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161)

68화

* * *

“아무리…… 겁박해 봐라. 난 아무것도, 쿨럭, 몰라! 그냥 돈 받고 주문을 왼 것밖엔 없다고!”

피를 토하는 듯한 외침이 지하실을 울렸다.

의자에 묶인 흑마법사가 지친 눈으로 눈앞에 선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의 몸에는 심문의 흔적이 역력했다.

이안은 품속에서 시계를 꺼내 확인했다.

이 심문실에 들어온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끈질기군.”

이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가족이 인질로 잡혀 있나?”

“무, 무슨…… 난 정말 아무것도 몰라. 그저 시키는 대로 한 것뿐이란 말이오! 제발!”

“혹은 애인? 어느 쪽이든 장담하지. 지금 입을 열지 않으면 자네의 소중한 사람은 자네가 걱정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꼴을 당하게 될 거야.”

물론 이안에게는 아무리 범죄자와 엮인 자라 해도 무고한 이를 해코지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말뿐인 협박이 효력을 발휘했는지, 마법사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어,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고…….”

“어떻게든 알아낼 테니 그건 걱정 말고. 자, 어쩔 텐가? 슬슬 입을 열어 볼 생각이 드나?”

마법사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안은 마침내 야간 업무가 끝나감을 직감하고 시계를 도로 품속에 넣었다.

삼십 분 뒤, 모든 것을 토해 낸 마법사는 죽은 듯 정신을 잃었다.

알아낸 정보들을 조합하며 이안은 미간을 좁혔다.

‘암흑 길드 나인이라.’

마법사가 밝힌 자신의 소속이었다.

나인에 대해서라면 이안도 알고 있었다. 제국의 암적인 존재. 대가만 주어지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최악의 범죄자 집단.

그러나 제국의 수도에서 버젓이 일을 칠 만큼 대담한 족속들은 아니었을 텐데.

‘게다가, 나를 끌어내기 위해 세운 계획이라.’

마법사는 제가 발동하려던 마법의 용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정말 모른다고 맹세했다.

다리 사이로 노란 액체를 지리면서까지도 모른다며 도리질만 쳤으니 그 점은 사실일 터.

마법진의 정확한 용도야 모르겠지만, 뭐가 되었든 자신을 축복하기 위해 설치한 진은 아니었을 것이다.

‘누군가 나를 해치기 위해 나인과 손을 잡았다는 이야기인데.’

범인은 대충 짐작이 갔다.

벌써 두 친혈육의 피를 손에 묻힌 자이니, 마지막 남은 혈육까지 제거하는 것은 전혀 거리낄 것 없는 일이겠지.

제 형, 라시드의 얼굴을 떠올린 이안은 비릿하게 웃었다.

최근 몇 년간은 그래도 이안에 대한 증오보다는 그가 지닌 가치에 더 집중하기로 마음먹은 줄 알았는데, 그새 심경에 변화가 생겼던 모양이다.

‘어디까지가 그자의 짓일까.’

암흑 경매에 출품된 물건들을 모두 회수해 검사했으나, 대악마의 진명이 적힌 종이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모두 거짓 소문이었던 것이다.

리칼리온에 인큐버스가 강림했던 것은 누군가가 소환했기 때문일 것이다. 애초부터 그런 대악마가 난데없이 강림한 것에 의구심을 품고 있던 이안은, 진명이 적힌 종이에 대한 소문을 듣자마자 의도된 소환이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범인은 이번 암흑 경매에 거짓 소문을 퍼뜨린 이와 동일 인물이겠지.

이안의 추리대로라면,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나인, 그리고 황제가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자가 과연 제가 다스리는 땅에 대악마를 풀어놓을 정도로 미쳤을까.’

알 수 없었다.

황궁을 떠나온 지도 십 년이 넘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친형의 오물 같은 머릿속이 얼마나 더 썩어 들어갔을지는 모를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이안이 천천히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어느새 은빛으로 돌아온 머리카락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단장님. 조안입니다.”

그때 문밖에서 정중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라.”

심문실 안으로 들어온 조안의 얼굴에선 평소에는 볼 수 없는 피로의 빛이 희미하게 나타나 있었다.

대성당으로 돌아오자마자 받아야 했던 징계의 흔적이었다.

“성녀께서는?”

“잠에 드셨습니다.”

“자네를 그 사람의 호위로 붙인 이상, 자네가 나보다 그 사람에게 더 충성하는 것은 상관없다.”

“…….”

“단 그 사람이 위험에 처할지도 모르는 상황만큼은 절대로 만들지 마라. 그 사람이 아무리 원하더라도. 이게 내 유일한 명령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고개 숙인 조안이 잠시 머뭇거렸다.

“……저, 단장님.”

다시금 고개를 든 조안의 눈빛엔 드물게도 혼란이 어려 있었다.

“오늘 성녀님께서 몽마들과 맞닥뜨렸을 때의, 일입니다만. ……제가 목격한 것이 실제인지, 착각인지 모르겠습니다.”

조안 정도 되는 실력자가 제 눈으로 직접 본 것을 헷갈릴 리는 없을 터.

그럼에도 그녀가 의구심을 갖는 이유는 그것이 현실에서 일어나기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리라.

이안은 조안이 꺼내려는 말이 무엇일지 직감했다.

조안을 빤히 바라보며 이안이 입을 열었다.

“내 부인의 말에는 뼈가 있지.”

“…….”

조안이 눈을 크게 떴다.

간단한 암시였지만, 그것만으로 조안은 알아들었다. 자신이 목격했던 그 현상을 이안 역시 알고 있음을.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니었음을.

