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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72/161)

72화

“그, 그렇군요. 알려 줘서 고마워요!”

재빨리 대답하며 나는 일단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패닉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일단은 수습을 해야 했다.

귀한 재료들을 허겁지겁 쓸어 담은 나는 그것들을 화장대 아래 서랍에 모두 집어넣고, 열리지 않게 열쇠로 꼭꼭 잠갔다.

열쇠를 보석함 아래 숨겨 놓은 뒤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당황한 탓인지 볼이 발그레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찹, 찹 양 뺨을 손바닥으로 두들기며 최대한 자연스러운 자세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협탁 위에 놓여 있던 책도 괜히 펼쳤다.

이렇게 하면 더 자연스러워 보일까, 아니면 이 자세가 나을까. 고민하던 와중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다행히 내 목소리는 매끄럽게 흘러 나갔다.

곧 달칵,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방 안으로 인기척이 들어왔다.

“오셨어요?”

나는 책을 펼쳐 읽던 자세 그대로 고개만 돌리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안은 낮에 봤을 때와 다른 차림이었다. 정복을 차려입고 있는 걸 보아 그새 어딘가를 다녀온 모양이었다.

‘세상 바쁜 일은 정말 혼자 다 짊어졌지.’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데, 이안이 내 손에 들린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독서 중이었습니까?”

“아, 네. 꽤 흥미롭더군요.”

“그랬습니까?”

“네. 잠이 확 깰 정도로 재치 있는 이야기네요.”

“야만족들의 식인 풍습이 말이죠.”

나는 입을 다물고 내가 펼쳐 놓았던 페이지를 내려다보았다. 마침 보인 것은 야만족이 다른 야만족 족장의 두개골에 술을 담아 마셨다는 문장이었다.

“……다양한 문화에 관심이 많아서요.”

“그러셨습니까.”

별말 없이 수긍하는 저 목소리에 미묘한 비웃음이 실린 것 같은 느낌은 내 착각일까.

조용히 책을 덮는데 이안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잘됐습니다. 벌써 잠들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제게 할 말이라도 있으신가요?”

찔리는 구석이 아주 많았기에 지레 가슴이 따끔거렸다.

이안이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묻는 내게 시선을 던지곤 말했다.

“내 시종 중에 간자가 숨어들어 있습니다.”

“네?!”

화들짝 놀란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간자라니. 어떤 간 부은 놈이 이안 곁에 간자를 심는단 말인가?

‘설마 나인이?’

그놈들이 또 이안에게 손을 뻗은 것일까? 내게 크리스털 귀걸이를 맡긴 걸로도 모자라서?

“어떻게 알게 되신 건가요? 당한 곳은 없으시고요? 먹을 것에 독을 타진 않았나요?”

“날 해치기 위한 간자가 아닙니다. 그저 탐구심이 좀 있을 뿐이죠.”

“탐구심……?”

“당신과 내 관계에 대해.”

이안과 나의 관계를 의심할 만한 사람.

떠오르는 건 한 명이었다.

‘황제구나.’

첫날밤에도 우리의 침실에 제 시종을 밀어 넣었던 자다.

그날 일로 의심을 거둔 줄 알았었는데, 그렇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런 거라면 다행이네요. 전 언제 어디서나 철저히 연기하고 있으니까요.”

단둘만 남는 공간이 아니라면, 나는 어디서나 이안의 부인 역할을 톡톡히 다하고 있었다.

“간자가 누군진 몰라도, 더 화끈한 연기를 펼쳐야겠네요. 이안 님만 따라와 주시면 전 자신 있어요.”

“간자의 정체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네?”

이안이 내게 간자의 인상착의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이미 알고 있었구나. 나는 알고서도 모른 척 내버려 두는 그의 용의주도함에 혀를 내둘렀다. 나 같은 소시민은 꿈도 못 꿀 강심장이었다.

“알고 계셨다면 미리 말씀해 주지 그러셨어요. 제가 혹시나 연기를 소홀히 했을지도 모르잖아요.”

“글쎄.”

목깃을 끌어 내리며 이안이 가볍게 말했다.

“거짓말에 있어서만큼은 전 당신을 꽤 신뢰하는 편입니다.”

“……사람을 거짓말쟁이로 만드시네요.”

뭐. 맞지만.

나는 아공간 속에 잠들어 있을 펜던트와 크리스털 귀걸이를 떠올렸다.

간단히 실험해 본 결과 크리스털 귀걸이 역시 말 한마디로 아공간에 들였다 꺼내는 것이 가능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었다.

“억울합니까?”

이안이 그렇게 말하며 픽 미소를 지었다.

장난기 어린 웃음기 때문에, 지금의 이안은 평소와 조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저런 미소는 가르친 적도 없는데.’

언제부터일까.

저 얼굴 위에는 차가운 표정, 혹은 무서운 표정만 그려지는 줄 알았는데.

언제부터인지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 앞에서 표정 연기하는 법을 가르쳤던 게 옛날 일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는 다양한 표정을 지을 줄 알았다.

“오늘따라 조용하군요.”

그렇게 말하며 이안이 넥타이를 풀었다.

그걸 바라보며 나는 때아닌 생각에 잠겼다.

