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1/161)

71화

‘뭐지, 이 카페. 만남의 광장인가.’

마탑주까지 마주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퍽 당황스러웠다.

“아. 모나한 남작님.”

아덴이 나만큼이나 당황한 얼굴로 리젤로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지나가던 길이신가요?”

레이디들도 앞다투어 리젤로에게 인사했다.

코델리아의 살롱에서도 느꼈지만, 리젤로의 가짜 신분은 반반한 외관 덕분에 뭇 레이디들에게서 꽤나 인기를 끌고 있는 모양이었다.

‘진짜 정체가 누구인 줄 알면 다들 기겁할 텐데.’

“그나저나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모나한 남작님?”

“당신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는 것 같다 말씀드렸습니다.”

해사하게 웃는 얼굴로 리젤로가 말했다.

설마 제가 잘못 들었던 것이리라 여겼는지 아덴의 얼굴에 순간 금이 갔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황후 폐하께 엘릭서를 바치라고 조언하셨지요?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린 님의 예지는 벌써 수도를 크게 한 번 구했습니다. 게이트 사건을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그…… 물론입니다.”

아덴이 떫게 웃으며 말했다. 떨떠름한 기색을 완전히 숨기지 못하는 걸 보니 내 칭찬이 어지간히도 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제국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는 성력을 단지 전통 때문에 뽑아다 바친다니, 제가 황후 폐하라 해도 썩 달갑지 않을 것 같군요.”

“…….”

“황후 폐하처럼 제국을 위하시는 분이라면, 아이린 님 정도의 재능이 그런 식으로 낭비되는 건 절대 원하시지 않을 겁니다.”

리젤로의 말에 나는 상당이 낯이 뜨거워졌다. 코앞에 있는 사람 얼굴에 이렇게까지 금칠을 하다니. 역시 보통 뻔뻔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맙기는 했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나는 황후에게 엘릭서를 바칠 필요가 없을 테니까.

“과찬이 심하세요, 레이 님. 그 정도의 재능은 아닌걸요.”

“아이린 님이야말로 겸손이 지나치십니다. 몇백 년 만에 나타난 예지의 권능의 소유자이시면서. 아이린 님의 존재는 곧 이 나라의 보물인걸요.”

“하하…… 하. 정말 과찬이세요.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이제 그만해……!’

그런 텔레파시를 담아 나는 리젤로를 바라보았다. 칭찬도 이 정도면 고역이었다. 특히나 그게 온전히 사기였다는 것을 아는 나로서는 더더욱 그랬다.

“아이린 님께서는 정말, 겸손의 미덕까지 갖추셨군요. 참으로 보기 힘든 이 시대의 성인이십니다.”

리젤로가 손뼉까지 쳐 가며 내게 감탄했다.

“하하하…….”

“아무튼, 황후 폐하께서는 정말 그런 선물 같은 건 원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저 약소한 성의 표시 정도면 충분히 만족하실 분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비욘틴 공작 부인?”

“아. 물론이지요. 폐하께서 얼마나 소탈하신 분인데요.”

비욘틴 공작 부인이 온화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리에서 웃지 못하고 있는 건 오로지 아덴뿐이었다.

기분이 팍 상하고 말았는지 아덴은 그 뒤로도 별말을 하지 않았다.

간단히 몇 마디 한담을 더 주고받은 뒤, 비욘틴 공작 부인과 아덴 일행은 카페를 떠나갔다.

남은 건 나와 내내 묵묵히 내 뒤를 지키고 있는 조안 경, 그리고 리젤로뿐이었다.

“…….”

이 사람은 왜 안 가는 거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리젤로가 내 맞은편 의자를 빼냈다.

“잠시 합석해도 괜찮으시겠지요? 아이린 님.”

“아…… 네. 물론이죠.”

내 뒤에 선 조안 경이 매서운 눈길로 리젤로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왜 이러지. 물론 받아야 할 물건이 있기는 하지만, 설마 조안 경 앞에서 대놓고 줄 생각인 건 아니겠지?’

조안 경이 물론 내게 피의 맹세를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이안의 사람이었다. 조안 경을 믿지 못한다기보다는 더 이상 이안에게 비밀로 해 달라는 부탁으로 그녀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쇼핑을 다녀오셨나 보군요?”

리젤로가 흥미 어린 눈길로 내 쇼핑백들을 바라보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예쁜 물건들이 많더군요.”

“어라, 이건…… 실례지만, 잠시 구경해도 될까요?”

쇼핑백 안을 흘긋거리던 리젤로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뭔데 그러지?

불안함을 느끼면서도 나는 허락했다.

“물론이죠.”

“예쁜 구두군요.”

리젤로가 가리킨 것은, 하얀 꽃으로 장식된 구두였다.

꽃들은 하나하나가 진짜 생화였다. 상식적으론 당연히 일회용이겠지만, 놀랍게도 저 꽃들은 주기적으로 마력만 쐬어 주면 절대 시들지 않는 특이한 품종이라고 한다.

이건 꽃을 좋아하는 아네트를 위한 선물이었다.

“그렇죠? 제 시중을 들어 주는 친구를 위한 선물이에요.”

“그분께서 정말 좋아하겠군요. 어, 그런데. 이게 뭐죠?”

응?

무심코 리젤로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본 나는, 다음 순간 소스라치도록 놀랐다.

“허어억.”

커다란, 아니. 거대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풍뎅이가 구두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사람 주먹만 한 풍뎅이의 습격에 나는 이도 저도 못 하고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이런.”

조안 경이 빠르게 다가오더니 풍뎅이의 퍼덕거리는 날개를 잡아챘다.

‘자, 잡았어.’

풍뎅이가 미친 듯이 몸부림쳤지만, 조안 경은 눈 하나 깜짝 않고 그놈을 저 멀리로 던져 버렸다.

