼴불견인지 왜 모르나 몰라. 저런 남자는 상종해선 안 되겠다. 그치, 친구야?”

아수라장이 되지 않도록 셋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태리는 날뛰는 아기를 잠재우는 듯한 간절함으로 두 명의 동행인들에게 차례대로 주의를 주었다.

“총독은 좋은 사람이야. 일부러 괴롭히지 마.”

“네가 그런 얘길 하면 난 저놈을 죽을 때까지 괴롭히고 싶어져.”

“하지 마.”

“치.”

“그리고 이즈 너도.”

“나, 왜?”

천연덕스럽게 굴지만 여기서 제일 조심해야 할 요주의 인물. 태리는 이즈가 호시탐탐 클로드를 살인할 기회를 엿보며 각을 재고 있었다는 걸 일찍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저 음침한 NPC로부터 반드시 클로드를 지켜 내야만 했다.

“내키는 대로 굴 생각 말고. 무슨 생각 하는지 다 보이거든.”

“내 생각이 보여?”

도깨비불 같은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여기 공주는 참 재미있는 말을 잘 한단 말이야. 요새 인간 공주는 다 이러나?”

“해코지할 생각 말라고.”

“내가 누구한테 뭘 했어? 하고 싶어도 안 했지. 했으면 끽하고 누구 하나 저세상으로 보냈지.”

길고 아름다운 손날로 자신의 목을 쓱 그으며 음산하게도 입꼬리를 올린다.

역시나. 저놈은 저럴 생각이었다. 틈만 보이면 어떻게든 주인공을 칼로 쑤셔 보려고.

시한폭탄을 한 세 개쯤은 안고 있는 것 같다. 태리는 마른 볏짚처럼 타는 속내를 애써 잠재우며 그의 앞으로 다가가 경고하듯 딱 잘라 말했다.

“죽이지 마, 알겠어? 죽이면 안 돼, 절대로.”

절대로 안 된다고? 명령조에 가까운 당부가 우습다는 듯 이즈리얼이 한쪽 눈썹을 삐죽하고 장난스럽게 치켜올렸다.

“그래, 뭐. 나도 당장은 계획 없어.”

솔직히 한 방에 자를 수 있을 만한 놈이었으면 그녀가 말하기도 전에 벌써 푹찍 하고 끝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즈는 클로드가 생각만큼 만만치 않다는 것을 이미 알아차린 뒤였다. 빈손으로 서 있는데도 검을 쥔 것처럼 보였고, 아무런 방비 없이 등을 노출했는데도 기습할 만한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칼 좀 치는 놈이잖아. 난 병신이 아니라고.’

첫 만남에 이만큼이나 잔상을 남기는 인간은 별로 없는데 여기 오고부터 벌써 두 명이나 이런 인간을 만난 거다.

첫 번째는 묘하게 인생을 달관한 듯한 이 공주가 그랬고, 두 번째는 겁대가리도 없이 선빵을 날린 이 녀석.

“어이.”

그가 냉기를 풀풀 뿌리는 클로드에게 가지런한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예쁘지만 따라 웃기는 좀 그런 섬뜩함을 담고.

“이렇게 서로 간에 살인 충동이 드는 것도 다 인연이지. 먹고살려고 진료소 하나 굴리고 있는데 다치면 와라. 내가 이래 보여도 터진 동맥도 잘 묶고 배도 싹싹 잘 가르거든.”

오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그러나 클로드는 대꾸 없이 노려볼 뿐 호응해 주지 않았다. 여기서 그가 사람 취급을 하고 있는 건 오직 태리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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