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성녀님?”
내가 자길 뚫어지라 쳐다보기만 하고 말이 없자, 셀리나는 놀란 것 같았다.
나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아주 활짝.
“아무것도 아니에요, 셀리나 양. 아주 예쁜 이름이네요.”
“아, 감사합니다……!”
당황으로 셀리나의 뺨이 조금 발그레해졌다. 나는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부턴 뭘 할 계획이에요, 셀리나 양?”
“아…… 그러게요.”
셀리나가 멍한 눈을 했다.
“원래는 브로치를 판 돈으로 숙박비와 식비를 마련하려고 했어요. 그러면서 일자리를 찾아보려고 했는데…… 아, 죄송해요. 제가 괜한 것까지 말하고 있죠.”
“괜찮아요. 계속 말해 봐요.”
지나치게 사생활을 늘어놓았다는 자각이 들었는지 셀리나의 뺨이 더 붉어졌다. 예쁜 연두색 눈에 혼란이 깃들었다.
“그런데 브로치를 팔지 않기로 해서…… 계획이 많이 틀어졌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솔직히, 아직 갈피가 안 잡히네요.”
“인생이란 게 원래 예측한 대로 되질 않는 법이죠. 저도 그런 상황을 많이 겪어 봐서 아는데요, 셀리나 양.”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내가 말했다.
“그럴 때는 일단 머리 비우고 노는 게 최고예요. 마침 예약해 둔 살롱에 갈 시간이 다 되었는데, 셀리나 양도 함께 가겠어요?”
“네? 저도요?”
“코델리아 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기분 전환하는 데는 살롱만 한 장소가 없기는 하죠.”
“하, 하지만.”
셀리나가 지저분한 제 몸을 엉거주춤 내려다보았다.
“친절하게 말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하지만 보시다시피 제 몰골이 조금……! 수도에 올라오자마자 씻지도 못했는걸요.”
“어머.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나는 활짝 눈웃음을 쳤다.
“저희가 갈 살롱에는 목욕 서비스까지 구비되어 있답니다. 정말 딱이죠?”
“그, 그런데 그렇게 좋은 곳에 가기엔, 아시다시피 제가 방금 브로치를 팔지 못해서 돈이…….”
“셀리나 양도 참! 딱 봐도 저나 코델리아 님보다 어려 보이는데, 저희가 설마 동생에게 돈을 받겠어요? 걱정 말고 따라와요.”
내 생애 이렇게까지 불도저이던 순간이 있었을까.
내 몸과 머리는 우연히 만난 여주인공을 놓칠 수 없다는 일념 하나로 움직였다.
쉴 틈 없이 밀어붙이자 혼이 쏙 빠지고 말았는지 셀리나는 끌려가듯 우리와 함께 살롱으로 향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어머나!”
나는 탄성을 터뜨리며 짝 손뼉 쳤다.
셀리나가 새빨개진 얼굴로 드레스 자락을 쭈뼛쭈뼛 잡아당겼다.
“저, 저어…… 역시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
“무슨 소리예요? 거울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요? 자!”
나는 커다란 거울 앞으로 셀리나를 데려갔다.
새하얀 칵테일 드레스를 입은 셀리나는 천사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헉, 잠깐만. 이 옷차림, 챕터 3 「사교계에 상륙한 나비」에 삽입되어 있던 삽화 속 옷이랑 흡사하잖아!’
불현듯 다가온 깨달음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셀리나가 처음으로 드레스 업하고 등장하던 그 장면을 얼마나 닳도록 봤는지 모른다.
“피부가 정말 고우세요.”
“윤기 흐르는 머릿결은 또 어떻고요.”
셀리나의 단장을 도와준 살롱 직원들이 감탄을 표했다. 아마 단순한 서비스 멘트만은 아니리라. 목욕으로 흙먼지를 씻어 내고 단장한 셀리나는 정말 요정 같았으니까.
‘과연 우리 셀리나.’
