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무슨 말씀이신가요?”
“남동생과 사이가 좋다고 들었어. 참, 협박하는 건 아니니까 걱정 말고.”
“……공녀님이 무슨 얘길 하실지 알 것 같아요.”
이안의 눈빛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이안 클레버에겐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인 토니는 어려서부터 둘 모두에게 똑같은 교육을 시켰다.
물건을 사고파는 것부터 시작해서 시장의 물가가 어떻게 정해지는지.
그리고 자주 오는 단골 귀족들은 누구인지, 그들이 주로 찾는 품목들은 무엇인지.
기본 교육도 충분히 시켰고, 백화점 운영에 대한 것은 직접 둘을 데리고 다니며 몸소 익히도록 했다.
아버지를 닮아 백화점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남동생 셸먼은 차근차근 일을 배워 나갔다.
그리고 그건 이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토니는 클레버 백화점의 귀빈 응대를 셸먼에게만 맡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안에게는 골드먼트 남작의 초상화를 보여 줬다.
‘이안. 남작 부인이 되면 여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어. 어디 가서 상인이라고 무시받지 않아도 되고, 더러운 꼴도 안 봐도 된단다. 너는 귀족이 되는 거야.’
이안은 아버지가 보여 준 골드먼트 남작의 초상화를 찬찬히 훑어봤다.
짙은 다갈색 머리에 안경을 끼고,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지만 은은하게 감도는 분위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정했다.
클레버 백화점에 몇 번 방문한 적 있는 고객이라 이안은 그의 실물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걸 알고 있었다.
그 댁 하녀 몇몇이 종종 설레는 표정으로 예쁜 레이스 장갑과 양말을 사 가기도 한다는 것 또한.
그럼에도 남작은 본디 온순하고 조용한 성격이라 하녀들에게 손을 대는 법이 없었다고 들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일찍이 가문을 이어받았음에도 품위를 잃지 않고 고고하게 골드먼트 남작가를 지켜 왔다는 것도.
그런 남자가 몇 주 전 제게 꽃을 선물했으니 이런 일이 생기리란 걸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이안은 실망했다.
‘상인으로 살게끔 가르쳐 놓으셨으면서 남작 부인이 되라니요, 아버지.’
‘하지만 좋은 자리가 있고, 그분이 너를 마음에 들어 하시잖니. 귀족으로 살 수 있는 기회란다, 이안.’
‘저는 싫어요.’
‘이안. 좋은 분이시다. 다정하시고, 들려오는 소문에 나쁜 말이라곤 하나도 없었어. 너도 알잖니.’
‘이분이 좋은 사람이니까 결혼을 해야 한다는 건 말이 안 돼요. 저도…….’
이안은 말을 잇지 못했다.
저도 아버지처럼 많은 손님들을 상대하면서 돈을 벌고 싶어요.
처음으로 손님에게 시곗줄을 팔았을 때의 쾌감이 아직도 선명했다.
‘백화점은 걱정하지 마라. 셸먼이 잘해 주고 있잖니. 셸먼이 내 뒤를 잇는다고 해서 너를 저버릴 아이가 아니란 건 너도 알잖아. 이안, 네가 맏이라 걱정이 많은 건 알겠지만 아빠는 네가 고생하지 않고 좋은 집에서 좋은 옷 입으면서 매일 걱정 없이 살았으면 해.’
아버지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다. 셸먼도 누나인 자신을 잘 따르고, 아버지의 사업을 잇고 싶어 하는 착한 동생이었다.
그리고 골드먼트 남작은 누가 봐도 완벽한 남편감이었다.
그래서 더 싫었다.
원망할 이가 아무도 없었다.
성공하고 싶고,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데. 성씨를 바꾸는 게 아니라 클레버로서 더 입지를 다지고 싶은데.
이안은 주먹을 움켜쥐고 토니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없던 일로 해 주세요.’
‘이안! 골드먼트 남작을 거절할 순 없어!’
‘그럼 왜 똑같이 가르치셨어요! 더 큰 사람이 돼라, 손님들과 눈만 마주쳐도 원하는 게 뭔지 알아챌 정도가 돼야 한다! 손익을 따질 때는 정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똑같이! 셸먼과 나란히 앉혀 놓고 가르치셨잖아요!’
이안은 터지려는 눈물을 꾹 참고 토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꿈을 꾸게 하셨으면 기회라도 주셨어야죠.’
그게 벌써 1년 전 일이었다.
골드먼트 남작은 여전히 가끔 백화점에 찾아와 필요한 물건들을 사 갔고, 이안은 종종 자신에게 머무르는 그의 시선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말을 걸진 않았다. 불편해하는 자신을 배려하는 듯했다.
차라리 골드먼트 남작이 다른 사람과 결혼이라도 했으면 아내가 필요했던 것뿐이구나, 라고 납득했겠지만 그는 여전히 혼자였다.
