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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120/161)

120화

‘저게 가능하단 말야……?’

시체를 더없이 손쉽게 처리하는 이안을 보며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공간을 저렇게까지 자유자재로 사용한다는 건, 저 나이에 벌써 신성력을 최대치로 운용할 줄 안다는 이야기였다.

‘신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이안 에스테반을 설명할 때면 단골로 출연하던 수식어가 자동으로 떠올랐다.

‘……아니. 아니지.’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신이 정말 이안을 사랑했다면, 오늘 같은 일을 겪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체들을 처리한 이안은 그다음 숲에 불을 질렀다. 적들의 피로 물든 풀잎들이 불길에 삼켜졌다.

“불이야! 불!”

“비상! 비상!”

결계도 효력을 다했는지, 그제야 서궁에서 일어난 일이 황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경악에 찬 외침들을 뒤로하며 나와 이안은 서둘러 황궁을 빠져나왔다. 선황의 몸도 아공간 안에 넣은 덕에 몸을 움직이기가 훨씬 수월했다.

“당신, 은…… 먼저 가.”

황궁 외벽에 거의 가까워졌을 때쯤 이안이 말했다.

당장 함께 황궁을 벗어나야 하는 상황에 이게 무슨 말일까.

이안을 돌아본 나는 깜짝 놀라 굳어 버렸다. 이안이 울컥 올라온 핏덩이를 뱉어 내고 있었다.

“괜찮아요?!”

물으면서도 괜찮을 리가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땅에 떨어진 핏덩이가 검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으니까.

“독에 당한 거구나. 그렇죠?”

“괜찮아. 이 정도는.”

핏덩이를 구두 밑창으로 문질러 흔적을 지우며 이안이 말했다.

나는 그의 목소리가 열에 들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여기서부턴 따로 움직여. 이대로라면 당신도 위험해질-”

“다 죽어 가는 꼴을 하고선 무슨 소리예요!”

나는 화가 나서 외쳤다.

“당장 치유사에게 가야 해요. 독에 완전히 중독돼 있잖아요, 당신! 근처에 있는 치유사를 빨리 찾아서-”

“안 돼.”

이안이 내 손목을 덥석 쥐었다.

“만약 정말, ……가 범인이라면.”

이안의 목소리가 순간 흐려졌다.

아직 차마 제 형이 선황 살해를 시주한 범인이라고 완전히 확신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당연한 일이었기에 그를 탓할 수는 없었다. 현재 이안이 가진 증거는 괴한의 말이 전부였으니까.

“그렇다면, 지금은 제국 전체가 내 적이니까. ……한 군데만 빼고.”

무언가를 떠올린 듯 이안이 입술을 달싹였다.

“……대성당으로 가자.”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성당은 수도에서 황제의 입김이 유일하게 닿지 않는 곳. 지금 같은 때에 몸을 숨기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장소였다.

후드를 뒤집어쓴 덕분인지 거리를 돌아다녀도 우리에게 딱히 수상한 시선이 꽂히는 일은 없었다. 덕분에 대성당까지는 수월히 이동할 수 있었다.

대성당에 도착한 이안은 거침없이 예배당을 향해 나아갔다. 겉보기에는 전혀 독에 중독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예배를 드리고 있던 주교가 제게 다가오는 나와 이안을 보곤 의아한 눈을 했다.

“안녕하세요, 형제자매님들. 제가 도와드릴 게 있겠습니까?”

이안은 주교에게 낮은 목소리로 무어라 속삭였다. 주교의 눈이 커다래졌다.

“추기경 성하께선 지금 수도를 비우신 상태지만, 방을 내어드리겠습니다.”

‘이때도 이안은 이미 추기경과 아는 사이였구나.’

하긴. 추기경께서 편찮으시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의 이안을 생각해 보면, 많이 막역한 사이 같기는 했다. 그것도 꽤 오래된.

주교는 이안에게 성당 깊숙한 곳의 비어 있는 방을 내어주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이안은 죽은 듯 잠에 빠져들었다.

정말 죽어 버린 건 아닐까 덜컥 불안해진 내가 몇 번이나 맥박을 확인해 볼 만큼.

‘살아 있는 거, 맞지?’

핏기 가신 이안의 얼굴은 밀랍처럼 새하얬다. 간혹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얕은 숨만이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그 상태로 몇 번의 달이 뜨고, 또 해가 졌다.

성당의 치유사들이 방문해 도통 일어나지 못하는 이안을 진단했다.

“독 자체는 몸이 자체적으로 정화하고 있지만, 문제는 환자님의 마음입니다.”

치유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심적 충격이 이분을 금세 깨어나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나는 착잡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너무 어린 소년이 겪기엔 지나치게 충격적인 일들이었을 테니까. 아니, 어른이 겪었어도 마찬가지로 몸져누웠을 것이다.

심적 충격이 문제라면 최선의 약은 시간이었다. 기다리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으니까. 리젤로가 데려다준 이 세계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조금 흐려진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치유사들은 내 존재를 아예 인식하지 못했다. 몸이 이렇게 반투명한 유령처럼 변하기 시작한 순간부터였다.

곧 나는 이 마법에서 깨어나게 된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떠오른 감정은, 안도가 아닌 걱정이었다.

