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이안의 시선이 시체 위를 더듬었다.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 손등의 흉터, 황족임을 상징하는 보라색 의복.
시체의 주인이 제 아버지라는 증거를 확인할 때마다 이안의 눈빛에서 희망이 사라져 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차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원작에서는 이 모습이, 단 한 줄로만 서술되었었단 말이야.’
이안 에스테반은 제 아버지의 죽음 뒤 숨겨진 진실을 알고 있다.
이것이 원작에서 서술된 전부였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그때 이안의 표정이 어땠는지, 심정은 또 어떠했는지.
그런 면에 대해서는 전혀 묘사된 바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안이 무너지는 지금 이 순간에 대한 면역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이안.’
눈에서 빛이 꺼져 버린 이안을 안아 주고 싶었다. 서툴게나마 위로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를 끌어내야 했다.
“몸을 피해야 해요.”
“…….”
이안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시체 위를 계속해서 시선으로 더듬을 뿐. 마치 이 시체의 주인이 아버지가 아니라는 증거를 찾아내려는 듯이.
구우웅.
그때, 다시금 궁 전체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폭발 마법진이 다시 가동되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누군가 이 궁 안에 도착한 거야.’
도착해서, 제 동료들이 실패한 것을 보고 다시금 마법진을 가동한 거다.
일단 자리를 피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우리 둘 다 선황의 시체와 함께 산산조각 날 터였다.
“이안!”
그러나 이안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거칠게 그의 어깨를 잡아챘다.
“정신 차려! 당신은 살아 있잖아요!”
“…….”
그제야 이안의 푸른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인형처럼 무기질적인 눈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엿볼 수 없었다.
나는 꾹 입술을 깨물곤 다시금 외쳤다.
“당신이 여기 와 있단 사실은, 아직 아무도 몰라요. 아는 놈들은 방금 다 죽었잖아!”
“…….”
“그러니까 이대로 몸만 피한다면, 아무도 모르게 복수를 준비할 수 있어요. 이안. 들었어요? 그래야만 복수할 수 있다고요!”
내 말이 전해진 걸까.
그제야 이안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푸른 눈동자가 내 얼굴 위를 더듬었다. 마치 이제야 처음 나를 발견했다는 듯이.
“당신은…….”
“전하! 여기 계셨군요!”
그때 열린 문으로 하인츠 경이 달려 들어왔다.
“아래층에 적들이 침투했습니다! 얼른 몸을 피하셔야- 헉?!”
선황의 시체를 발견한 하인츠 경이 경악했다.
황급히 다가온 하인츠 경은, 이안과 같은 과정을 거쳐 시체의 주인이 선황임을 깨달았다.
“이, 이게 무슨. 대체 이게 무슨…….”
“경.”
“저, 전하. 폐하께서……?!”
“경!”
이안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 들어.”
하인츠 경의 어깨를 꾹 붙잡은 채 이안이 말했다. 그의 눈에는 어느새 총기가 완연히 돌아와 있었다.
“폐하를 업고 도망칠 거야.”
“저, 전하.”
“시체를 두고 갈 순 없어. 내가 업는 동안 창문의 봉인을 깨 줘.”
“……예, 예. 알겠습니다!”
억지로 혼란을 갈무리한 하인츠 경이 창문을 향해 달려갔다.
검이 창문을 거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법으로 조처를 해 둔 건지, 좀처럼 쉽게 깨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동안 이안은 선황의 시체를 제 등에 업었다.
동시에, 쨍그랑!
시원한 소리와 함께 하인츠 경이 외쳤다.
“깨뜨렸습니다!”
“가자.”
이안이 창문 너머를 노려보며 말했다.
선황을 등에 들쳐 멘 이안의 표정은 유령처럼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먼저 뛰어내려.”
“네, 넵.”
이안이 내게 명령했다. 나름의 레이디 퍼스트인 건지, 먼저 뛰어내릴 실험체가 필요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허겁지겁 창틀 위에 올라섰다. 다행히 창이 워낙 커서 올라서는 건 어렵지 않았다.
“흐, 흐으.”
땅을 내려다보자니 꽤나 아찔했다. 고작 이 층이라고는 하나 생각보다 높았다.
없던 고소 공포증이 올라올 지경이었지만,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뛰어내렸다.
‘교양 시간에 배웠던 낙법!’
1학점짜리 태권도 수업이 살면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윽!”
다행히 풀밭 위라 충격이 크진 않았다.
나는 다음으로 뛰어내릴 이안에게 깔리지 않도록 황급히 옆으로 굴렀다.
그러나 뒤이어 뛰어내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먼저 가십시오!”
대신, 이 층에서 하인츠 경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챙, 챙!
검끼리 부딪치는 소리 역시도.
‘무슨 일이지?!’
아무래도 일 층에 침투했다는 적들이 이 층까지 들이닥친 모양이었다.
“먼저 가셔야 합니다! 이자들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젠장.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현재 이안은 선황을 등에 업고 있는 상태였다. 당연히 전투력이 이전보다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서요!”
하인츠 경이 비명처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인츠 경의 말이 맞았다. 지금은 이안이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었다.
‘뛰어내려, 이안. 제발……!’
“젠장!”
거칠게 욕설을 내뱉은 이안이 창틀로 내달렸다.
그런 그를 적들이 막아섰다.
“죽여! 한 놈도 살아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이안과 하인츠 경에게로 맹공이 쏟아졌다.
“제가 막겠습니다!”
하인츠 경이 외쳤다.
