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죽이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하지만 태리는 그 점에서 브리짓이 드러내라고 악다구니를 썼던 클로드의 본성의 일면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주인공 너, 엄청난 기분파구나?’
역시 츤데레 하면 또 기분파지. 두 속성의 궁합이 너무 잘 맞아서 놀라울 것도 없었다.
“기억해 둘게요.”
예의상 빼는 법도 없이 받았는데도 기분파 츤데레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그가 근처에 있는 아무나에게 손을 까닥이더니 무언가를 지시했다. 그 사람은 이곳에서 일하는 직원도 관계자도 그 무엇도 아니었지만 일은 잡음 없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소공작님.”
무슨 꿍꿍인가 싶었더니 돌아온 그가 청한 건 개인적인 면담이었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아, 그럼요. 당연히 괜찮죠.”
“따로 방을 내어 달라고 했으니 그쪽으로 이동하시죠.”
“그래요.”
탁 트인 곳에서 대화를 하기엔 불편하기도 하니, 태리는 의구심 없이 클로드가 내민 팔에 편하게 손을 걸쳤다.
젊은 남녀가 단독 공간으로 사라지는 걸 모두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관전하는데 홀로 활화산처럼 타오른 브리짓이 그 사이로 난입했다.
“미쳤어? 이놈이 뭔 짓을 할 줄 알고 단둘이 밀회야?”
무슨 일이 있어도 갈라놓겠다는 듯 그녀가 태리의 다른 쪽 손목을 낚아채 반대로 잡아끌자, 클로드가 노골적으로 짜증을 내며 그것을 강하게 쳐 냈다.
“적당히 끼어들지.”
“끼어드는 건 내가 아니라 너겠지. 얘는 내 친구야! 네 공주가 아니고 우리 공주라고! 간덩이가 부었어도 어떻게 내 앞에서 가로채려고 해? 진짜 오늘 당장 죽고 싶어? 내가 못 할 거 같아? 나는 말이야, 눈에 뵈는 게 없는 사람이야!”
“눈에 뵈는 게 없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제정신도 없고 분별력도 떨어지는 것 같군. 공주님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그가 제 쪽으로 태리의 팔을 와락 끌어당겼고 덕분에 태리는 둘 사이에서 대롱대롱 매달리는 신세가 되었다.
“피곤하게 굴지 말고 좀 꺼지지 그래.”
“닥치고 그 손이나 놔.”
“공주님께 예의에 어긋나는 그 어떠한 짓거리도 하지 않아.”
“사내새끼들 말을 어떻게 믿어? 네가 아무리 고자라도 말이야.”
“몇 번을 말하지만 나는 사지 멀쩡한 성인 남성이고 내 몸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흥, 그럼 그 멀쩡한 팔다리 자르고 가시든가.”
“네가 보호자라도 되나? 왜 못 만나게 하는데.”
“너라면 만나게 두겠어?”
“내가 뭐가 부족해서?”
“부족하지! 한참! 어디 옆 동네 양아치가 감히 우리 공주님을 넘봐? 이게 말이나 돼? 잔말 말고 손 떼!”
유치하게 왜들 이러는지. 태리는 너희들 사이에 껴서 자신이 지금 몹시 불편하다는 티를 팍팍 냈다.
살다 보면 별일이 다 있다고 누군가가 자신을 두고 서로 쟁취(?)하겠다고 싸우는 희한한 상황을 다 겪게 된다.
그런데 그 경험이 흥미진진하긴커녕 팔만 아파 죽겠다. 그녀가 양팔을 동시에 비틀어 둘 모두에게서 빠져나가려고 하자 실핏줄이 나갈 정도로 눈싸움을 벌이던 브리짓이 어금니를 박박 갈며 소리쳤다.
“나야, 얘야? 선택해!”
뭘 선택해?
왜 너희들의 어마어마한 고래 싸움에 새우같이 작고 소중한 내 등을 터트리려고 하는 건데.
태리는 도와 달라는 눈빛으로 클로드에게 위급 신호를 보냈지만 고래는 새우의 마음 따위는 쥐뿔도 몰랐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군요. 저 미친 여자에게 자기 주제를 알려 주고 얼른 썩 떼어 내 버리시죠.”
