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엘스마스 백화점에 일러두었습니다.”
엘스마스 백화점이라면, 분명 수도에서 제일가는 고급 상가의 이름일 텐데.
여전히 물음표로 머릿속이 가득 찬 내게 이안이 말을 이었다.
“오늘 부인께서 쓰시는 모든 백지 수표는 내 앞으로 달아 놓으라고.”
“……?”
“뭐. 비단 오늘만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이안이 빙그레 웃으며 마치 사랑이라도 속삭이듯 말했다.
“부디 반짝이는 것들이 부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어 주길.”
‘이게…… 도대체 갑자기 다 무슨 소리야?’
혼란스러웠지만, 시종들 앞이라 되물을 수가 없었다.
시종들의 시선이 내게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하나같이 부러움과 선망으로 가득 찬 시선이었다.
개중 주황색 머리를 한 시녀의 시선은 특히 진했다.
나는 애써 그들의 눈빛을 모른 체하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었다.
“하아. 돈으로 제 마음을 살 수 있을 줄 아세요?”
물론 살 수 있다. 조금 정도라면…….
어떻게 돌아가는 사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덥석 기회를 잡아 보기로 했다.
백지 수표라니. 이런 걸 언제 또 써 보겠냐고.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안 님의 성의이니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하죠.”
* * *
반짝이는 물건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적어도 난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조차도 여태 알아볼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이젠 확실히 안다.
나는 반짝거리는 것에 환장하는 타입이었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진짜 예쁘다.’
나는 거의 코를 박을 듯 가까이서 장식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안엔 내가 여태껏 본 물건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이 존재했다.
섬세하게 깎인 작은 아기 천사 조각과, 그 아래로 이어지는 오각형의 보석함.
바이올렛 사파이어가 아낌없이 박힌 보석함은 고급스러운 보랏빛으로 모든 각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성녀님께서는 안목까지 탁월하시군요. 이 오르골로 말씀드리자면…….”
점원이 흐뭇한 얼굴로 설명을 시작했다.
어떤 장인이 무슨 보석을 이용해 얼마나 큰 노력을 쏟아부어 제작했는지에 대한 길고 긴 설명이었지만, 내 귀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엄청난 유래가 있든 없든 이 오르골은 그 자체만으로 아름다웠다.
“음악도 재생해 드릴게요.”
점원이 조심스레 장식장 문을 열어 오르골을 꺼냈다.
보석함 밑단의 태엽 장치를 조작하자, 아기 천사 조각이 빙그르르 돌아가며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아름답다…….’
흘러나오는 멜로디까지도 황홀하도록 아름다웠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물건이랍니다. 지금 결제하시면 성녀님만의 것이 될 수 있어요.”
점원이 은밀히 속닥거렸다. 마치 유혹에 통달한 악마 같은 목소리로.
가격표에 시선을 준 나는 곧 눈을 크게 떴다.
0이 도대체 몇 개야……?
‘안 돼. 못 사.’
이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냥 겉모습만 눈 돌아가게 예쁜 잡동사니에 저런 거액을 부을 순 없었다.
이안도 이렇게 용도가 애매한 오르골 따위가 아니라, 남들에게 우리 사이를 과시할 수 있는 장신구 같은 것을 사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역시 안 되겠어요. 다른 걸 보여 주세요. 귀걸이나 목걸이가 좋겠네요.”
“저, 아이린 님.”
애써 오르골에게서 시선을 떼려는데, 조안 경이 곤란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송구하오나, 오늘 아이린 님께서 관심을 보이는 건 모조리 구입하라는 단장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네……?”
“정확히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부인의 눈길이 십 초 이상 머문 물건은 전부 사들이도록 해. 자네도 알다시피 부인께선 물욕을 잘 참는 편이셔서.’”
“어머나……!”
“어쩜, 어쩜.”
조안 경이 특유의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이안이 했다는 대사를 전하자, 여기저기서 환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주변의 반응과는 다르게 나는 홀로 입을 삐죽였다.
‘그 인간. 시간을 같이 보내는 걸로 부부 사일 과시하지 못하니까 돈으로라도 해결하고 싶나 보지?’
이안은 역시 뭘 몰라도 너무 몰랐다.
사랑은 돈이 전부가 아닌걸.
이런 보석을 아무리 사 줘 봤자, 사람들은 꼭 붙어 함께하는 모습에 더 로맨틱함을 느끼는 법이었다.
“이안 님께서 정말 아이린 님을 많이 사랑하시나 봐요.”
“아주 푹 빠지신 모양이에요. 제가 다 애틋하네요.”
……점원들의 생각은 나와 다른 모양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 사람 뜻이 그렇다면, 장단 맞춰 주지, 뭐.’
어차피 내 돈도 아닌걸.
빠르게 합리화를 마친 나는 점원을 돌아보았다.
“주세요. 이 오르골까지.”
“아,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결제는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저희는 제국 은행과 제휴를 맺은 업장이라 할부도 물론 가능하십니다.”
점원이 정해진 듯한 매뉴얼을 빠르고 상냥하게 읊었다.
음. 대학 교재도 할부로 사던 내가 이런 대사를 치게 될 줄이야.
