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폭풍처럼 말을 쏟아 내고 난 뒤 다급히 분위기를 살폈다.
그레이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하, 참. 허허, 참 내. 하, 내가. 하, 진짜. 아, 어떡하냐, 날 이렇게 좋아해 가지고. 하, 오빠를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저거 쥐어박고 싶은데.
능청을 떠는 그레이와는 달리 티온의 얼굴은 타들어 갈 것처럼 빨개졌다.
관자놀이 옆 벌어진 흉터가 시뻘겋게 익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티온은 빨개진 얼굴로 눈을 끔뻑끔뻑 깜빡이다가 티 나지 않을 정도로 미미하게 살짝 웃어 보였다.
저래 놓고 또 아무도 없으면 나를 하늘로 집어 던지겠지. 짐승 같은 놈. 이제 안 믿는다.
헤이먼은 두 주먹을 꾹 쥔 채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어진 얼굴로 부들거리고 있었다.
“……다들 잘, 잘생겼다고 하고, 왜 나는 예쁘다고…….”
부끄러운 건지, 분한 건지 모르겠지만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목과 귓바퀴까지 빨간 걸로 봐선 아마 부끄러운 것 같았다.
분홍 곤듀 완댜님. 이 네 사람 중에선 네가 제일 예쁘게 생겼어. 네 옆에 있는 불곰을 좀 봐.
공작은 아무 말이 없었다.
심지어 표정 변화도 없었다.
내가 말을 쏟아 내기 전의 그 은은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눈꼬리를 접어 아름답게 웃고 있었다.
“그래, 아프진 않은 것 같아 다행이구나. 그래도 피곤할 테니 이만 자리를 비켜 주마.”
침대에서 일어난 공작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옷매무새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꽤 오래.
그렇게 한동안 침대 옆에 서 있다가 자연스럽게 비스듬히 짝다리를 짚더니, 또 잠시 후엔 어깨를 곧게 폈다. 그는 마치 모델처럼 자세를 조금씩 바꾸며 한참을 서 있었다.
“……아빠 뭐 하세요.”
그레이가 삐딱한 목소리로 묻자 공작은 태연한 목소리로 답했다.
“옷이 조금 불편해서. 어서 나가자니까. 다들 왜 가만히 서 있니.”
하지만 정작 그 말을 꺼낸 공작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구두끈이 풀렸군.”
긴 다리를 접어 탁상에 한 발을 올리고 구두끈을 직접 맸다가, 다시 허리를 곧게 펴고 섰다가, 다시 침대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가 천천히 풀었다.
공작님이 샤론 스톤이냐고요.
왜 여기서 원초적 본능을 찍고 계신 거예요.
“아빠, 저 쉬고 싶어요.”
“이런. 알았다.”
내가 쉬고 싶다고 말하고서야 공작은 몸을 움직여 모델처럼 걸어갔다.
다른 오빠들도 공작의 뒤를 따라 방을 나갔다.
창가에 앉아 있는 황녀는 그들이 나가는 걸 멀뚱멀뚱 보고 있기만 했다.
“전하도 이제 슬슬 궁으로 돌아가셔야죠. 배웅할게요.”
“나는?”
“예?”
“난 어떤데?”
마시던 와인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황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걸어왔다.
대체 언제 가져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내 옷을 입고 있었다. 품이 넓고 발목이 훤히 드러나는 디자인의 드레스였다.
침대 가까이에 붙어 선 황녀가 팔짱을 끼고 나를 내려다봤다.
“내가 나사니엘 영윤보다 먼저 널 만났는데. 나는?”
“……전하까지 왜 이러세요.”
“사람은 가끔 유치해지고 싶을 때가 있어. 난 어떻냐고 물었어.”
“예뻐요.”
“왜 그리 대충 대답해? 생각은 하고 말하는 거야?”
“진짜예요. 전하 처음 봤을 때 진짜 예쁘고 분위기 있어서 고풍스러운 미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
황녀가 끼고 있던 팔짱을 서서히 풀며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네. 진심이에요. 지금은 조금 유치하고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처음 봤을 때는 딱 동화책에 나오는 공주님 같은 느낌이었어요.”
“난 공주가 아니야. 황녀다.”
“아니, 그! 관용적으로, 아유. 네. 황녀 전하.”
침대에 걸터앉은 황녀가 나와 눈을 맞추곤 씩 웃었다.
“아니. 그냥 랏샤다. 너는 랏샤라고 불러.”
“랏샤.”
“응.”
“이제 좀 가세요.”
“매정하긴.”
픽 웃은 황녀는 곧장 침대에서 일어났다.
