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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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던 열정이 솟아났던 태리를 좇아, 클로드에게도 없었던 의지가 불타올랐다. 

“운이 좋군, 브리지테 듀이. 오늘 네 머리가 따일 참이었는데 공주님 덕에 그 하찮은 목숨 부지해 가는 줄 알아라.”

“뭐라는 거야. 이 미친놈이?”

“네가 공주님의 유년 시절의 추억이라면 머리 정돈 목에 붙여 둬야지. 아쉽지만.”

“추억은 무슨 추억이야. 맨 뒷줄에서 뒤통수 보고 서 있었던 기억밖에 없는데.”

“그러니까 말이다. 평생 감사해하며 간직해야 할 추억 아닌가? 오늘의 널 구했으니.”

“아하, 그래? 그럼 그런 추억 쪼가리도 없는 넌 오늘 여기서 꼴까닥 뒤지실 운명 아닐까? 머리에 검밖에 안 든 깡패 자식이, 너야말로 모가지 관리 잘 해. 알아들어?!”

둘이서 기 싸움을 벌이며 살기를 퍼트린 탓에 풀어지나 싶었던 분위기는 도로 급속 냉동이 되어 버렸다.

사이가 안 좋다더니 그냥 안 좋은 게 아니라 서로의 죽음을 바랄 정도로 안 좋은 사이였던 모양이다.

말뿐이었음에도 싸움은 피와 살이 튈 것처럼 강렬했다.

브리짓의 도발을 낮은 웃음으로 무시한 클로드는 그 사이에서 멀뚱히 서 있는 태리를 보더니, 불쑥 그녀의 어깨를 감싸 은근히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곤 보란 듯이 브리짓의 과거 행실에 대해 낱낱이 일러바쳤다.

“공주님, 옛정에 마음이 약해져 이런 자와 어울려선 안 됩니다. 이 여자는 사사건건 제가 하는 일에 훼방을 놓고 저를 여러 번 독살하려고 했던 흉악범입니다.”

“……브리짓, 너 이 사람한테 독을 먹였어?”

처리해 버릴 거란 소리는 홧김에 떠드는 허풍인 줄로만 알았더니 진짜 주인공의 독살을 시도했었다니? 태리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고자 주제에 감히 친구 사이를 이간질하는 간잽이 짓을 해?”

브리짓은 그 즉시 하악질을 하는 맹수처럼 손톱을 세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인의 범죄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되레 입가를 조커처럼 찢으며 자신이 그랬노라고 당당히 자백했다.

“그래, 자꾸 승질나게 해서 그랬어. 미운 놈 잘 되는 꼴 못 보는 건 자연의 섭리 아냐? 먹고 뒤지라고 해! 고자는 우리 땅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다. 알겠어?”

정말 대단한 인성과 결단력이 아닐 수 없다. 한편으론 존경심이 들기도, 또 한편으론 염려가 되기도 할 정도로.

일단 전진하면 노빠꾸인 듯한데 상대는 이 세계의 주인공으로 낙점된 인물이 아닌가.

결국엔 싸워 봤자 패배일 뿐이라 태리는 그런 브리짓이 걱정됐다.

“이, 일단 그러지 말아 봐.”

“이미 저질렀는걸?”

“그러니까 앞으로 그러지 말아 보라고.”

“괜찮아, 겁먹을 필요 없어. 난 그냥 저 양아치에게 차를 선물했을 뿐이니까.”

“예, 저 여자는 제게 차를 보냈습니다. 독약을 넣은 차를 곱게도 포장해서 보냈죠.”

“봐, 그것뿐이라고. 특별하게 한 건 없어. 세상에 치명적인 독이란 얼마든지 있는 거고, 약한 자는 살아남을 수 없는 게 인생이란 거 아냐? 먹고 못 버티면 죽는 거지. 그게 내 잘못이야? 허약해서 못 버틴 지 잘못이지. 그러게 강했어야지?”

무슨 그런 위험한 인생관이 다 있나 했는데 으르렁대며 이빨을 보인 둘에게는 그쯤이야 기본으로 깔린 가정이었는지, 클로드는 그 점에 대해 퍽이나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보낸 독은 제가 다 마셨고 모두 이겨 냈습니다. 간혹 열이 끓어오르고 기력이 떨어진 적은 있었지만 채 사흘을 못 가더군요. 간지러운 수준이었습니다.”

