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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이쯤 되니 이젠 브리짓을 말리는 게 아니라 지원을 해 주는 게 오늘의 역할에 더 걸맞은 모양새가 되었다.
‘서포터라.’
일반적으로 지원가란 공격수가 받은 피해를 치유하고 그 행동을 보조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하지만 일반을 넘어선 천상계급의 지원가라면?
‘단순히 피해를 치유해 주는 게 아니라 아예 피해받을 원인을 제거해 줄 수도 있어야겠지.’
그런 생각으로 가볍게 손바닥을 탁상에 내리치자 그 즉시 위에 올라와 있던 모든 기물들이 공중으로 떴다.
브리짓을 손가락질하며 난리를 피우던 남자는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을 보고 희게 질렸다.
와, 역시나 끝내주는 능력치. 광기로 흥하고 광기로 망한 왕국의 후예답게 간단한 퍼포먼스에도 결과는 상상을 초월했다.
‘마시던 잔 하나만 띄우려고 했던 건데 그냥 모든 물건들을 다 띄워 버렸네.’
계획을 웃도는 결과였지만 어쨌거나 이제 좀 만만하지 않은 공주가 되었을 것이다.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무시하지만 그 호랑이 입에 물려서 허리가 동강 난대도 여전히 그렇게 나불댈 수 있을지 궁금했다.
여기서 사릴지 아니면 더 덤벼 볼지 선택하라는 의미로 태리는 천 년 묵은 마법사 일족의 수장이 되어 은은한 미소로 경고했다.
“화가 나려고 하는데. 내 사람한테 함부로 대하지 말지.”
“마, 마법……!”
그래, 마법이다. 너희들에게 숱한 공포와 경외를 안겼던 그 부담스러운 힘.
태리는 남자가 잊고 지냈던 두려움을 되살려 주며 허공에 뜬 포크를 빙글빙글 가지고 놀았다.
“이만 물러나도록 해. 이 지경까지 와서도 내가 두렵지 않다면 그건 용맹한 게 아니라 무모한 거라고 생각하지 않나? 난 지금 자네가 분수를 지킬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있는 거야.”
상식이 통하는 자라면 여기서 물러설 것이고 그마저도 없는 인간이라면 인생은 실전이란 것을 배워 가게 될 것이다.
처음 시도해 본 이 마법의 괴력이 어디까지 미칠지 지금 시험해 보고 싶어서 손이 근질근질하니까.
“기사도를 모욕하는 그런…….”
“왜, 분하니 장갑을 던지고 대결이라도 청할 텐가? 왕녀에 대한 예의도 지키지 않는 기사에겐 명예로운 대결을 청할 자격이 없을 텐데.”
명분과 힘으로 무지막지하게 찍어 누르니 남자는 예상대로 어떠한 반격도 하지 못했다.
주변에서 모인 시선이 수치스러웠는지 그와 함께 온 무리들이 한둘씩 튀어나와 반발했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공주라 하셔도 황제 폐하의 은덕을 입지 않으셨습니까? 아비규환이었던 이 땅을 이나마 안정시킨 게 누구 덕이라고 여기시는 겁니까?”
“과거의 공주께선 여길 지키지 못하고 도망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나더러 발로란의 황제에게 감지덕지하며 조용히 입 다물란 뜻인가?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심보로 벼르고 있으려니 또 다른 놈이 나와 마법사들을 한꺼번에 싸잡아 힐난했다.
“고대부터 마법사란 족속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콧대만 높다 했지요. 그러니 이자리스가 신의 노여움을 산 겁니다!”
참 흥미로운 화두를 던진다. 방금 이들이 한 말은 모두 가스라이팅이다.
이제까지 계속 이런 식으로 이자리스인들을 괴롭혀 왔을 것이다. 과오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죄책감에 휩싸여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 미묘한 불균형이 이 염치없는 자들의 크기를 키웠다.
“괘씸하긴.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예……?”
“그래서 어쩌라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의 가스라이팅은 상대를 잘못 설정했다.
그런 얘기에 일일이 상처받을 만큼 태리는 섬세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공주 본인도 아닌 것을. 진짜 내 일도 아닌 이야기에 마음이 상해서 해야 할 말을 잊을 만큼 그녀는 세상을 덜 겪지 않았다.
“저주를 받았고 이자리스는 망가졌지. 그래서 그게 자네 인생을 망쳤나? 우리의 비극이 발로란에 어떠한 피해를 입히기라도?”
“그건―!”
“맞아, 나는 이곳을 지키지 못했지. 근데, 그래서? 내가 왜 그 일로 그쪽한테 미안해해야 하지? 나는 그 일에 크나큰 죄스러움을 느끼지만 그 대상이 너희는 아니다. 너희에게는 사과를 해야 할 만한 어떠한 실책도 한 적이 없다고.”
착각도 그 정도면 병 아닌가?
“너희는 정말 안 되겠다.”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상처를 헤집으려 한 수법, 아주 저열했고 잘 봤다. 그러니 이쪽은 그보다 더 강력하고 편리한 충격 요법을 쓸 것이다.