“꾀병이었든 아니었든 일단은 쉬어. 잠을 제대로 못 잔 건 티 나니까.”
“그래요?”
“응. 눈 밑이 시커매.”
긴 손가락으로 제 눈 밑을 가리킨 황녀는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래도 전하가 가시는데 어떻게 자고 있어요. 일어날게요.”
“출발하기 전에 사람 올려 보낼 테니까 일단 자고 있어. 보아하니 어제 구해 온 책 읽느라 제대로 못 잔 거 같은데.”
“……알겠어요.”
“나를 길들이려면 잠을 푹 자 둬야 할 거야.”
“아, 정말! 아니라니까요!”
카라샤펠은 킬킬 웃으며 손을 휘휘 흔들어 인사하고는 나가 버렸다.
못 미덥긴 하지만 황녀가 사람을 보내 준다고 했으니까 일단 낮잠을 조금 자 볼까.
양모 공방도 잘 돌아가고 있고, 사라한테 책도 전해 줬고, 저택으로 찾아올 상단주들에게 할 말도 정리해 뒀고…….
침대에 누워 스르륵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뜨니 이미 해가 져 버린 저녁이었다.
“어?”
급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자 앤이 내 방 앞 복도를 청소하고 있었다.
“황녀 전하는?”
“아까 가셨어요.”
“왜 날 안 깨웠어?”
“깨우지 말라셨어요.”
“그래도 깨우지. 황족이 가는데 내가 드러누워서 자고 있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빗자루를 손에 꼭 쥔 앤이 울상이 되어 말했다.
“……황녀 전하도, 공작님도, 도련님들도 모두 깨우지 말라고 하시는데 제가 어떻게 깨워요. 저도 무섭단 말이에요…….”
“……그건 그렇지. 그래. 어쩔 수 없었겠네.”
나는 한숨을 쉬며 방으로 돌아왔다.
뭐랄까, 집이 전체적으로 위아래가 없네.
그래도 간만에 푹 자서인지 기분은 훨씬 개운했다.
잘된 일이었다.
오늘 저녁엔 할 일이 많았으니까.
나는 다시 방문을 열고 앤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앤. 옷 좀 챙겨 줘.”
“무슨 옷이요?”
“눈에 안 띄는 옷.”
“……나가시게요?”
말없이 빙긋 웃기만 하자 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래도 어떡하니. 돈 벌려면 나가야지. 세상살이가 그렇단다.
앤과 함께 후원을 지나 저택을 빙 둘러 걸어가 작은 뒷문으로 나가려는 순간 누군가가 우리를 불러 세웠다.
“어디 가십니까.”
아마도 저택을 지키는 경비병인 듯했다.
낯선 목소리에 흠칫 놀란 앤이 뒤돌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 하하. 아하하. 잠깐 볼일이 있어서요. 금방 돌아올 거예요.”
“위험하지 않겠어요? 별일 없으면 내일 가지.”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하는 경비병은 다행히도 나를 못 알아보는 것 같았다.
그때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뭔데.”
“아. 맬다 님. 하녀 둘이 볼일이 있어 나간다고 해서요.”
맬다라면 티온 휘하에 있는 기사였다.
저번에 나한테 띠껍게 말한 놈이지.
맬다는 전처럼 삐딱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을 건넸다.
“외출하는 건가? 밤에 돌아다니면 위험할 텐데. 그냥 나가지 말지 그러세요들.”
앤은 내 눈치를 한 번 슬쩍 보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오늘 꼭 나가야 해요.”
“뭐 그리 급한 일이 있다고. 어, 그쪽 혹시 공녀님 담당 하녀 아닌가? 옆엔 누구야?”
맬다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저놈한테 들키면 못 나가게 막는 건 물론이고, 티온이랑 공작님한테 고자질까지 할 텐데.
하지만 만나기로 약속한 자가 있어 꼭 나가야 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얘들아, 빠따 준비해.”
‘응!’
‘때리게?’
‘때릴 거야?’
여차하면 기절시킨 후에 기억을 날려야지.
품이 넓은 망토 안에서 마력 빠따를 들고 대기했다.
정신이 온전할 때보다 깜짝 놀라게 한 다음에 기절시키는 게 더 효과가 빠르고 좋긴 했다.
심기일전하던 그때 갑자기 바람이 불어서 망토가 펄럭였다.
쓰고 있던 모자까지 뒤로 벗겨지는 바람에 맬다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심지어 그의 시선이 내가 손에 쥐고 있는 마력 몽둥이에 닿은 것 같았다.
……들켰구나.