그에겐 다소 미안하지만 결정을 후회하진 않았다.
이안은 그 뒤로도 누가 뭐라 하든지 백화점에 줄기차게 출근했다.
하지만 귀빈들을 모시는 3층으로 올라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네 남동생이 클레버 백화점을 물려받게 되어도, 넌 1층에서 계속 물건을 팔 건가?”
“전 그 일이 적성에 맞아요.”
“그 자리도 맞는 건 아니잖아, 이안.”
이안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나는, 적어도 지금의 솔레아 자리에 앉아 있는 나는 그녀가 원하는 걸 줄 수 있었다.
“네 스스로 네 자리를 만들 수 있도록 돕겠다. 나를 이용해.”
“……공녀님께서 저를 이용하시는 게 아니라요?”
“서로 돕자는 거지. 장사꾼이 장사하면서 손해 보는 일은 없어야 하잖아?”
이안이 픽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뭘 하면 되나요?”
“우린 사업체를 만들 거야, 이안.”
“네?”
“보통의 상인 단체는 대형 사업장을 끼고 있거나, 주 구역을 가지고 있지. 하지만 우린 바닥에서부터 시작해야 돼.”
“……그게 가능할까요? 인맥도 없고, 견제도 많이 받을 텐데요. 자리싸움도 해야 할 거고요.”
“우리는 조금 남보다 잽싸고 치사하게 움직여서 빠르게 돈만 채 간다. 넌 그것만 생각해. 알력 싸움이니 자리다툼, 다른 귀족과의 은밀한 협력관계 그딴 건 내가 생각할게.”
“그럼 상단이 아닌 건가요?”
“상단이란 표현에 더 익숙하니 그 이름을 쓰긴 하겠지만 보통의 상단에서 하는 일 말고도 종합적으로 할 일이 많을 거야. 할 수 있겠어?”
나를 바라보는 이안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네. 할 수 있어요.”
“나도 네가 할 수 있을 거라고 봐.”
활짝 웃은 나는 이안에게 몇 가지를 명령했다.
첫째, 통롤러를 만드는 마법사가 우리 집에 머물고 있으니 그와 함께 상단을 꾸릴 것.
참고로 그는 서대륙 출신으로 제국어를 전혀 할 줄 모르고, 뭔가에 큰 충격을 받았는지 평소에도 말을 잘 하지 않는다고.
그래도 알아듣긴 하니까 의사소통에 큰 문제는 없을 거고, 혹시 손님들에게서 마법을 보여 달라는 요청이 들어오면 모두 거절할 것.
내 설명을 듣던 이안의 이맛살이 미미하게 찡그려졌다.
“왜 그래?”
“아. 제 상단인 줄 알았거든요.”
“네 상단이야. 그 마법사는 통롤러 제작만 담당할 뿐이거든. 그래도 클레버 상단이라고 이름을 지을 순 없으니 새로운 이름을 생각하도록 해.”
그제야 이안이 표정을 풀었다.
둘째, 투들로 자작가가 운영하던 예술 지원 사업의 소속 예술가들이 일자리를 잃었으니 우리가 그들을 선점할 것.
“예술 지원 사업을 하시게요?”
“그것도 베르고에 필요하니까. 차근차근할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우선 석공과 목공들 위주로 찾아서 섭외해 봐. 아, 음악가들도.”
“음악가들까지요?”
“응. 그들한테는 베르고에서 왔다고 해도 돼. 처음에야 좀 꺼리겠지. 베르고니까. 하지만 포기하지 말고 찾아가서 ‘당신이 필요합니다. 소중한 인재님.’ 이렇게 어필해. 3주쯤 뒤엔 상황이 천천히 달라질 테니. 그땐 다들 달라붙어 올 거야.”
“왜 3주 뒤에 사정이 달라지나요?”
“책을 좀 팔아 볼까 하거든.”
“네?”
동그랗게 눈을 뜨고 묻는 이안을 보며 나는 씨익 웃었다.
“앤.”
내 뒤에 서 있던 앤이 가방에서 금화가 가득 든 돈주머니를 꺼냈다.
“셋째. 이게 중요해.”
돈주머니를 활짝 열고 말하자 이안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내게 집중했다.
“3주 안에 빵 터뜨리려면 마케팅이 필요해.”
“……마케, 예?”
“광고. 그래서 우린, 신문사를 살 거다.”
“……네?”
나는 앤이 건네준 신문사 리스트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현재 경영난에 시달리는 곳들이야. 보통은 회사의 주인이 바뀌면, 윗대가리들이 제일 먼저 뭘 하는 줄 아니?”
“……인원 감축.”
“맞아. 그래서 우리는 단 한 명도 자르지 않는 걸 조건으로 내걸 거야. 대신 바로 그, 윗대가리를 자를 거다.”