……이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주인공이라곤 정말 요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구나.
어느덧 와인 바에는 태리가 깔아 두었던 공포심은 깨끗하게 사라져 버리고 오직 흥분으로 가득 찬 관중들만이 가득해졌다.
둘 다 패배에 승복하지 못하는 타입이니 이 둘 중 누구를 선택해도 지뢰를 밟게 되는 건 똑같은 결과일 거다.
그것을 직감한 태리는 그만 선 채로 외치고 싶어졌다.
아, 제발 친하게 좀 지내자고.
* * *
‘보모가 따로 없군.’
클로드는 공주가 브리짓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성심성의껏 이야기하며 설득하는 꼴을 팔짱 끼고 지켜보았다.
저기서 뭐라도 먹고 있어, 여기 있는 돈 다 써도 돼, 라며 금화가 든 주머니를 쥐여주는 것도 보았고 씩씩대며 들썩이는 등을 여러 번 다독이는 손길도 포착했다. 그러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방해꾼을 납득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간신히 납득만 한 브리짓이 욱여 잡고 있던 공주의 손목을 풀어 주자마자 클로드는 곧바로 그녀를 낚아채 방으로 향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쫓아오는 브리짓은 전처럼 둘을 갈라놓지 못하고 눈만 불태우고 있었고, 훼방꾼을 밀쳐 두고 문을 닫게 되는 상황 속에서 클로드는 굉장한 기분이 들었다.
뭘까, 이게. 단순히 이겼다……는 아닌데.
상식이 부재한 여자에게서 공주를 지켜 냈다는 뿌듯함? 기어코 원하는 것을 얻어 냈다는 쟁취감? 아닌데.
문이 닫히기 직전까지 살벌하게 눈싸움을 벌이며 복잡한 생각을 이어 가던 그는 밀실이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는 순간, 모든 잡념을 젖혀 두고 가장 급한 말부터 뱉었다.
“저는.”
“……?”
“저는 고자가 아닙니다.”
* * *
저는 고자가 아닙니다, 라니.
미친.
이런 미친놈.
거름망을 조금도 거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문장을 던지고 난 후 클로드는 1초도 지나지 않아서 바로 후회했다. 스스로를 향해 욕을 퍼부으면서.
정신 나간 놈 같으니라고. 꼭 그렇게 말을 했어야만 했나. 조금 더 잘 가꿔진 표현에 교양적인 어휘가 있지 않았을까. 내뱉기 전에 한 번만 생각해 볼 걸 왜 급하게 말부터 튀어 나가서는…….
혀를 씹을 수 없는 대신 그는 자기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런 건 굳이 해명 안 해도 되는데.”
“저는 정상적인……”
“아니 아니, 해명 안 해도 사실이 아닌 거 안다는 소리예요. 당연히 아니겠죠. 헛소문 때문에 마음고생을 했나 봐요. 총독이 정상적인 남성인 거 세상이 두 쪽 나더라도 믿어요. 그러니까 괜한 걱정 안 해도 돼요.”
주변 이들조차도 ‘너 혹시?’ 하면서 의혹을 제기하는 점을 공주는 일말의 의심조차도 없이 절대적으로 믿는다고 약속해 줬다.
나를 그렇게까지 믿어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그 정도로 안타까워 보이냐고 빈정거려야 하는 건지 클로드는 애매한 상태로 서서 망설였지만 그럼에도 한결 안심해 버렸다.
말이 없어도 그의 표정에서 비슷한 메시지를 읽었는지 공주는 가볍게 웃어 보이곤 먼저 등을 돌려 방을 두리번대며 구경했다.
‘왜 저렇게 겁이 없는 거야.’
참 쉽게도 믿어 주고 마찬가지로 또 쉽게 등을 보여 준다. 클로드는 그것이 그를 편하게 생각해서 나온 행동이라곤 조금도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따질 수 있는 상황이라곤 그저 자신은 분명히 눈앞의 공주를 해칠 수 있는 입장이며 그럴 만한 이해관계도 충분한 사람이라는 것뿐.
공주가 제자리를 되찾으면 닭 쫓던 개가 되어 아무런 소득도 없이 빈손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은 본인이었으니.