‘내가 사라지면, 이안은.’

이안은 이 적막한 방에서 혼자가 된다.

머지않아 깨어날 그를 맞아 줄 사람 역시 아무도 없을 터였다.

“일어나요. 이제.”

나는 잠든 이안의 귓가에 속삭였다.

“치유사들은 앞으로 한 달은 더 있어야 깨어날 수 있을 거라고 했지만, 그보다 더 일찍 털고 일어날 수 있죠? 당신은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강한 사람이니까.”

“…….”

“그러니까 이제 그만 일어나요. 부인을 너무 오래 독수공방시키는 건 이혼 사유예요.”

혼잣말 같은 속삭임을 마칠 무렵,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안의 눈꺼풀이 서서히 열린 것이다.

“정신이 들어요?”

나는 다급히 물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정신 차린 이안의 표정이 몹시 기묘했다.

아무래도 내가 방금 속삭인 말을 들은 것 같았다.

“……부인?”

“아.”

나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잠에 취한 네가 잘못 들은 거라고 우길까.

“그런 말 안 했는데요. 그보다 좀 괜찮아요?”

“아니, 분명히 들었는데.”

이안이 중얼거렸다. 잔뜩 잠긴 목소리로.

소년 태가 완연히 나던 목소리가 낮게 잠기자, 내가 알고 있는 이안의 목소리와 꽤 비슷해졌다. 나도 모르게 피부로 오싹한 소름이 내달렸다.

이안이 찌푸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은 도대체…… 정체가 뭐야.”

그렇게 묻는 이안은 몹시 혼란스러워 보였다.

하긴, 지금으로선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겠지. 이성이란 존재엔 관심도 없는 제가, 다 커서는 가짜로나마 결혼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진한 키스까지 선보이는 인간으로 자라나리란 것은.

‘생각보다 상당히 문란한 어른으로 자라난다고, 너.’

아직 어리고 덜 여문 이안을 내려다보며 나는 속으로나마 그를 놀렸다.

그때였다. 내 몸이 완전히 투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당신……?!”

경악으로 물드는 이안을 마주하며 나는 서서히 의식이 저무는 것을 느꼈다.

시야가 꺼지기 직전, 나는 내 몸이 완전히 사라진 뒤 아무도 없는 방에 홀로 남은 이안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있던 자리의 허공을 홀린 듯 더듬는 이안을.

그 모습이 지나치게 쓸쓸해 보여서일까?

커다란 구멍이 뚫린 듯 심장이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 * *

“……헉.”

벅찬 소리와 함께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오랫동안 잠수해 있다가 뭍으로 나온 듯한 해방감이 들었다.

“깨어나셨군요!”

리젤로의 목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최면이 아니라 마치 진짜 과거를 되짚고 온 기분이었다. 최면 마법의 후유증이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나는 울렁거리는 가슴께를 짚었다.

“대체…….”

나는 혼란스레 중얼거렸다.

아직 현실감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어린 이안의 곁을 지키던 그때가 내 현실 같았다. 내가 사라진 허공을 짚던 이안이 바로 곁에 있을 것 같았다.

“대체…… 제 머리에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그냥 이안 님의 과거만 들여다보는 건 줄 알았는데, 실제로 시간 이동을 한 기분이었다고요.”

횡설수설하며 나는 내 가슴께를 짚어 보았다.

뻥 뚫린 듯한 상실감에 견디기 힘들 만큼 가슴이 시렸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이안의 모습이 잊히질 않았다. 망막에 새겨진 듯 그 마지막 모습이 자꾸 되풀이되었다.

그저 최면이 보여 준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가 그를 혼자 두고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후유증이 심해 보이시는군요. 그렇게까지 현실감이 강했나요?”

리젤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하군요. 최면이 그렇게까지 강했다니. 성마석 때문인가…… 당연한 얘기지만, 고객님께선 그저 일종의 꿈을 꾸다 깨어나신 겁니다. 이안 님의 과거를 배경으로 한 환상을 함께 공유한 거죠.”

“공유…….”

나는 그 말을 멍하니 되풀이했다.

‘이안 역시 내가 겪은 그 모든 환상을 함께 공유했던 거라고?’

그렇다면, 이안도 기억하고 있는 걸까?

내가 소년 시절의 자기 자신과 함께 있었던 그 시간들을?

“두 분이 과거를 여행하는 동안, 저도 복원 마법을 성공적으로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고객님께서 몸 바쳐 노력해 주신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됐어요.”

“정말인가요?”

그래. 그러고 보니 이 모든 환상의 목적은 그것이었다. 복원 마법.

리젤로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제 조금만 더 동기화가 진행되면 복원이 완료돼요.”

“그건 정말 반가운 이야기긴 한데…….”

왜 이 반가운 소식을 듣는 것이 나 혼자뿐인 걸까?

그제야 나는 거기 생각이 미쳤다.

“……이안.”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안 님은 지금 어디에 있죠?”

왜 내 옆에 없는 거지?

“몇 분 먼저 깨어나셨습니다. 지금은 이 자리에 안 계시고요.”

“여기 없다고? 그럼 어디에 있는데요?”

당황한 나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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