“그렇게 하더라도 이미 경영난을 겪고 있어서 당장은 원활한 운영이 힘들 텐데요.”
“내가 돈이 많잖니.”
“아무리 그래도 한두 푼 들어가는 게 아닐 거고…….”
“난 돈이 아주 많잖니. 지금도 계속 통롤러가 팔리고 있어. 물론 우리 저택에도 돈이 아주 미어터지게 쌓여 있단다. 내가 어떤 집안의 사람인지 잊었니?”
아.
짧은 신음을 뱉은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문사를 산 뒤에 발행하는 신문마다 광고를 싣는 거야.”
“하지만 공녀님. 사람들은 광고면을 그리 주의 깊게 보지 않아요.”
“소식란에 실을 거야.”
“소식란에요?”
“예를 들어 광고란에 염색 양모 얘기를 하면 무슨 내용이 들어갈까?”
“……화려한 색감, 섬세한 자수…….”
“그렇지. 근데 소식란, 그것도 1면에 염색 양모 기사를 실을 땐 내용을 약간 다르게 하는 거야. 고객층을 파악해서 그들을 자극해야지.”
“어떻게요?”
“제목은, 음……. ‘염색 양모, 황가의 전유물인가?’ 본문 내용엔 화려한 색감과 장인들이 한 땀, 한 땀 수놓은 섬세한 자수, 세상에 하나뿐인 디자인 얘기를 하고, 엄청난 가격대를 대략 써 놓는 거지. 그럼 다른 귀족들이 어떻게 될까?”
“양모를 가지고 싶어서 안달이 나겠죠. 경애하다 못해 숭배하는 황족의 전유물이라니, 갖고 싶잖아요.”
“그렇지.”
“하지만 그렇게 사치를 조장하는 게…… 옳은 일일까요?”
“그래서!”
나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쿵 치고 이어 말했다.
“넷째! 사업체와 함께 복지재단도 운영할 것이다. 내가 아까 말했잖아. 베르고를 위해 일하는 거라고. 난 내 가족들이 굶주린 영주민들한테 목이 따이길 바라진 않거든.”
“이건 너무…….”
“왜? 너무 이상적이야? 말도 안 되는 것 같아?”
잠깐 망설이던 이안은 눈을 부릅뜬 채 허공을 보며 입술을 작게 움직였다.
무언가 계산하는 듯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아니요.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야 걸리겠지만 반년 이후의 베르고의 위상은 지금과 다를 거예요.”
나는 이안을 똑바로 보며 방긋 웃었다.
“역시. 너라면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 타고난 장사꾼이네.”
준비해야 할 다른 것들에 대한 설명을 모두 마친 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을 나서기 전 이안이 나를 붙잡았다.
“왜?”
내 물음에 이안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반드시, 반드시 갚겠습니다.”
“그래, 널 믿을게.”
이안의 굽은 허리는 내가 방을 나설 때까지도 펴지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앤의 입이 댐 터지듯 터져 버렸다.
“세상에나, 아가씨. 그래서 그동안 자꾸 저 혼자 시장 내보내시고, 클레버 집안 하녀들이랑 친해지라고 하셨던 거였어요? 와, 어쩐지.”
몇 걸음 앞서 걷던 앤이 다시 내 옆으로 총총 다가와 물었다.
“아니 그러면 염색 양모 사업은 이안에게 맡기지 않으실 건가요? 다음 주에 커다란 상단의 단주들이 공작가에 오기로 했잖아요. 그게 제일 큰돈이 들어오는 일인데 그것만 빼놓으시게요?”
“그것도 생각이 있어. 처음엔 큰 상단의 이름이 필요해서 그들의 이름을 쓰겠지만, 결국엔 이안이 맡게 될 거야.”
“어떤 계획인지 살짝만 말씀해 주시면 안 돼요?”
“가장 방해가 되는 상단을 완전히 밀어 버릴 거야. 그다음엔 자연스럽게 내 손에 떨어지게 만들어야겠지.”
“와. 무슨 소설 보는 거 같아요.”
공작저가 보이기 시작할 즈음, 내내 조용하던 맬다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공녀님. 그런데 저 여자를 쉽게 믿어도 되는 겁니까? 그 큰돈도 단번에 주시고요.”
나는 뒤돌아서서 그에게 답했다.
“간절한 이에게 기회가 주어졌으면 해. 난 그러지 못했거든.”
“예?”
“……배고프다. 얼른 돌아가자. 맬다도 오늘 고마워. 이 은혜는 꼭 갚을게.”
“아,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멍하니 답하는 맬다를 뒤로하고 공작저를 향해 걸어갔다.
반년.
이안과 내 계산이 일치한다면 앞으로 반년이면 충분했다.
솔레아의 오빠들을 도와주고 나면, 그들에게 받은 사랑을 내가 갚고 나면……. 그땐 후련히 돌아갈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