“어서……! 더는 버티기 힘들 것 같습니다!”
“경!”
“제발 망설이지 마십시오. 살아남으시는 게 우선입니다!”
하인츠 경이 절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디 살아남으셔서, 진실을 밝혀 주십시오.”
마지막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내 귀가 들은 건지 이안이 들은 것을 공유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이안이 찰나 간 질끈 눈을 감는 것이 보였다.
‘제발.’
바람이 조금이나마 통한 걸까.
다음 순간 이안이 창문 아래로 뛰어내렸다.
새처럼 가볍게 낙하한 이안이 이 층을 올려다본 순간이었다.
쾅. 콰광!
쿠구궁!
귀청이 터질 만큼 요란한 폭발음이 들렸다.
그리고 시야가 시뻘겋게 물들었다.
“……피해!”
이안의 손이 내 팔을 낚아채듯 휘어잡았다.
우르르릉!
천둥이라도 치듯 거대한 굉음과 함께, 궁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붉은 폭발이 이곳저곳에서 연달아 일어났다. 강한 소리에 청각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하인츠 경은 어떻게 된 거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알 것 같았다. 저 폭발에서 살아남기란 불가능이었을 테니까.
오로지 생존 본능에 의지해 나는 폭발과 먼 방향으로 허겁지겁 달아났다. 내 손목을 쥔 이안이 빠르게 내달리고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이 와중에도 이안이 날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 놀라웠다.
달리면서 이안이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저기! 저기 목격자다!”
“죽여!”
날카로운 외침이 우리 뒤를 쫓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이안을 따라 달렸다. 황궁의 경계를 이루는 숲속 깊숙이, 더 깊숙이.
얼마나 그렇게 달렸을까.
숨이 턱 끝까지 닿아 더 이상은 달리지 못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든 순간이었다.
휘익!
날카로운 표창이 내 귀를 스쳐 나무에 박혔다. 나는 소스라쳐 숨을 멈췄다.
그걸 시작으로, 더 많은 암기가 우리를 덮쳤다.
“흑!”
종아리와 어깨로 섬뜩한 통증이 스쳤다. 표창 몇 개에 맞은 모양이었다.
“젠장.”
계속해서 달아나는 건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는지, 이안이 커다란 나무 뒤편에서 멈춰 섰다.
“숨어 있어.”
내게 그렇게 이른 이안이, 내내 업고 있던 제 아버지를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폐하를 부탁해.”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목 없는 시체의 곁을 지켰다.
다시금 아공간에서 성검을 뽑아 든 이안이, 한 번 숨을 고쳐 쉬곤 나무 뒤로 달려 나갔다.
‘제발.’
나는 간절히 기도하며 나무 뒤에 모습을 감췄다.
챙! 챙!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크억!”
“죽여! 목격자는 전부 처분해야 한다!”
“적은 고작 하나다! 한 명을 처리 못 해서…… 커헉!”
격렬한 전투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이렇게까지 소란스러운데 황궁 기사 한 명 달려오지 않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라시드가 손을 쓴 것이 분명했다. 일이 다 끝나기 전까지 서궁 근방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제발…….’
나무 뒤에서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무의미한 기도밖에 할 수 없는 처지가 분했다.
뼈저린 무력감을 느끼며 선황의 시체를 지킨 지 몇 분이나 지났을까.
“하아. ……하아.”
거친 숨소리가 이리로 가까워졌다.
나는 숨죽인 채 소리의 주인이 누구일지 알아내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안?’
“허억, 흐…….”
거세게 숨을 몰아쉬는 이 목소리는, 분명 이안의 것이 맞았다.
이전까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을 정도로 여유 없는 목소리였지만, 이안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나는 나무에서 뛰쳐나왔다.
“괜찮아요?! 많이 다쳤…….”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폭발하던 궁처럼, 이안의 몸 이곳저곳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피를 줄줄 흘리며 이안이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당신, 말대로, 했어.”
“괘, 괜찮…… 괜찮은 거 맞죠?!”
한 박자 늦게 경직에서 풀려난 내가 이안에게로 달려들었다.
내 몸에 쓰러지듯 기댄 이안이 말을 이었다.
“날 본 놈들은 전부, 죽였어.”
칭찬을 바라듯 푸른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래야, 준비할 수 있을 테니까…… 복수를. 그렇지?”
그렇게 묻는 이안에게선, 처음으로 그 나이대 소년이 보였다.
아직은 어리숙하고 혼란스러우며, 위로가 필요한.
나는 대답 대신 내 품으로 쓰러진 이안을 끌어안았다.
“네. 잘했어요.”
그렇게 속삭이면서.
“당신은 뭐지.”
“…….”
“수상하기 짝이 없는데, 왜 위험할 것 같지가 않을까.”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이 상황 자체가 혼란스러운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내가 존재하는 이곳이 그저 단순히 이안의 과거 속인 것이 맞긴 한 건지, 아니면 이곳 역시 나름대로의 현실인 건지도 이젠 헷갈렸다.
내게 기댄 채 아주 잠깐 숨을 고른 이안은, 곧 다시 행동을 개시했다.
그가 먼저 한 일은 적들의 시체를 처리하는 것이었다.
시체들은 반드시 숨겨야 했다. 그래야 라시드가 목격자 없이 일을 무사히 마쳤다고 여길 테니까.
‘하지만, 저 많은 시체를 어떻게…… 어?’
고민이 무색하게도 이안은 손쉽게 문제를 해결했다.
시체들을 모조리 제 아공간 안에 쓸어 넣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