그냥 여기서 깔끔하게…… 따위의 희박한 계획으로 사고가 빠지려던 찰나, 편안하고 맑은 목소리가 허튼 망상을 깨트렸다.
“나 여기 있는 거 알고 온 거죠?”
먼저 창가의 테이블이 자리를 잡은 그녀가 앉으라고 손짓하며 말했다.
“내가 수상한 짓이라도 할까 봐 신경 쓰였나 봐요. 결과적으론 총독이 와 줘서 더 다행이었지만요.”
시킨 대로 얌전히 착석하다가 클로드는 속으로 뜨끔했다. 남의 속내를 불쑥 찌른 주제에 그를 바라보는 여자의 시선은 잔잔한 바람을 쐬는 사람처럼 흔들림도 없이 평온했다.
“결과적으로 그랬다면 됐습니다.”
“거짓말 같은 것도 잘 못하나 봐요. 정직한 사람은 대체로 좋은 사람이던데.”
아니, 왜 자꾸 나한테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건가. 잠깐이긴 했지만 방금도 당신한테 어떤 못된 짓을 할까 고민했건만.
쓸데없이 술렁이는 가슴이 짜증 나서 일부러 말의 꼬투리를 잡았다.
“정직해 보이니 제게 정당한 승부라도 기대하십니까?”
“아니요, 나는 싸울 마음이 없는데요?”
“의외로 제가 대단한 사기꾼일 수도 있습니다. 단정한 겉치레 뒤로 상상도 못 하는 끔찍한 비밀을 감추고 있을 수도 있죠. 또 인성도 더럽고 성격까지 개차반일 수도 있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습니다.”
네가 몰라서 그렇지 사실 내가 천하의 개종자에 개쓰레기이니 제발 겁 좀 먹으라고 목소리까지 잔뜩 깔고 이야기했다.
그런데도 표정을 보니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오히려 공주는 그에게 충고까지 했다.
“나쁜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럼 자신한테 그런 중대한 비밀이 있다고 함부로 말해선 안 돼요. 나라면 절대 말 안 해요. 꽁꽁 숨기고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도 티 내지도 않는 거죠.”
“비밀이 있습니까?”
왠지 있는 것 같아서 덥석 물어보니, 순진한 양을 보는 듯한 귀여운 코 찡그림과 눈가에 살짝 맺힌 쓴 미소가 되돌아왔다.
“아니, 라고 말해야겠죠.”
저렇게 반응하니 어떤 쪽이 진실인지 헷갈린다. 클로드는 한층 더 심각해져서 복잡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에 반해 공주는 테이블에 마련된 와인과 간식을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쿠키를 하나 집어서 오도독 베어 먹고 포크로 케이크를 크게 잘라 앙 하고 삼켰다.
이거 한 입, 저거 한 입, 와인 두 모금 야금야금 냠냠대며 맛있게도 먹어 치운다. 도토리를 갉아 먹는 다람쥐처럼 양손에 잡고 참 잘도 먹는다 싶어서 빤히 쳐다봤는데 그의 시선을 느낀 그녀가 갸웃하더니 무릎에 두고 먹던 디저트 바구니를 그쪽으로 밀었다.
“같이 먹을래요?”
특별히 먹고 싶어서 쳐다본 건 아닌데.
하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달게 느껴지는 초콜릿 냄새에 클로드는 그제야 자신이 지금까지 내내 공복 상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늦게 일어나서 차려진 밥도 집어 던지고 여기까지 발에 땀 나게 뛰어왔으니.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그는 가장 작은 초콜릿 한 알을 집어서 입에 넣었다. 그리고 어금니로 와작대며 씹었는데 웁, 하고 미간을 구겼다.
‘맛없어.’
맛없다. 씹자마자 뭘 하고 싶지가 않다. 초콜릿 속에는 말린 과일과 함께 술이 섞여 있었다. 술을 먹지 못하는 그로선 고역이라 거기서 더 씹지 못하고 그냥 꿀꺽 삼켜야만 했다.
‘이런 게 맛있나?’
그러고 보니 음식 솜씨가 최악인 건 그 호텔도 만만치 않던데. 클로드는 새삼 공주가 그곳에서 뭘 먹고 지낼 수는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