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당황한 탓에 얼른 대답하지 못하자, 이안이 또 나를 을렀다.
“정말 네가 성녀라면 증거를 대 봐.”
“즈, 증거요?”
“그래. 성녀가 맞다면 네게도 권능이 있겠지.”
권능.
그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성녀님은 사랑을 몰라』 세계 속 성녀들은 기본적으로 권능을 얻는다.
치유이든, 예지이든, 무언가 신비로운 힘을.
권능 이야기가 나온 걸 보니 아무래도 내가 제대로 짚은 게 맞는 모양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곳은 『성녀님은 사랑을 몰라』 속 세계관과 일치하는 듯했다.
하지만 맞혔다는 기쁨도 잠시. 이안이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 안 하나? 설마 권능이 없단 소릴 하려는 건 아니겠지?”
“……예지! 제 권능은 예지 능력입니다!”
나는 황급히 외쳤다.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치유였지만, 그랬다가 당장 상처를 낫게 해 보라는 요구를 들으면 난감해진다.
다만 예지는, 어떻게 입을 잘 털어 보면 당장은 속여 넘길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예지라.”
이안이 차가운 눈길로 나를 훑어보았다.
“그렇다면 이것도 맞혀 봐. 내 보검은 지금 어디에 있지?”
순간 머리가 탁 트이는 것 같았다.
이안 에스테반의 보검. 나는 그 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그가 늘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저 화려한 검이 선황에게 받은 보검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진짜 검은―
“아공간 속. 그곳에 항상 보관하고 계시지요?”
마법으로 만들어 낸, 가상의 인벤토리 안에 보관하고 있다.
“……그래. 맞아.”
이안이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때려 맞힌 건가?”
“아니에요! 서, 성녀 맞습니다, 정말이에요!”
윽. 내 입으로 내가 성녀라고 말하려니 손발이 오글거렸지만 나는 꿋꿋이 외쳤다.
“단장님, 확실히 운으로 할 수 있는 대답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나이스, 루시안! 그 지원 사격에 나는 더 당당히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정말인가. 진짜 성녀라고?”
미심쩍은 눈으로 날 내려다보던 이안이 천천히 중얼거렸다.
나는 최대한 성녀답게 갸륵한 표정을 짓기 위해 애썼다. 이안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는 걸 보아 실패한 것 같았지만.
“놀리는 표정 같아서 좀 열이 받는데…….”
“단장님, 그럴 리가요.”
“으음…… 15년 만의 새 성녀라. 사실이라면 아주 고무적인 일이긴 한데. ……뭐, 그래. 일단은 믿어 보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나는 우렁차게 대답했다. 성녀 검증 절차가 시작되기 전에 튀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좋아, 성녀님. 그럼 제일 먼저 해 줬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
이안이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어쩐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미소였다.
“……무엇인가요?”
“15년 만에 출현한 성녀님께서 하필이면 내 침실로 떨어지는 바람에…… 내가 아주, 아주 곤란해져서 말입니다.”
존댓말을 하는데 어쩐지 오금이 더 얼어붙었다. 난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그 점은 절 보내신 신님을 대신해 사과할게요.”
“사과는 됐고. 함께 해명을 해 주셔야겠습니다.”
이안이 창공처럼 새파란 눈동자로 날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당신과 자지 않았다는 해명.”
“알, 히끅. 알겠어요.”
“단장님. 성녀님을 너무 겁주시는 것 같습니다. 성녀님께서도 놀라셨을 텐데…….”
“쯧.”
이안이 낮게 혀를 찼다.
“알겠습니다. 해명하러 나서기 전에 일단은 그…… 불경한 옷차림부터 어떻게 해 보시죠.”
그렇게 말한 이안이 의자 위에 걸쳐져 있던 망토를 내 어깨 위로 둘러 주었다.
그러고는 제 목 언저리를 툭툭 쳐 보였다.
“벌레 물린 자국들도 치료를 좀 받아야겠는데.”
“예? 벌레요? 아…… 아.”
나와 루시안의 시선이 덩달아 내 쇄골쯤으로 향했다.
하얀 피부에 피어오른 울긋불긋한 자국은 쳐다보기만 해도 얼굴이 다 빨개질 만큼 남사스러웠다.
‘……지금 이걸 보고 말한 거야?’
설마. 다 큰 어른인데 이런 자국의 의미를 모를 리가.
그러나 이안은 그저 내가 불쌍하다는 듯 쯧 혀를 찼다.
“많이 물어뜯겼군. 굉장히 아파 보이는데…… 아무튼, 루시안. 잘 보필하도록.”
“예, 옙, 단장님! 저, 따라오시지요, 성녀님. 갈아입으실 옷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루시안이 황급히 내게 손짓했다.
그를 따라가며 나는 일단은 한시름을 놓았다.
‘좋아, 일단 목숨은 건졌고.’
남은 건 거짓말이 들통나기 전에 튀는 것.
그리고 이 이상한 세계로 떨어진 원인을 알아내는 것이다.
……할 수 있을까?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아직은 튀지 못했다.
나는 어색한 눈으로 방금 갈아입은 옷을 내려다보았다.
크림색 원피스는 평소의 나라면 절대 입지 않을 귀여운 디자인이었지만, 그래도 아까 그 남사스러운 슬립보다는 백배 나았다.
옷을 다 갈아입은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거울 속에서는 내 현실 나이 또래의 여자가 날 마주 보고 있었다.
헤이즐넛처럼 연한 갈색 머리카락. 녹음처럼 짙은 초록색 눈동자.
꽤 호감형으로 생긴 여자가 나를 향해 눈을 깜빡거렸다.
“이게…… 나란 말이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믿기 힘들지만 현실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보통 소설 속 캐릭터가 되면, 여주인공은 아니어도 메인 악역이나 하다못해 조연 같은 게 되지 않나?’