데뷔와 함께 ‘사교계의 나비’라는 다소 간지러운 호칭을 획득한 주인공다웠다.
지금은 저렇게 한껏 부끄러워하고만 있지만, 머지않아 그녀는 신의 부름을 받아 성녀로 발탁될 것이다. 그것도, 날씨를 조절할 수 있는 권능을 지닌 희대의 성녀로.
그 생각을 하니 벌써 가슴이 뿌듯함으로 차올랐다.
“진주.”
코델리아가 돌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주 귀걸이와 목걸이가 필요하겠군요.”
“정말 탁월한 아이디어군요.”
나는 코델리아의 안목에 크게 감명받아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덴과 로레나의 사탕발림에 넘어가 빨간 목걸이와 파란 귀걸이를 걸치고 있던 코델리아는 어디론가 사라진 모양이었다.
우리의 옷 갈아입기 놀이는 그 뒤로도 한참을 계속되었다.
“와아, 너무 아름다우세요. ”
자기가 마네킹 역할일 때는 한껏 부끄러워하던 셀리나 역시, 나나 코델리아가 그 역할을 맡을 땐 눈을 반짝거리며 즐거워했다.
한바탕 옷을 갈아입은 뒤에는 티타임을 가졌다. 우아한 티 룸에서 차 향기를 맡으며 나는 오랜만에 한가한 시간을 만끽했다.
“네? 여기까지 한나절을 꼬박 걸어왔다고요?”
셀리나가 털어놓은 이야기에 나는 기겁했다.
“무슨 그런 사기꾼 마부가 다 있어요?! 당장 인상착의 불러요. 치안대에 고발해 버릴 거니까!”
알고 보니 셀리나는 길 중간에서 마부에게 버림받는 바람에 수도까지 걸어와야 했다고 한다.
흙먼지의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자니 시간이 금세 흘러갔다.
‘그러고 보니까, 이렇게 몇 시간이나 차만 마시며 쉬는 게 얼마 만이지.’
최근엔 팔자에도 없는 책사 노릇을 하느라 머리에 쥐가 날 노릇이었다.
장학금을 못 받을까 봐 A+ 하나에 전전긍긍하던 대학생이 별안간 황제와 암흑 길드를 상대하게 되었으니 부담감은 말로 못 이룰 지경이었다.
이상하리만큼 원작 소설에 대해서 선명히 떠오르는 기억력이 아니었다면, 계획을 짜겠다는 엄두조차도 못 냈겠지.
‘……계획이라.’
나는 물끄러미 셀리나를 바라보았다.
셀리나를 만나게 된 건 진심으로 기뻤다. 기적 같은 우연에 이 세계의 신에게 감사 기도를 드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엔 검은 속내 역시 자리하고 있다.
셀리나만이 갖고 있는 강력한 권능. 황제와 나인을 상대하려면 그 권능이 반드시 필요했다.
‘결국 난 이용하기 위해서 이 아이에게 손을 뻗은 거야.’
찻물이 씁쓰레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자책하지는 않았다. 자책하느라 머뭇거리기엔 당장 앞길이 급했으니까.
“셀리나 양.”
가지처럼 뻗어 나가는 생각을 정리하며 나는 셀리나를 불렀다.
차 향기를 신기한 얼굴로 맡고 있던 셀리나가 토끼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네, 아이린 님?”
그새 친밀감이 많이 붙은 얼굴이었다.
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직 갈 곳을 정하지 못했다고 했지요?”
“아, 네.”
현실을 떠올렸는지 셀리나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혹 괜찮다면, 갈 곳을 찾을 때까지 저를 도와줄 수 있을까요?”
“네? 제가, 아이린 님을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인 듯 셀리나의 눈이 커다래졌다.
나는 웃는 얼굴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제 측근 시녀 한 명이 일을 그만두게 되어서요. 새로운 시녀를 뽑아야 하는데, 저는 첫인상이 좋지 못하면 신변을 맡기지 못하는 버릇이 있거든요. 그런데, 셀리나 양이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차분한 목소리로 설득하고 있었지만, 사실 가슴은 콩닥콩닥 뛰어 대는 중이었다.
