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161)

1화

깡, 깡!

누군가 내 머리로 망치를 내려치는 것 같았다.

“으윽…….”

나는 허덕이며 눈을 떴다. 끔찍한 두통이었다.

간밤에 뭘 하다가 잤지? 아, 그래. 소연이 생일 축하 파티에 참석했었던가?

그래, 그랬던 것 같다. 신이 나서 할 줄도 모르는 양주까지 꿀꺽댔었지.

‘신이시여, 그 벌을 지금 받는 겁니까.’

머리가 깨져 나갈 것 같았다. 여태 겪어 본 숙취 중 최고였다.

일단 물, 물을 마시자. 나는 힘겹게 눈을 떴다.

‘응?’

그런데. 눈을 뜬 내가 마주한 것은, 소연이 집의 유치한 꽃무늬 벽지가 아니었고.

내 집의 새하얀 천장도 아니었다.

“누, 누, 누구…….”

웬 벗은 남자의 어깨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헉.’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살아 숨 쉬는, 벌거벗은 남자의 어깨와 가슴팍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넓은 어깨 아래로 움푹하게 파인 쇄골. 매끄러워 보이는 피부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근육.

내가 지금 대체 뭘 보고 있는 거지?

이 완벽한 삼각근의 소유자께서는 내 침대 안에서 대체 뭘 하고 계시는 거지?

‘간밤에 뭔 짓을 한 거야, 나!’

그때 태어나서 본 중 가장 완벽한 삼각근이 한 차례 더 크게 꿈틀거렸다.

동시에 서늘한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뭐지, 당신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든 순간, 나는 숨을 집어삼켰다.

‘헉.’

새파란, 겨울 하늘보다도 푸른 눈동자가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입술이 더듬더듬 열렸다.

“……안녕하세요?”

“안녕하냐고?”

의문의 미남이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바로 다음 순간, 시야가 홱 위로 뒤집혔다.

스릉. 섬뜩한 소리에 반응할 새도 없었다. 서늘한 촉감이 내 목에 드리워졌다.

“장난하자는 건가? 내 침대 안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남자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자, 잠깐만, 지금 내 목 밑에 있는 이거 단검 맞지? 진짜 칼이지, 이거?

“지, 진정…… 진정하세요.”

“이봐. 말장난할 생각 없어. 당장 신원을 밝혀라.”

차가운 검날이 목 아래로 더 깊숙이 파묻혔다.

미칠 노릇이었다. 아직도 숙취로 꽝꽝 울리는 머리, 잠에서 덜 깨 흐릿한 시야.

게다가 이 살벌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도, 날 내리누르듯 덮친 남자의 얼굴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고?!’

혹시 나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그래, 그거구나!

꿈을 꾸고 있나 보다. 그렇지, 이런 이상한 상황이 현실일 리 없지. 나는 허탈히 중얼거렸다.

“별 이상한 꿈을 다 꾸네, 하하, 하.”

그러자 꿈결처럼 잘난 남자의 얼굴이 또 와작 구겨졌다.

“죽고 싶은가 보군.”

단검의 넓적한 면이 내 목젖을 지그시 눌렀다.

캑캑. 나는 얕게 헐떡거렸다. 숨통을 조이는 고통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마치 현실인 것처럼.

“침입자, 오래 말할 생각 없어. 당장 배후를 불어라. 아니면―”

남자의 새파란 눈동자 속에 비친 단검 날이 번득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건 실제 상황이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 난 정말 목숨을 위협받고 있었다.

깨달음과 동시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릿속으로 언젠가 시청했던 ‘괴한 만났을 때 대처법’ 동영상이 떠올랐다.

괴한을 만났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얄팍한 호신술을 펼치는 게 아니라 했다. 일반인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꺄아아아아악!”

큰 소리로 도움 청하기!

우렁찬 외침에 남자가 움찔 몸을 굳혔다.

이때다! 잽싸게 몸을 뒤집으려던 찰나였다.

“이안 님! 괜찮으십니까!”

벌컥. 문이 열렸다.

‘어?’

나는 깜짝 놀라 문을 돌아보았다.

구조를 기대하고 비명 지른 건 맞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문을 열어젖힌 사람이 우릴 보고 돌처럼 굳었다. 날 덮치고 있던 미남만이 낮게 욕설을 뱉었다.

“젠장.”

“이안 님!”

“무슨 일입니까!”

“침입자입니까?!”

순식간에 사람들이 검을 꼬나 쥔 채 방 안으로 달려들었다.

그들 역시 우릴 보더니 마찬가지로 쩍 굳어 버렸다.

상체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멋진 근육을 자랑 중인 남자. 그리고 그 남자 밑에 깔려 있는 나.

사람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 이안 님. 이건…….”

“침입…… 자가 아니군요……?”

“죄, 죄송합니다, 이안 님! 물러나겠습니다!”

“기다려!”

남자가 다급히 외치며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우릴 가리고 있던 이불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이건 그런 상황이 아니다! 기다―”

“히익!”

눈을 휘둥그레 뜬 사람들이 기겁했다.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불에 감춰져 있던 내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어제 입고 잤던 고혹적인 보라색 실크 슬립과―

‘에엥?! 이게 뭐야?’

이런 건 입고 잔 적 없어!

생전 걸쳐 본 적 없는 야한 잠옷에 나는 기겁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손바닥만 한 천 쪼가리 밖으로 드러난 피부엔 울긋불긋 붉은 흔적이…….

“으악! 이게 다 뭐야!”