믿을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인 무인의 기개였다.

“조안 경……! 감사해요.”

나는 감격한 얼굴로 조안 경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벌레를 필요 이상으로 무서워하는 내겐 이 순간 조안 경이 최고의 용자로 보였다.

내 일렁거리는 눈빛에 조안 경이 픽 웃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휴, 큰일 날 뻔했군요. 레인키스는 시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참 매력적인 꽃이지만, 곤충이 꼬인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거든요.”

레인키스란 구두에 장식된 생화의 이름이었다.

이 꽃 때문에 저 괴물 풍뎅이가 습격했던 거란 말이야?

나는 경계 어린 눈으로 꽃을 노려보았다. 괴물 풍뎅이를 끌어들이는 구두 같은 것을 아네트에게 선물할 순 없었다.

“어떡하죠. 반품할까요?”

“흐음. 어쩌면 이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리젤로가 품속을 뒤졌다.

잠시 후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옅은 초록빛 액체가 든 유리병이었다.

“해충향입니다.”

“해충향…… 이요?”

“네. 곧 모기의 계절이 돌아오기에 준비해 둔 물건이죠. 이것 한 방울이면 대부분의 곤충은 기겁하며 도망갈 겁니다.”

“정말요? 그런 향이 있단 말인가요?”

지구에 살 때부터 모기라는 놈들에게 지독히 고통받아 온 나는 반색하며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자세히 바라본 순간, 나는 그것이 해충향 같은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 외관은.’

초록색의 진득한 액체가 든 유리병.

원작 속 묘사와 똑같은 외관이었다. 이 액체는 분명, 카쿨타 진액이다.

‘……아.’

나는 그제야 리젤로의 속셈을 깨달았다.

이런 식으로 진액을 건네주려는 거였구나.

‘한 수 배웠다!’

이안 때문에 거짓말에 꽤 도가 튼 나로서도 이 수는 예상치 못했다.

카쿨타 진액을 건네받기 위해 또 멜로디의 저택을 찾아가야 하는 건가 했었는데, 이렇게 간단한 방법으로 전달받을 수 있다니.

살짝 커진 눈으로 리젤로를 바라보자, 그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장난스러움이 배인 웃음이었다.

“이런…… 귀한 것을 주시다니. 안 그러셔도 되는데요.”

일단 조안 경에게 어색해 보이지 않기 위해, 나는 이 나라 귀족들이 으레 그러듯 한 번 사양했다.

“그런가요? 필요하지 않으시다면 그냥 제가…….”

“아뇨. 다시 생각해 보니 꼭 필요할 것 같아요. 곤충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해서요.”

“아. 그러셨나요?”

“네. 정말 너무 혐오합니다. 이렇게 도와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이 사람이 진짜. 한 번의 사양은 미덕이란 것도 모르나?

서둘러 대답하며 나는 손을 내밀었다. 리젤로가 작게 웃으며 내민 손바닥 위에 진액이 담긴 병을 건네주었다.

그 유리병이 손안에 감기는 순간, 묘한 카타르시스가 몸을 감쌌다.

드디어 시간제한 저주를 풀기 위한 재료를 전부 다 모은 것이다.

‘이 세계에 떨어진 순간부터 목표로 한 거였는데, 드디어.’

재료만 있으면 그 뒤는 순탄했다.

레시피는 전부 머릿속에 있었으니까.

유리병을 쥔 채 내가 잠시 아무 말이 없자, 리젤로도 조안 경도 의아한 듯했다.

“아이린 님?”

“성녀님?”

“아, 아. 죄송해요.”

나는 얼른 밝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나저나 벌써 해가 저물어 가네요. 이만 슬슬 돌아가 볼까요, 조안 경?”

얼른 돌아가서 해주약을 제조하고 싶었다.

* * *

대성당의 내 침실로 돌아간 나는, 화장대 앞에서 잠시 심호흡을 했다.

화장대 위에는 그간 모아 온 해주약의 재료들이 늘어져 있었다.

마탑에서 구매했던 보이어산 튤립과, 오르비 열매. 붉은 투구꽃의 뿌리, 디저트 시간 때 슬쩍한 소금과 갈색 설탕, 욕실에서 받아 온 정수 한 컵. 그리고 오늘 손에 넣은 카쿨타 진액까지.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이다.

나는 머릿속으로 복기하고 또 복기했던 해주약의 레시피를 떠올렸다.

레시피는 아주 복잡하고 섬세했지만, 다행히 기억을 파헤친 끝에 이젠 책을 보듯 선명히 떠올려 낼 수 있었다.

‘자. 할 수 있어, 이서연.’

재료와 레시피가 까다롭고 복잡할 뿐, 해주약을 만드는 과정 자체는 그리 어려울 게 없었다.

원작 속에서도 여주인공 혼자 제조했을 정도니까.

‘여주인공이 했으면, 나도 할 수 있어. 해 보자!’

원작 속 문장을 하나하나 핥을 듯 떠올리며,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순간 누군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허억.”

심장이 펄떡일 정도로 놀란 나는 문을 돌아보았다.

누구지? 조안 경과 아네트는 내가 잠들러 들어간 뒤에는 방해하지 않는데.

“저어, 아이린 님.”

아네트가 조심스레 속닥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네, 무슨 일이에요?”

나는 졸린 목소리를 연기하며 말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들려온 말에, 나는 졸린 연기조차 잊을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이안 님께서 취침하러 돌아오고 계세요.”

“……네?”

나는 귀를 의심했다.

결혼식 날부터 거의 죽 나를 독수공방시켜 오던 그 인간이?

하필 오늘?

이 중요한 날에?

‘어째서!’

나는 소리 없는 절규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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