‘제발 수락해 줘라. 제발.’
첫 만남 만에 당기는 건 너무 조급했나?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아랫배를 간지럽혔다. 당황으로 물든 셀리나의 얼굴을 보자 불안감은 더 커졌다.
“저를 좋게 봐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셀리나가 말했다.
“하지만, 전 할머님과 달리 시녀 업무에 대해 전혀 몰라요. 하다못해 손재주도 부족한걸요.”
“괜찮아요. 상관없어요, 그런 건. 배우다 보면 조금씩 늘겠죠?”
정말로 상관없었다.
어차피 셀리나가 시녀 업무를 수행하는 건 길어 봤자 몇 달에 불과하니까.
그 뒤엔 그녀는 성녀라는 새로운 직위에 적응해야 할 터였다.
“늘지 않아도, 뭐. 상관없고요. 저도 매사에 서툰 편이랍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 같은 게 어떻게 성녀님을…….”
“아, 참. 그렇지. 급여를 말해 주지 않았군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셀리나의 귓가에 숫자를 속닥거리자, 그녀의 눈이 토끼풀밭을 발견한 토끼처럼 커다래졌다.
“그, 그렇게 큰돈을요?”
“연차가 쌓일수록 급여는 당연히 더 커진답니다.”
“세상에, 거기서 더요?”
“계속 연차를 쌓아 가도 좋고, 셀리나 양이 진로를 정할 때까지만 머물러도 좋아요. 일단은 그냥 당장 빈 시녀 자리를 채워주기만 해도 너무 고마울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요?”
셀리나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몇 분이 흘렀을까.
마침내 그녀가 입술을 열었다.
“저, 취직할게요. 써 주신다면 기꺼이요!”
“정말 잘 생각했어요!”
하마터면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나는 셀리나를 얼싸안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아이린 양은 채용을 독특한 방식으로 하는군요.”
사태를 관망하던 코델리아가 차를 홀짝이며 한 줄 평을 남겼다.
“잘해 봐요, 두 사람.”
* * *
셀리나를 사로잡는 데 성공한 나는 그녀를 곧장 대성당으로 데려갔다.
본격적인 시녀로서의 교육은 내일부터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그러니 오늘은 아무것도 시키지 말고, 그저 그녀에게 좋은 방만을 배정해 달라고 부탁했다.
‘지금쯤 잘 쉬고 있으려나.’
셀리나가 대성당에 잘 적응하고 있기를 바라며, 나는 정면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현재 시각은 자정.
어둑어둑한 밤의 테라스 위로, 머지않아 유령처럼 사람 형상의 그림자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어서 오세요.”
나는 그림자에게 말을 걸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주인님들께 엄청난 소식을 전달하셨더군요.”
그림자가 말했다. 내게 크리스털 귀걸이를 전달했던 그때 그 목소리였다.
“너무 큰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보여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본 척 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제 야심을 모르시는군요.”
나는 비스듬히 미소를 걸쳤다.
“난 언제까지고 사용하다가 다 쓰고 나면 버려지는 체스 말로만 남을 생각은 없어요. 난 스스로 나의 쓸모를 증명해 보일 거예요.”
“……진심으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렇게 하면 그들이 언젠가 당신을 진급이라도 시켜 주리라고?”
“걸 수 있는 건 뭐든지 걸어 봐야죠. 언제까지고 이 신세로만 남을 순 없잖아요?”
“당신은 생각보다 바보였군요.”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어요. 언제든지 폐기처분될 수 있는 노예보다는 나으니까.”
“……그래. 좋습니다.”
잠깐의 침묵 뒤 그림자가 말했다.
“약속대로 비밀 통로를 안내하십시오. 주인님들께서 기다리고 있으니.”
“물론이에요.”
나는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따라오세요. 조심하시고요. 행여나 그 사람에게 걸렸다간, 모든 게 끝장날 테니.”
그림자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