‘넥타이핀. 줘야 하는데.’

떠오른 김에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늦으면 반품하기도 애매해질 테니까.

넥타이핀을 꺼내려 몸을 일으키려는데 이안이 말을 이었다.

“숨기는 거라도 있는 사람처럼.”

“……있을 리가요.”

서랍장 안에 잠들어 있을 재료들을 떠올리며 나는 시치미를 뗐다.

이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장난으로 한 말인데. 진짜 뭔가 있긴 한 모양입니다?”

“무슨 말씀이시죠?”

“분명 방금, 수상쩍은 티를 낸 것 같은데.”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이안이 말했다.

“이제 나도 그대 거짓말을 간파하는 게 좀 늘었나 봅니다.”

“무슨 얘길 하시는 건지 도통 모르겠군요.”

나는 기가 막힌 듯 홱 고개를 돌렸다.

얄미운 소리만 골라서 하는 걸 보니 선물 주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그냥 반품하든가 해야지. 흥.’

몇십 분 뒤, 나는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멍하니 노려보았다.

옆에는 오랜만에 남편이 함께 누워 있었다. 드문 일이라 그런지 영 신경이 쓰였다.

‘나만 신경 쓰고 있는 건가.’

옆자리에선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잠에 든 건지 아직 깨어 있는 건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괜히 베개를 고쳐 베던 순간이었다.

“몸은 좀 괜찮습니까.”

스며들듯 나지막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흠칫 몸을 굳혔다.

놀라 금방 대답하지 못하자, 침묵을 무어라 해석했는지 이안이 재차 말했다.

“오늘도 피곤해했다고 들었습니다.”

‘아. 아네트에게 그렇게 말했었지.’

오늘은 피곤하니까 일찍 자야겠다고, 아네트와 조안 경에게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진짜 이유는 피곤 때문이 아니라 해주약을 제조하기 위해서였지만, 이안에게 곧이곧대로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 음, 네. 오늘따라 졸음이 빨리 오더라고요. 피곤이 덜 풀린 것 같기도 하고……?”

곁에서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무슨 뜻이지. 한숨의 의미를 파악하기도 전, 이안이 또 말을 꺼냈다.

“손을 좀 대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네?!”

지나치게 소스라치자 이안이 기가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마에 손을 좀 올리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아, 아. 네. 이마. 미리 그렇게 설명을 좀 해 주시지― 아니, 잠깐. 이마에는 왜요?”

“피곤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 성력을 좀 나눠 주려는 겁니다.”

“…….”

뜻밖의 말에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안이 내게 성력을 나눠 준다고?

성직자들에게 성력이란 때로 목숨보다 귀했다. 그들의 힘의 원천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성력을 내게 주겠다고? 단지 내가 피곤해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래서 손을 대도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빨리 대답하시죠.”

이안이 불량스레 말했다.

“참고로 아무에게나 하는 제안은 아닙니다.”

그래서 더 문제였다. 이안 정도 되는 실력자가 제 귀중한 성력을 아무에게나 나눠 줄 리는 추호도 없었으니까.

왜 내게 이렇게 잘해 주는 걸까. 평소 이안의 태도를 생각해 보았을 때 소름이 오싹 돋을 정도로 의심스러웠다.

“안 그래도 나 몰래 뭔가 꿍꿍이를 꾸미느라 바쁠 당신이, 피곤해하느라 부부 행세도 제대로 못 하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그럼 그렇지.

밉살스러운 말에 나는 꾹 입술을 다물었다.

“……제가 이안 님께 숨기고 있는 게 어디 있다고요.”

“많은 것 압니다.”

“…….”

진짜 뭘 알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겠지.

아닐 거다. 이안은 늘 이런 식으로 나를 협박하길 즐기니까.

혼란에 빠져 있는데, 이안이 조용히 말했다.

“그럼, 손 올리겠습니다.”

잠시 뒤, 커다란 손바닥이 내 이마 위를 뒤덮었다.

닿을 때마다 생각하는 건데, 생김새와 달리 의외로 이안은 체온이 높았다.

따스한 체온에 잠긴 이마 탓에 온몸이 금세 나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성력이 들어오고 있는 건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내가 성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가짜이기 때문에 느껴지지 않는 걸지도 몰랐다.

다만 조금씩, 조금씩 몸 깊은 곳 어딘가에서부터 기운이 차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분 탓일까.’

그 느낌에 집중하고 있던 나는, 문득 방 안이 지나치게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밤보다 더 어두운 방 안. 고요한 사방. 그리고 무엇보다, 내 이마를 뒤덮고 있는 따스한 체온.

스멀스멀, 묘한 기분이 피어올랐다.

기운이 생겨나는 것 같던 아까의 상쾌한 기분과는 전혀 달랐다.

어쩐지 간지럽고, 심장께가 답답해지는 듯한 기분.

내겐 절대 익숙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무슨 기분인지 이름조차 붙일 수 없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 기분으로부터 달아나고 싶기도 했고, 이대로 계속해서 잠겨 있고 싶기도 했다.

‘뭐 하고 있는 거야, 이서연.’

경보음이 머릿속을 미친 듯이 울려 댔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고, 경보음이 요란히 울리며 경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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