“그건…… 죽을 뻔한 고비를 여러 번 넘긴 거예요.”

“그렇습니까.”

“위기의식을 가져야 되는 거라고요.”

독약 한 사발 드링킹 하고 살아남은 게 무슨 무용담인 줄 아나. 뭘 자랑처럼 얘기하는 거야.

그러나 브리짓에게는 확실히 자극이 되었던 듯, 본인의 생존을 트로피처럼 과시하는 클로드에게 그녀가 이를 악물고 들이받았다.

“몇 번 살아남은 거 가지고 기세등등한 모양인데 두고 보라고. 내가 선물한 것 중엔 잠복기가 긴 녀석들도 있으니까. 골골대면서 유병장수하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느끼게 될 거다!”

“쓸데없는 고집.”

“이게 왜 쓸데없어? 마법사라면 억압에 저항해야지. 굴복하지 말아야지. 그래, 죽지 말고 열심히 살아 봐. 넌 내 손으로 반드시 끝장내 준다.”

여지없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저주의 호통들이다. 그러나 클로드는 싹 무시하고 아까처럼 태리만을 보며 유창한 말솜씨로 고자질했다.

“들으셨습니까? 왜 멀리해야 하는 여자인지 이해가 되셨겠죠. 정체도 수상합니다. 찻집 주인이라기엔 독에 대해 지나치게 해박하고 잘 다루죠. 그 찻집을 뒤져 봤어야 했는데……. 아, 어차피 이제 가게가 망해 버려서 할 필요가 없나?”

말끝에 보이지 않는 이모티콘으로 ‘ㅎㅎ’가 붙어 있는 것 같다. 사람 정말 잘 약 올린다는 한숨이 나오면서도 동시의 눈썰미가 매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과 약은 어찌 보면 한 끗 차이라. 이대로 두면 미래에 역병의사로 성장할 브리짓이 독에 관해 박식한 건 그녀에 관한 중요한 힌트가 될 수 있었다.

클로드가 다시 한번 철저히 친구 단속을 시켰다.

“저런 독방구와는 어울리지 마십시오.”

“아악! 얻다 대고 독방구야!”

왱왈왱알에 이어 새롭게 튄 독방구란 불꽃은 다시 서로를 찢어 죽일 듯한 크기로 커져 간다.

이대로 놔두면 여기서 일대일 전투라도 치를 것 같은 기세라 태리는 우선 손에 잡히는 대로 클로드의 옷자락부터 꽉 붙들고 못 움직이게 했다.

“제발. 브리짓을 너무 자극하지 마세요.”

“언제나 그러려고 노력합니다만 협조를 하지 않는 건 저쪽입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주의해 보도록 하죠.”

착실하게 대답은 하는데 속뜻은 꼭 이렇다. 아, 난 착하게 살려고 하는데 쟤가 자꾸만 날 나쁜 녀석으로 만든다니까?

그래 봤자 서로 오십보백보라는 걸 모르는 건가. 태리는 빠르게 두뇌를 회전해 단순히 그를 만류하기보단 대화의 주제를 틀어 관심을 아예 다른 곳으로 유도하기로 했다.

“인사가 늦었지만 도와줘서 고마웠어요.”

비록 지금은 새로운 분란을 만들고 있지만, 좀 전의 클로드는 난동을 피운 남자들을 깡그리 추방함으로써 그녀에게 불리했을 법한 상황을 단칼에 종결 내 주었다.

예의를 알고 사리 분별을 잘했다기보단 상황 판단 능력이 탁월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그가 남자들의 손을 들어 주었다면 오늘 일은 단순 마찰로 끝나지 않고 토착 세력과 이주 세력 간의 거대한 대립으로 번졌을 가능성이 컸으니.

당장 전쟁을 원하는 게 아니라면 일을 키워선 안 됐을 것이다. 태리가 바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소란을 피울 생각은 없었어요. 버릇없는 자들에겐 미안하지 않지만 그렇게 일이 커진 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그리고 바닥은…… 어떻게든 변상해 볼게요.”