새삼스러운 감회를 느끼며 나는 입을 열었다.
“전부 일시불로 할게요.”
* * *
굉장한 쇼핑이었다.
노천카페에 앉아 쉬며 나는 반쯤 넋이 나간 채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긁은 금액이 대체 전부 얼마지.’
적어도 0이 6개는…… 아니. 생각하지 말자.
나는 얼른 도리질을 해 헛생각을 털어 냈다. 괜히 가격을 생각해 봐야 내 소시민적인 심장만 다친다.
‘그런데 이런 게 정말 효과가 있으려나?’
일단 오늘 내가 백화점을 쓸어 가는 모습을 수많은 손님이 목격했기에 소문은 확실히 날 것이다.
아이린 그레이스가 백화점을 한 바퀴 쓸었다더라, 지불은 모두 이안 에스테반의 이름으로 했다더라.
그런 소문이 벌써 이곳저곳을 발 없는 말처럼 달려 나가고 있겠지.
나는 쇼핑백 중 하나를 열어, 가장 마지막으로 산 물건을 꺼내 보았다.
고급스레 포장된 손바닥만 한 상자. 그 안에는 사파이어를 박은 넥타이핀이 들어 있었다.
유일하게 이안의 수표가 아닌, 내 계좌로 직접 결제한 물건이기도 했다.
‘선물을 그 사람 돈으로 사는 건 뭔가 좀 그러니까.’
사실 이안의 선물까지 살 생각은 없었다. 그 사람도 이런 성의를 내게서 기대하진 않을 테고.
다분히 충동적인 구매였다. 백화점 조명 아래에서 반짝이는 사파이어가, 그 사람의 눈과 똑 닮아 보이지만 않았더라도 그냥 스쳐 지나갔을 텐데.
‘그런데, 그 사람이 넥타이핀 같은 걸 하던가.’
이안의 착장은 대부분 심플한 편이었다. 미모가 워낙 화려하니 옷까지 요란한 것보단 그편이 훨씬 잘 어울리기는 했다.
그런 사람이 과연 보석 박힌 넥타이핀을 착용할까.
‘에이, 모르겠다.’
싫다고 하면 반품해 버리지, 뭐.
어차피 필요 없다고 할 것 같아서 넥타이핀만큼은 영수증을 끊어 달라고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초콜릿 음료를 쪽쪽 빨아 마셨다. 시원하면서도 달콤한 액체가 금세 에너지를 샘솟게 했다.
백화점에서 빨려 나간 활력도 좀 찬 것 같고. 슬슬 일어나 볼까, 생각하던 차였다.
“어라. 이게 누구신가요.”
몇 번 들어 본 적 있는 것 같은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누추한 곳에 귀한 분이 계시네. 안녕하세요, 성녀님. 이런 곳에서 다 뵙네요.”
나?
반사적으로 고개 돌린 나는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저 예쁘장하니 반반한 얼굴. 어디서 봤더라.
‘아, 그렇지.’
나는 내게 다가온 무리 중, 가장 가운데 서 있는 청년에게 손 인사하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아돈 님!”
“아덴입니다.”
화사한 미청년의 미간에 순간 금이 갔다.
아, 그런 이름이었던가?
미안함에 나는 인사했던 손을 내렸다. 어쩔 수 없었다. 원작에도 나오지 않는 이름을 기억하기엔 이미 내 머리는 용량 초과란 말이야.
“실례했어요. 반가워요, 아덴 님. 오랜만에 뵙는군요.”
별생각 없이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 건넨 말인데, 아덴의 얼굴이 또 설핏 굳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코델리아에게서 버림받았었지. 이 사람.’
한때 코델리아의 최측근이었던 아덴과 로레나는 이제 그녀의 살롱에조차 초대받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친구인 줄 알았던 둘에게 자신이 이용당했음을 코델리아도 결국 깨닫게 된 거겠지.
지금 아덴의 옆구리를 꿰차고 있는 귀족들 역시 코델리아의 무리는 아니었다.
본의 아니게 아덴의 아픈 곳을 찌르게 된 나는 괜히 초콜릿 음료를 홀짝였다.
“예. 정말 오랜만입니다. 요즘 사교계에서 성녀님 모습을 뵙기가 통 힘들더군요.”
얼른 표정을 갈무리한 아덴이 짐짓 사근사근히 말했다.
하지만 그의 성격을 대강 아는 나는 저 질문에 무언가 뼈가 있음을 눈치챘다.
“네, 사교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지도 꽤 되었네요. 이런저런 일들에 휘말리는 바람에.”
요즘 정말 바빴던 건 사실이지만, 공교롭게도 전부 다 일반인에게 발설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 때문에 대충 얼버무리자 아덴이 사르르 눈웃음을 쳤다.
“이런저런 일들이라…… 제국의 달을 뵙는 것보다도 바쁜 일이셨던가요?”
제국의 달이란 건 황후를 뜻하는데.
난데없는 황후의 언급에 나는 대답 없이 아덴을 바라보았다.
“황후 폐하께서 일주일 전 성대히 무도회를 개최하셨다는 건 알고 계시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