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쯧, 대체 어디서 이런 게. 경비원, 얼른 이 손님을 정중히 모셔요!”
보석상 직원이 경비원에게 날카롭게 눈짓했다.
“손님, 이만 나가 주시죠. 영업에 방해가 됩니다.”
“감정을 한 번만 해 보시면 아실 거라니까요……! 할머니께서 물려주신 에메랄드 브로치예요. 분명 진품일 거예요. 제발……!”
경비원에게 앞을 가로막힌 소녀가 애처롭게 외쳤다.
소녀 쪽을 돌아본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음? 저 아이…….’
한참 동안 씻지도 못하고 걸은 듯 소녀의 몸엔 온통 흙먼지가 쌓여 있었다. 예쁜 백금발이 묻힐 만큼 뽀얀 흙먼지로 뒤덮인 모습이 몹시 애처로워 보였다.
“더는 곤란합니다. 나가 주시요!”
“하지만……!”
“계속 막무가내로 나온다면 힘을 행사하는 수밖엔 없습니다.”
경비원이 소녀의 팔을 붙잡았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소녀가 가느다랗게 비명 질렀다.
“꺄악……!”
“여긴 구걸이나 하러 오는 곳이 아닙니다, 아가씨.”
“자, 잠시만요! 감정비도 내겠다고 했잖아요! 왜 쫓아내시는 거예요!”
소녀가 다급히 외쳤으나 경비원은 막무가내였다. 거대한 경비원이 가녀린 체구의 소녀를 질질 끌고 가는 광경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해도 해도 너무하네, 이 가게.’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는 것도 유분수지.
보아하니 저 소녀는 모습이 좀 꾀죄죄한 것 외엔 아무런 잘못도 한 게 없었다. 그런데도 범죄자 취급을 당하고 있는 걸 보니 입맛이 썼다.
이 가게, 다음부터는 안 와야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성큼 걸음을 옮겨 소녀 앞으로 나섰다.
“듣자 하니, 이분 말이 맞네요.”
“성녀님?”
경비원과 직원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비용을 지불하면 감정을 대신해 주는 것 역시 이 가게가 판매하는 서비스 중 일부 아니었던가요?”
“성녀님, 그것이.”
“저분은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당신들은 해야 할 일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범죄자 취급을 하며 폭력까지 행사하고 있네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아직도 경비원에게 붙잡혀 있는 소녀의 팔을 노려보았다.
“그거, 이제 놔 주시죠. 아파 보이는데.”
경비원이 엉거주춤 소녀의 팔을 놓아주었다. 나는 이번엔 점원을 노려보았다.
“예쁜 보석만 판매하는 곳인 줄 알았는데, 주문하지도 않은 모멸감까지 강매하는 가게인 줄은 몰랐네요.”
“하하, 그것이, 성녀님.”
점원이 애써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성녀님께서 불쾌하신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사과드리는 바입니다. 요즘 잡동사니를 들고 와서 보석이라며 우기는 치들이 하도 드나드는 바람에 손해를 많이 봐서요. 저희가 과민 반응을 했습니다.”
“이 가게는 우기기만 하면 잡동사니와 보석도 구분하지 못하는 가게인가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감정이라는 건 그 둘을 구별하기 위해 존재하는 과정인 줄 알았는데요.”
“그게…… 으, 흠.”
점원이 곤란한 듯 말끝을 흐렸다.
놀란 눈으로 사태를 바라보고 있던 소녀가 그 빈틈을 파고들었다.
“한 번만 감정해 주시면 제 말이 진짜라는 걸 아실 거예요!”
나는 소녀가 필사적으로 내미는 브로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예쁜 색이네.’
짙고 깊은 빛깔의 에메랄드 브로치는 상당히 아름다웠다. 웬만한 귀족들의 드레스에 달려 있던 것들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에메랄드 브로치네요.”
“네, 네!”
소녀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할머니께서 젊으셨을 적 귀족 가문의 하녀로 일하시다가, 퇴직하시면서 선물받으신 브로치예요.”
“풉.”
점원에게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말없이 점원을 돌아보자, 그가 얼른 표정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귀족이 일개 하녀에게 대체 얼마나 값진 브로치를 줬겠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요.”
“…….”
대놓고 모욕당한 소녀의 얼굴이 복숭앗빛으로 발갛게 물들었다.
점원이 소녀가 아닌 내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성녀님. 하지만 제 오랜 경력으로 미루어 보아 진짜일 확률은 없을 겁니다. 저 소녀 말이 진짜라면, 할머니라는 사람이 속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하녀들이란 존재가 워낙 순진하죠. 예나 지금이나.”
점원이 짐짓 안타까운 듯 말했다.
“진짜 에메랄드라면 이렇게 가벼운 빛이 나지 않을 겁니다. 안타깝지만, 손님. 감정은 역시 포기하시는 게 어떠신지요? 감정비도 만만치 않답니다.”
“글쎄요.”
저 인간, 굉장히 말을 얄밉게 하는 재주가 있네.
나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감정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렇게 가치를 폄훼하는 곳이라면, 제가 이분이라도 할머님의 유품을 믿고 맡길 수 없을 것 같군요. 그렇지 않나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소녀를 돌아보았다.
우리는 그제야 처음으로 눈을 맞췄다.
점원의 모욕 때문인지 소녀의 눈에는 그새 그렁그렁 물기가 맺혀 있었다. 예쁜 연두색 눈동자가 이슬 맞은 잎사귀처럼 촉촉했다.
‘이 눈동자…….’
문득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나는 소녀의 눈동자에 멍하니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
“무엇보다도. 대륙 최대 에메랄드 광산 소유주의 부인으로서, 이 에메랄드 브로치는 분명 최상급 같군요.”