“성녀님께서…….”

정말 언령을 사용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조안은 입술을 더듬었다.

그녀가 내뱉은 말 한 마디에 몽마들이 나자빠지던 모습이 아직도 시야에 선명했다.

언령은 결코 흔히 주어지는 힘이 아니다.

신이 정말 아끼고 사랑하는 이에게만, 간혹 기적처럼 주어지는 능력.

이안 역시 신이 제국에 선사한 인재라고까지 추앙받지만, 그런 그에게도 언령이라는 능력은 없었다.

‘단장님께서 그때 성녀님의 입을 가로막으셨던 것도…… 그래서였나.’

전장 한복판에서 이안이 아이린을 번쩍 안아 들던 장면은 지금도 생생했다.

언령은 워낙 희귀한 능력이기 때문에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지만, 성력이 많이 소모되리라는 것은 뻔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안은 아이린이 성력을 크게 잃지 않도록 가로막았던 것이다.

빠르게 사태를 파악한 조안이 굳게 말했다.

“성녀님께서 직접 힘을 행사하실 일이 절대 없도록 하겠습니다.”

“실망시키지 말아라. 이번에는.”

“예.”

깊게 고개를 조아린 조안에게 이안이 말했다.

“시종 중에 간자가 숨어들었다.”

뜻밖의 말에 조안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당장 적발하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이미 누구인지도 알고 있고.”

“그렇다면…….”

조안의 눈동자에 혼란스러운 빛이 스쳤다.

이안의 말은 간자의 정체를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눈감아 주고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정체를 알고 있다면 위협될 건 없다. 적당히 쓸모없는 먹잇감만 던져 주며 통제하면 될 일이니.”

조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의 말이 맞았다. 감히 대성당에 간자를 투입할 만큼 간 큰 자라면, 축출해 낸다 해도 새로운 간자를 들이려 할 터였다.

그러느니 이미 감시망에 들어온 간자를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노는 것이 훨씬 나은 방법이었다.

이안은 이 일이 익숙했다. 황제가 그의 곁에 간자를 심어 놓는 일은 하루 이틀 이야기가 아니었으니.

하지만 이번은 좀 더 목적이 빤했다. 하필 그 간자를 아이린의 침실 시녀로 집어넣은 것이다.

“단, 간자가 그 사람 곁을 얼쩡거리는 일은 없도록 해야겠지.”

이안은 조안에게 간자의 인상착의를 일러 주었다. 아이린에게 은밀히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아이린의 침실 시녀라는 인선 역시 자신의 개인 시녀로 조정할 예정이었다.

그렇게 해도 자신과 아이린이 어떤 관계일지 염탐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을 테니 그쪽에서도 크게 불만을 갖진 않겠지.

이안은 벽시계를 돌아보았다. 자정을 한참 넘긴 시각. 오늘도 그의 신부는 홀로 잠자리에 들어 있을 터였다.

* * *

죽은 듯이 잤다.

거의 정오가 되어서야 나는 눈을 떴다.

이안의 심문 때문에 긴장했었기 때문인지 온몸이 지나치게 피로하긴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오래 자다니.

‘마음의 짐 때문인가?’

어젯밤, 그림자에게 받은 임무를 떠올리자 또 배 속이 꼬이는 느낌이었다.

아니, 느낌이 아니라 정말로 배배 꼬이고 있었다. 자느라 아침 식사도 거른 배가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으으, 대체 얼마나 잔 거야.”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어 있었기에 나는 간단히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식사를 하러 방을 나섰다.

“이안 님께선 먼저 식당에 도착해 계세요.”

아네트의 속닥거림에 나는 멈칫했다.

그래도 명색이 부부이다 보니 너무 바쁘지 않으면 식사는 함께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늘 역시 그런 날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음. 지금 시간까지 자고 있었다는 걸 알면 좀 한심해하려나.’

나는 나가려던 발걸음을 되돌려 괜히 얼굴에 물 칠을 조금 더 했다.

식당에 들어서자, 방금 일어나 조금 부어 있는 나와 달리 늘 그렇듯 완벽한 이안이 명화처럼 앉아 있었다.

“이제 일어났습니까.”

날 흘긋 바라본 이안이 툭 던지듯 말했다.

역시 티가 많이 나나. 민망함을 숨기며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 앉았다.

“조금 피곤하더라고요. 이안 님께서는 간밤에 안 들어오셨죠? 꿈에서까지 외로웠다고요.”

식사를 시중들기 위한 시종들을 의식하며 나는 연기를 펼쳤다. 처음에야 닭살 돋았지, 이젠 이 정도 연기쯤은 별것도 아니었다.

‘그나저나, 못 보던 시종들이 있네.’

가령 이안의 곁에서 그를 시중들고 있는 주황 머리 양 갈래 머리 아가씨라거나.

“새 신부를 독수공방시키다니. 정말 못되셨어요.”

나는 이안이 일로 바빴던 것을 알면서도 탓하듯 애교 부리는 새 신부 연기를 톡톡히 해냈다.

이안의 눈썹이 한 차례 꿈틀거렸으나, 곧 그는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저도 마음만 같았다면 그대 곁을 절대 비우지 않았을 겁니다.”

‘호오.’

나는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인간은 학습의 동물이라더니, 그렇게 목석같던 이안도 이젠 꽤나 자연스러운 부부 연기를 할 줄 알게 되었다.

물론 나만큼이나 능청스럽진 못했지만, 그래도 저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 만회할 기회를 주시죠.”

응? 무슨 기회?

뜻밖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이안이 내게 빙긋 웃음을 보내며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