“아닙니다, 그냥 두십시오. 교만을 떤 자들이 알아서 메워 놓을 겁니다. 그런 인간들을 대신해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지만 발로란을 대신하여 정중히 사과드리겠습니다.”

사죄의 의미로 클로드는 그녀가 원하면 문제의 남자들을 찾아내 눈앞에 대령하겠다고도 말했다. 말만 하면 당장 10분 안에도 끌고 올 수 있으니 더 강력한 처벌을 원한다면 그렇게 하라고.

“왕족의 위엄을 훼손한 죄는 가볍지 않으니까요.”

위엄이라, 그러고 보니 돌이켜 보면 심하게 불쾌한 상황이었지. 캐릭터를 생생하게 조지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장치를 두었을까?

진짜 공주였다면 심리적인 타격도 컸을 테고 무엄한 인간들을 마냥 눈감고 용서하며 넘어가긴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공주가 아닌 태리는 그 정도로 자기 역할에 몰입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외출을 결정한 순간 일찍부터 각오하기도 한 부분이고.

밖에서도 호텔 안에서의 환대를 기대해선 안 된다는 것. 자신은 오직 그 안에서만 공주로서 존중받을 뿐이라는 것.

브리짓은 신분만은 영원한 것이라며 이곳에 데려왔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내리막길에 서 있는 공주에게 신분이란 불변의 속성이 아니다.

‘조금 더 감정을 아껴 둬야겠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인데 빙의 생활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얼마나 더 많이 오늘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될까. 그때마다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행동해서는 엔딩까지 가는 시간을 늘리기만 할 뿐이다.

그래서 제안은 고맙지만 거절하겠다고 했다.

“아니요, 그런 것까진 괜찮아요. 경고는 할 만큼 했으니까. 그래도 사과해 줘서 고마워요.”

그럼에도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일에 그만한 사과를 받은 건 조금 감동적인 부분이라 진짜 착해, 라고 솔직한 생각을 덧붙이게 됐다. 역시 주인공은 주인공다운 것 같아서.

하지만 그걸 가까이에서 주워듣게 된 두 남녀의 표정은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착해? 내가?

이런 순수한 칭찬이 몇 살 때 이후로 처음이더라. 머리가 띵해진 클로드가 햇수를 세는 사이, 브리짓이 펄쩍대며 날뛰었다.

“돌았어? 어딜 봐서 이놈이 착하긴 착해?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는 말을 서슴없는 나불대는 녀석이라고! 입에 쓰레기까진 아니더라도 걸레 정돈 충분히 물려 있는데……! 근데 이 또라이가 왜 자꾸 네 앞에서 내숭을 떨지?”

얼른 네놈의 시꺼멓고 더러운 본성을 드러내라며 그녀는 클로드를 매섭게 다그쳤지만 그는 말끔해진 얼굴로 전혀 다른 말을 했다.

“관용은 고결한 덕망입니다. 싸구려 인간들에게 베풀기에는 아깝죠. 다음에도 이런 일이 생기면 억지로 참지 마시고 그냥 마음대로 하십시오.”

클로드는 여전히 자신을 보고 착하다고 하는 공주의 칭찬을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도 양심이란 게 있으니까.

하지만 그걸 나서서 아니라고 열심히 부정하기에는 뭐 굳이? 누군가가 나를 좋게 봐 주고 있는데 그 앞에서 초를 치며 죽일 놈 코스프레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 정도?

왠지 모르게 어깨에 슬쩍 힘이 들어갔다.

“다음에도 이렇게 해도 된다고요?”

“그걸 원하신다면.”

“아니, 난 공공장소에서 그렇게까지 말썽을 피울 생각이 없어요.”

앞으로는 자중해 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계속하라니. 아니, 그것도 더 하라니? 내가 그렇게 난봉꾼으로 비치는가 싶어서 태리는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총독은 오히려 나한테 참아 달라고 부탁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아닌데요.”

“어…… 왜죠?”

“이와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보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매번 관용을 베풀기는 어려우실 테고요. 저라면 그걸 그냥 참고 넘기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러더니 덧붙이는 말이 ‘죽이지만 마십시오.’라고 했고 잠시 후에 뭔가를 골똘히 생각해 보더니 ‘하지만 진짜 나쁜 놈들은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야 됩니다.’라고 또 다른 제한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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