내 입으로 이런 대사를 치는 날이 오게 되다니.
민망함이 몰려왔지만 필사적으로 아닌 척했다. 이런 때엔 원래 기세가 중요한 법이다.
점원이 당황한 듯 입술만 달싹거렸다. 그때 새침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내 생각도 같아요.”
코델리아가 쥘부채를 착 펴들곤 도도히 부채질을 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귀해 보이는 에메랄드군요. 진품이 틀림없어요. 아무래도 이 가게는 귀한 물건을 대할 자세가 영 되어 있지 않은 곳인 모양이군요? 나는 이만 나가 보겠어요.”
“아, 같이 가시죠, 코델리아 님.”
“잠시만요. 성녀님들!”
미련 없이 가게를 떠날 제스처를 취하자, 그제야 점원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점원을 못 본 체하고 소녀에게 말했다.
“함께 나갈래요? 보석 가게는 이곳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아, 이 맞은편에 지난달 개장한 블랑 씨의 가게도 몹시 질 좋은 물건들이 많다고 들었어요. 분명 솜씨 좋은 감정사도 채용했을걸요?”
“성녀님! 블랑 보석상만은!”
점원이 사색이 되어 외쳤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여태까지 살펴보던 악세사리와 보석들을 모두 내려놓은 뒤 나와 코델리아는 가게를 나섰다. 옆에는 얼떨결에 우리를 따라나온 소녀도 대동한 채.
길거리로 나온 나는 코델리아에게 속닥거렸다.
“코델리아 님, 그 에메랄드 브로치, 정말 진품인가요?”
아까는 대단한 보석 매니아인 척 허세 부렸지만, 실제 나는 에메랄드와 보석사탕 반지를 나란히 놔도 구분하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코델리아는 다를 거다. 날 때부터 귀족 레이디였던 코델리아가 진품이라고 확언해 주니 신뢰가 샘솟았다.
“글쎄요. 저도 모르죠.”
코델리아가 새침한 목소리로 내 기대를 산산조각 냈다.
“그 점원의 태도가 워낙 아니꼽기에 해 본 말이에요. 감정은 따로 받아 봐야겠죠.”
“저, 저기. 정말 감사합니다.”
떨리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소녀가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감사 인사를 했다. 당황했기 때문인지 다소 엉거주춤했지만, 확실한 사교계 예법이었다.
‘아무래도 할머님이 귀족 가문의 하녀로 계셨다는 말은 사실인 것 같네.’
“아니에요. 감사받을 일을 한 게 없는걸요. 결국 감정은 못 받았잖아요?”
“아…… 하지만, 저를 두둔해 주셨고…… 두 분이 아니었다면, 전 할머님이 모욕당했는데도 아무 말 못 하고 추하게 울기만 했을 거예요.”
소녀의 얼굴이 다시금 시무룩해졌다. 절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을 만큼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흙먼지를 뒤집어쓰게 됐을까. 무슨 사연이 있겠지?’
굳이 묻지 않기로 하며 나는 밝은 목소리를 냈다.
“그럼, 다시 감정받으러 가 볼까요? 맞은편 블랑 씨 보석상으로 가죠! 방금 가게랑 라이벌 관계 같던데, 열받게 하기 딱 좋겠네요.”
“네, 네!”
소녀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머지않아 소녀의 에메랄드 브로치는 마침내 진짜 감정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면밀히 브로치를 들여다보던 블랑 씨가 확언했다.
“진품이군요.”
“정말인가요!”
화색이 된 내가 외쳤다. 블랑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습니다. 질 좋은 에메랄드군요. 게다가 이 브로치는 기성품이 아닌, 한 사람만을 위해 제작된 물건 같습니다.”
“네? 그건 어떻게 아셨나요?”
“간단해요. 뒤에 문구가 써 있었거든요.”
블랑 씨가 브로치 뒤편의 오돌토돌 튀어나온 점들을 가리켰다.
“점자로 쓰인 문구입니다. 해석해 드릴까요?”
“네! 부탁드려요.”
소녀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브로치에 점자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잠시 뒤 점자 표를 대조해 본 블랑 씨가 말했다.
“이렇게 쓰여 있군요. ‘내 고마운 친구, 우드 양에게. 빅토리아가.’”
“아…….”
소녀의 눈시울이 멍해지더니, 곧 촉촉이 젖어 들었다.
“죄송해요, 블랑 씨. 저, 이 브로치 못 팔겠어요.”
소녀가 결심한 듯 말했다.
“그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는 걸 들으니까…… 이 브로치가 할머님께 얼마나 소중한 물건이었는지 와닿아요.”
“저런.”
“아무리 돈이 급해도, 할머님의 유품을 파는 건 역시 아닌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소녀가 정중히 사과했고, 블랑 씨는 그럴 필요 없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두 사람이 그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드 양? 우드 양이라고?’
조금 전 분명, ‘우드 양’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저 소녀의 할머님이 우드 양이라고?
가슴이 미친 듯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나는 소녀의 밝은 금발과, 연두색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심장이 곧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 거세게 두근거렸다. 나는 두근거림을 억누르며 간신히 물었다.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네? 저 말씀이신가요?”
물기 어린 눈가를 닦으며 소녀가 말했다.
“셀리나 우드라고 해요, 성녀님.”
셀리나 우드.
셀리나, 우드.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마치 천사가 양 귀에서 팡파르를 울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래. 어째서 알아보지 못했을까. 저리도 삽화과 똑같은걸. 아무리 흙먼지에 뒤덮여 있다 해도 진작 깨닫지 못한 내가 바보였다.
나는 씩 미소를 지었다.
‘찾았다. 내 여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