난 어떻게 된 게 이름조차 나오지 않은 엑스트라가 되어 버렸다.
‘애초에 원작에서 이런 에피소드는 읽어 본 적도 없다고!’
작중에서 이안은 처음부터 끝까지 신실하고 완벽한 성기사단장, 말 그대로 순결하기 그지없는 캐릭터였다.
그런 이안의 침대에 여자가 숨어들다니.
원작에서 이런 스캔들을 읽은 기억은 결단코 없었다.
‘……잠깐. 혹시 원작에 이 사건이 안 나온 이유가, 설마.’
침대에 여자가 숨어든 걸 발견한 이안이, 사람들이 발견하기도 전에 슥삭 처리해 버려서였던 건 아니겠지?
‘내가 들어온 이 몸은 원래 죽을 운명이었고, 난 그냥 천억분의 일 확률로 살아남았던 거 아냐……?’
그런 생각을 하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안이라면 충분히 스캔들을 막기 위해 나 하나 정돈 처리할 수 있었다. 그는 그런 인물이었다.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머릿속이 하얘졌을 때였다.
“성녀님, 갈아입으셨습니까?”
문밖에서 루시안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그새 창문이라도 깨고 달아났을까 봐 불안한 모양이었다.
“네에, 지금 나갈게요.”
아쉽게도 난 그렇게까지 무모하진 않았다.
탈출이 첫 번째 목표긴 하지만, 오 초 만에 도로 잡혀 오는 탈출은 사양이다.
일단은 이안과 그 심복인 루시안의 시야에서 벗어날 기회를 기다려야 했다.
얌전히 옷을 갈아입은 후 방을 나서자, 어느새 이안이 다시 돌아와 있었다.
“이제 좀 옷다운 옷을 보는군요.”
슬립에서 평범한 드레스로 갈아입은 날 본 이안이 짧게 평했다.
소파에 걸터앉은 이안이 맞은편 의자를 가리켜 보였다.
“자. 그럼 여기 앉아 보시죠, 성녀님.”
‘성녀님’이라곤 부르고 있지만 이안의 눈은 나를 향한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람들 앞에 해명하러 나서기 전에, 우리끼리 먼저 진실된 대화를 나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네. 역시 그래야겠죠.”
마지못해 대답하며 나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옷을 갈아입는 동안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으나 무언가 떠올리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지금부턴 임기응변으로 이 상황을 헤쳐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제발 빛나라, 나의 순발력아.
의자에 엉덩이를 대고 앉자마자 질문이 파고들었다.
“자, 그럼. 어디서 온 누구인지부터 설명해 주실까요.”
‘역시 이 질문부터구나.’
첫 질문은 예상대로였다. 호구 조사는 기본 중의 기본이지.
‘한국 사는 이서연인데요? 친구 집에서 술 먹고 자다 일어났더니 그쪽 품 안이었고요.’
이렇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한다면 성기사단 전용 고문실로 질질 끌려가겠지.
‘으아, 머리 아파 죽겠네.’
꿈이라면 이젠 제발 깨고 싶다.
속으로 슬피 울며 나는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아이린. 아이린 그레이스예요.”
이 세계관 속에서 ‘아이린’은 몹시 흔한 이름이었다.
여주인공의 친구 이름도, 이모 이름도 아이린이었다. 그레이스 역시 마찬가지로 가장 흔한 성씨.
즉, ‘아이린 그레이스’는 한국으로 치면 김영희 정도의 이름이랄까.
“아이린 그레이스라.”
“네. 제 이름이죠.”
“지나치게 흔한 이름 아닌가?”
“흔할수록 좋은 이름이라고들 하잖아요.”
이안이 흐음, 소리를 내며 턱을 괴었다.
“출신은?”
“…….”
좋아. 두 번째 관문이다.
하지만 예상했던 관문이었다. 이 정도 질문은 당연히 해 올 줄 알았지.
나는 몰래 손을 내려서 허벅지를 꾹꾹 꼬집었다.
“저는…….”
매서운 내 손맛에 금세 눈가에 물기가 핑 고였다.
난 우수 어린 눈망울로 먼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는, 사실…… 이 제국 사람이 아니었답니다.”
“…….”
이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더니 더 해 보라는 듯 빤히 바라보았다.
“……게다가, 실은 노예였어요. 도망친 노예요.”
“도망 노예?”
이안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나는 얼른 급조한 시나리오를 읊었다.
“네. 어렸을 때부터 버려져서, 부모님 얼굴도 모른 채 노예로 살다가…… 운이 좋아 도망쳤었답니다.”
“…….”
“다른 사람에게 이 얘길 털어놓는 건 처음이네요.”
숙연한 목소리를 자아내며 나는 고개를 숙였다.
이게 최선이었다.
노예라면 신분을 증명할 수단이 없다.
거꾸로 말하면, 이안이 내 신분을 추적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도망쳤다고 하면 노예 매매 증서로 꼬리가 잡힐 일도 없었다.
옷을 갈아입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이 이상의 수를 짜내는 건 불가능했다.
“노예였다, 라.”
이안이 천천히 중얼거리며 나를 직시했다.
창공처럼 새파란 눈동자에 괜히 등골이 섬뜩해졌다.
“허울 좋은 변명으로 들리는 건 왜일까.”
“…….”
그건 당신이 호락호락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겠죠? 하하.
‘괜히 장차 황제까지 해 먹는 인물은 아니네.’
“뭐. 좋습니다, 일단. 그럼 더 자세히 얘기해 보시죠. 도망치기 전엔 어느 노예 상단에 있었습니까? 주인은 누구였고?”
날카로운 질문 공세가 휘몰아쳤다.
중요한 건 이 대목부터였다.
나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