얼른 다시 모자를 쓰고 기절시킬 요량으로 빠따를 망토 밖으로 꺼내려는데 맬다가 소리쳤다.
“아! 그, 그분이시구나! 보내 드, 아니, 그냥 가게 해! 볼일이 있대! 바쁜 사람이야! 어, 되게 바빠!”
얼른 마력 빠따를 작게 만들어 다시 허리춤에 매달았다.
“맬다 님이 아시는 하녀예요?”
경비병이 의뭉스러운 눈으로 묻자 맬다는 이를 악물고 그에게 말했다.
“어. 그러니까 그냥 가게 하시, 하라고. 바쁜 사람이라니까?”
“……아니, 왜 갑자기 화를 내세요.”
맬다가 갑자기 왜 저러지?
티온이 저번에 단단히 한 소리 했나 보다. 하긴, 하루 종일 기합을 받으면 없던 충성심도 생기기 마련이지.
그대로 곧장 뒷문으로 나가려는 찰나 경비병이 다시 말을 얹었다.
“그래도 여자 둘이 나가는 건 좀 위험.”
“내가 갈게! 내가 같이 갈 테니까 그만 좀 붙잡아! 너, 넌 여기만 지킬 거야? 너 저택이 얼마나 넓은지 알아, 어? 네 담당 구역이 여기밖에 없어? 사명감 같은 거 없냐고, 너한테는! 어, 이 자식아! 죽고 싶어? 너 오늘 먹은 저녁이 네 마지막 식사가 됐으면 좋겠어?”
“뭘 또 그렇게까지 말하세요. 알았어요. 그럼 맬다 님이 같이 다녀오시든가요. 참, 별일도 아닌 걸로 화를 내시네.”
경비병은 투덜거리며 자리를 떴다.
맬다의 얼굴은 살인마라도 마주친 것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맬다?”
내 목소리에 멍청히 서 있던 맬다가 온몸에 힘을 주고 차렷 자세를 취했다.
“예! 베르고 소속 티온 기사단의 맬다입니다! 공녀님! 시키실 일 있으시면 뭐든지 말씀하십시오!”
……티온이 고문이라도 했나. 갑자기 왜 이러는지 이해가 안 가네.
“맬다. 우리 둘이서만 다녀올게요. 날 싫어하잖아요.”
내 말이 총알이라도 되는지 맬다는 입을 벌리며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절대 싫어하지 않습니다! 저택을 지키시려는 기개와 담대함에 존경을 표하고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래요?”
“네. 그렇습니다. 한 치의 거짓도 없습니다.”
하지만 맬다의 모습은 나를 존경한다기보다는…… 그냥 겁을 먹은 사람 같았다.
마치 내가 그를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내가 좀 진하게 생기긴 했지만 그 정도로 무서운 인상은 아닌데 왜 저렇게 쫄지?
둘이서만 가는 것보다 맬다 님과 같이 가는 게 훨씬 안전하고 좋지 않겠냐는 앤의 설득 같은 애원에 결국 우리는 맬다와 함께 뒷문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따라오던 맬다는 ‘……혼자 가도 안전하실 텐데.’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기사인 그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영지 치안이 굉장히 좋나 보다.
그녀가 정한 장소는 의외로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술집과 연결된 작은 여관이었다.
술 냄새가 진동하는 연결 통로를 걸어가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여관방의 문을 열었다.
“오셨습니까.”
“꽤 정신없는 곳을 골랐네.”
“예. 눈에 띄는 걸 안 좋아하실 듯해서요. 술에 취한 자들은 남을 눈여겨보지 않거든요. 이렇게 시끄러운 곳에선 더더욱.”
여전히 치밀한 사람이었다.
“은밀하게 진행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 너를 찾았다. 이안 클레버.”
나는 싱긋 웃으며 망토를 벗었다.
“나를 아나?”
흘러내리는 붉은 머리카락을 바라보는 이안의 두 눈이 잠깐 커졌다.
그녀는 애써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는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귀한 분이실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베르고의 공녀님이실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앉아서 얘기할까?”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이안과 마주 보고 앉았다.
방금 전의 동요를 금세 가라앉힌 건지 이안은 처음 봤을 때처럼 차분한 얼굴이었다.
“이안. 우린 이제 한배를 탈 거야.”
잠깐 말이 없던 이안의 진한 갈색 눈이 나를 향했다.
“공녀님 정도의 지위를 가지신 분이면 누구든 손에 넣을 수 있으실 텐데 왜 저를 찾으셨는지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네게는 딱 나 정도의 뒷배가 필요하잖아. 안 그래?”
뒷조사는 처음 해 봤는데 생각보다 적성에 맞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