“저, 저흰 물러나 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안 님!”

사람들이 제 눈을 가리며 허겁지겁 뒷걸음질 쳤다. 곧 쾅, 문이 닫혔다.

정적 속에서 바득,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목적이었군.”

“네? 아니, 잠깐만요. 그쪽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꽤 똑똑한데. 누구지?”

남자가 형형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푸른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었다.

“나, 이안 에스테반을 이딴 식으로 엿 먹이라고 가르친 사람이.”

이안, 에스테반.

풀 네임을 듣는 순간 나는 눈을 찌푸렸다. 지나치게 익숙한 이름이었다.

간밤 꾸었던 꿈이 다시금 떠올랐다. 내내 이상한 꿈을 꿨었다. 그제 완독한 로맨스 소설 『성녀님은 사랑을 몰라』의 줄거리가 계속해서 반복되는 꿈이었다.

『성녀님은 사랑을 몰라』는 성녀 여주와 기사 남주가 벌이는 알콩달콩 로맨스 소설로, 최종 보스가 흑화하기 전까지는 아주 평화롭고 깜찍한 분위기였다.

그리고, 이안 에스테반은 분명 그 소설 속의…….

‘최종 보스.’

반역을 일으켜 황위 찬탈에 성공하지만, 저주에 잠식당해 폭군이 되어 미쳐 날뛰는 인물이다.

“이, 일단 진정하세요.”

뒤늦게 두려워진 나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설마, 아니겠지. 눈앞의 인간이 그 ‘이안 에스테반’일 리가.

내가 아직 꿈에서 덜 깨 환청을 들은 거겠지. 분명 그럴 것이다.

“단장님! 저입니다!”

그때 누군가 다급히 문을 두드렸다. 이안이 낮게 신음을 흘렸다.

“들어와.”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방금 나간 녀석들이 단장님께서 여인과 동침했다는 헛소리를― 허억!”

들이닥친 청년이 날 보더니 눈을 찢어질 듯 크게 떴다.

“다, 단장님. 정말 여인을 들이셨…….”

“아니야. 젠장, 그럴 리가 없잖아!”

이안이 으르렁거렸다.

그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누군가 내 침대에 이 여잘 밀어 넣었어. 이런 사태를 바란 거겠지.”

그러자 청년이 입을 떡 벌리더니, 곧 골치 아픈 듯 제 이마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이런, 영악하군요……! 소문을 바로잡지 못하면 단장님이 추기경직에 오르는 데에 문제가 생길 겁니다!”

“추기경은 대대로 순결해야만 하니까…… 제기랄.”

이안이 나를 노려보았다. 등줄기로 소름이 바짝바짝 솟았다.

“순순히 실토하는 게 좋을 거다. 누구지? 어디서 보냈지?”

미치겠네.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모든 상황이 전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데, 남자에게서 흘러나오는 살기만큼은 미치도록 생생했다.

‘이러다 나 진짜 죽는 거 아냐?’

돌처럼 굳은 날 바라보며 이안이 혀를 찼다.

“루시안. 내 검을 가져와.”

“예, 단장님.”

루시안. 그 이름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루시안은 분명 소설 속 ‘이안 에스테반’의 충실한 심복이었다.

그러고 보니 남색 머리카락까지 소설 속 ‘루시안’의 묘사와 똑같았다.

아까 내가 환청을 들은 게 아니란 증거가 또 튀어나오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사이, 이안이 루시안에게서 건네받은 검을 천천히 빼 들었다.

곧 차디찬 검 끝이 내 턱을 들어 올렸다.

“배후를 불어.”

이안이 악마처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살고 싶으면.”

‘이 자식 진심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살기는 진짜였다.

생각해. 생각하자! 날 죽이지 못하게 할 방법을 생각해!

나는 가까스로 발휘된 생존 본능으로 입을 벌렸다.

만약 여기가 정말 『성녀님은 사랑을 몰라』 속 세계라면,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잠깐, 성녀! 전 성녀예요!”

“……뭐?”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슬며시 다시 눈을 뜨자, 이안과 루시안이 멍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흡,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외쳤다.

“방금 막 신의 부름을 받고 성당에 떨어진 성녀라고요!”

『성녀님은 사랑을 몰라』 소설 속 세계엔 제목답게 성녀가 존재했다.

신의 부름을 받은 성녀는 잘 살다가도 갑자기 계시를 받고 성당에 소환된다.

말이 소환되는 거지, 사실은 성당 속 아무 데나 뚝 떨어지는 것에 가까웠다. 복도든, 화장실이든, 말 그대로 아무 곳에나.

하지만 그렇게 소환된 성녀는 신의 거룩한 사자로서 극진히 대접받았다.

‘눈앞의 이 인간이 정말 이안이라면, 이곳도 성당 안이겠지!’

급히 짜낸 꾀치고 그럭저럭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한 줄기 희망을 느끼며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새파란 눈동자가 한껏 미심쩍음을 담고 날 노려보았다.

“거짓말 마라.”

“…….”

들켰나?

“손바닥만 한 천 쪼가리만 입고 나타나는 성녀 같은 건 들어 본 적 없다.”

아, 내 옷차림이 좀 그렇긴 하지…….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걸치고 있는 실크 슬립은, 여전히 보는 것만으로도 낯 뜨거워질 만큼 치명적인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맹세코 나는 한 번도 이런 야해 빠진 옷엔 돈을 투자해 본 적이 없었다.

‘이건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옷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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