안시가 지팡이를 키웠던 모습에서 영감을 얻어, 태리는 공중에서 가지고 놀던 포크에 마나를 밀집해서 크기를 확대시켰다.
그런 뒤 대검 크기로 변한 그것을 남자들의 앞에 꽂는다는 느낌으로 그대로 하강시킨다.
하면서도 이게 될까 싶었는데 대리석 바닥에 삼지창이 꽂혀서 돌가루가 튀는 것을 보고 본인도 좀 놀랐다.
사방에서 여러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런 식으로 또 악명을 높이게 되네.’
머쓱했지만 여자가 칼을 뽑았으면 뭐라도 썰어야 되는 법.
마지막 쐐기를 박기 위해 팔걸이를 잡고 일어나자 타이밍 좋게 의자에서 삐걱대는 스산한 음률이 일었다.
그냥 일상적인 소음일 뿐인데 지금은 그마저도 공포가 되었다.
“나는 이자리스의 공주고 이 땅을 처음 밟은 소네티의 유일한 핏줄이다. 내가 이곳의 주인이란 소리야. 너희의 황제가 아니라. 그런데 나는 타국인에게 내 영토에서 이렇게 나댈 수 있을 만한 특권을 준 적이 없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너희가 잠깐이라도 구두를 신고 이 땅을 디딜 수 있는 건 모두 내 자비가 그것을 허용했기 때문이라는 걸 잊지 말도록.”
말하면서 작살 난 바닥을 신발코로 톡톡 치자 돌 부스러기가 섞인 작은 회오리가 일었다.
자연적이지 않은 현상이라 소름이 끼쳤는데, 나긋하고 조용한 협박은 그보다 더 파멸적인 예고를 던졌다.
“신시가지, 오는 길에 보니 꽤나 공들여서 잘 가꿨던데……. 한여름 밤의 꿈처럼 날려 버리는 거야 어려운 일도 아니거든. 실제로 한 번 해 본 거야 다들 알 테고. 그러니 괜히 자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게 나의 바람이다. 아직은 서로 불편한 이웃인 채로 지내보자고.”
행동력이 느껴질 만한 사건이 연달아 휘몰아쳤기 때문인지, 공갈 협박이었음에도 사람들의 눈에 비친 공주는 수틀리면 뭐라도 다 저지를 수 있는 여왕처럼 보였다.
겁을 집어삼킨 헐떡임이 오랫동안 공간을 장악하며 장중을 무겁게 짓누른다.
과도한 연기에 에너지를 쏟은 태리가 ‘아, 이제 그만 쉬고 싶다’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바란 대로 이루어지는 마법처럼 한순간에 홀 전체가 숨을 죽이는 것 같더니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못하는 사람들 틈에서 규칙적인 발소리가 울렸다.
다수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아 낸 남자는 두리번거리는 일조차 없이 여왕 같았던 공주를 향해 직선으로 걸어왔다.
“또 뵙습니다, 공주님.”
눈에 보이는 건 단추를 두어 개 풀어놓은 목깃과 바지 속에 대충 구겨 넣은 흰 셔츠, 그리고 손에 집히는 대로 걸치고 왔을 게 분명한 외투다.
그럼에도 다가오는 그에게서 느껴진 건 정복자의 냉정함 같은 분위기였다.
샹들리에 불빛이 날카로운 턱선을 타고 흐르더니, 그가 고개를 꺾어 벌벌 떨고 있는 놈들을 향해 예열도 없이 쏴 갈겼다.
“꺼져라.”
“초, 총독……님.”
“당장 꺼져. 더 처맞고 싶지 않으면.”
더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그가 출구를 가리키자 겁에 질린 남자들이 다리를 질질 끌며 도망치듯이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확실하게 확인한 클로드는 그제야 공주의 앞에서 손등을 청했다.
총독은 그냥 하던데? 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가 부드러운 손등에 댈 듯 말 듯이 입을 맞췄다.
“그러게요. 또 만나네요.”
남들에게야 어떻든 태리에게는 여전히 친애하는 주인공.
더불어 이 세계에서 유일한 구원자가 되어 줄 남자.
그녀가 친근한 미소를 보여 주자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에 일대에 파란이 일었다.
절대 어울리지 못할 거라고 여겼던 한 쌍이 나란히 세워 두니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그림이라서.
비록 진실은 각자의 마음속에 있었지만 그 그림만은 메리 해피 엔딩이었다.
* * *
찻집이 문을 닫은 것을 확인하고 날듯이 와인 바로 뛰어 들어왔던 클로드는 처음에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만약 이곳에도 공주가 없다면 쓸데없이 이목만 끌려서 말 많은 귀족들에게 붙잡힐 게 뻔했으니까.
하지만 들어선 순간 그 고민 자체가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를 대신해서 이미 모두의 주목을 받을 만한 존재가 만천하에 힘을 뿜어내고 있었으니.
보이지 않는 파장이 몰아쳤고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난무하더니 통속적인 드레스와 정장으로 가득 찬 공간 속에서 홀로 차분한 코트를 걸친 여자가 고독한 집행자처럼 일어서는 게 보였다.
― 괜히 자극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직은 서로 불편한 이웃인 채로 지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