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192)

85화

단주들이 한자리에 모인 날, 나는 깔끔한 검은 셔츠와 바지를 입고 그들의 앞에 섰다.

“시간을 말씀드리지도 않았는데 다들 서둘러 와 주셨네요.”

생긋 웃으며 말했지만 그들은 내게 딱히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공녀님이 부르시면 우리 같은 상인들이야 와야지 어쩌겠습니까.”

“저희가 힘이 있나요.”

개중 몇몇은 실실 쪼개며 말하긴 했지만 비아냥조였다.

“무슨 그런 섭한 말씀을. 베르고뿐 아니라 제국 전체를 주름잡고 있는 상단의 단주분들을 모신 건데요. 차라도 한잔하면서 얘기 나눌까요.”

우란 상단의 단주는 익히 들어왔던 것처럼 풍채가 좋은 사내였다.

“차는 거래를 맺은 단주와 둘이서 차분히 드셨어도 됐을 텐데요. 바쁜 사람들을 모으신 이유 먼저 말씀해 주시죠.”

우란의 말에 찻잔을 들어 올리던 클레버와 프랑크가 눈치를 살피더니 다시 찻잔을 슬쩍 내려놓았다.

“예, 큼. 그, 그러시지요. 공녀님.”

“저희도 꽤나 바쁜 사람들이라.”

“공녀님은 모르시겠지만 상단 일이라는 게 단주 없이는 돌아가지가 않거든요.”

“뭐, 잘 모르시니까 굳이 가만 놔둬도 잘 팔리는 양모를 꾸며 가며 파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한마디씩 말을 얹은 단주들이 소리 죽여 킬킬 웃었다.

재미있는 농담을 하네.

“우란은 이런 자리에서도 위세를 뽐내고 싶은 모양인가 봅니다. 공작가의 정찬실에서, 그것도 공녀에게.”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말하자 우란은 언제 비꼬았냐는 듯 얼굴을 활짝 펴고 말했다.

“좋은 거래를 빨리해 보고 싶어 꺼낸 말이지요. 자, 어서 물품을 보여 주시죠.”

옆에 서 있던 앤에게 살짝 눈짓하자 그녀가 얼른 창가로 다가가 묶어 놓았던 줄을 당겨 풀었다.

그러자 커다란 사이즈의 검은 양모가 블라인드처럼 차르르 내려왔다.

그와 동시에 정찬실 내부의 모든 불을 꺼뜨렸다.

귓가에서 정령들이 소리를 질렀다.

‘불 껐어!’

‘말한 딱 그 타이밍 맞춰서 껐어!’

‘우리가 껐어!’

‘우린 멋져!’

‘우린 해냈어!’

내 귀는 떨어져 나갈 것처럼 시끄러웠지만 단주들은 모두 창문의 빛을 가린 검은 양모에 혼을 뺏긴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 법했다.

검은 양모 위에 마력을 담은 빛나는 노란 색실을 이용해 자수를 넣었으니까.

은은하게 빛나는 샛노란 색실들은 화려하게 반짝였다.

규칙적인 패턴으로 자수가 놓인 부분이 있는가 하면 어느 부분은 마치 검은 밤하늘 위에 떠오른 수많은 별과 달처럼 보이기도 했다.

“재회의 언덕이라는 작품이에요. 아름답죠?”

내 질문에 누군가가 홀린 듯 답했다.

“……이건 예술이야…….”

“네, 사실 예술에 가깝죠. 집에 손님을 초대할 때 벽에 걸어 두면 참 멋지겠죠?”

짝짝 두 번 손바닥을 두드리자 순식간에 정찬실이 밝아졌다.

‘우리가 켰어!’

‘박수 두 번 듣고 켰어!’

‘한 번에 켰어!’

‘우린 대단해!’

‘좋아!’

얘들아, 조용히 좀. 나 일하잖니.

터질 것 같은 귀를 티 나지 않게 잠깐 막았다가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불이 꺼지면 환상적이지만……. 불을 켜면, 뭐, 평범한 자수에 불과하군요. 자수 실력은 꽤 좋지만 말입니다.”

우란의 말에 앤에게 다시 한번 눈짓하자 그녀가 고개를 꾸벅 숙인 후, 양모의 끄트머리를 잡고 살짝 흔들었다.

그러자 새카만 양모 전체가 마치 파도가 일듯 일렁이며 번쩍였고, 노란색의 자수들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입체적으로 울렁거렸다.

어두운 밤에 반짝거리며 날아다니는 반딧불이 같은 움직임이었다.

“……이게 무슨!”

다들 퍽 놀란 눈치였다.

뤼블러스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목을 쭉 뺀 채, 눈을 한 번 비비고는 앤에게 손을 뻗으며 명령했다.

“이봐! 한 번만 더. 한 번 더 해 봐!”

“제 하녀 이름은 앤입니다. 함부로 부르지 말아 주셨으면 하네요. 여긴 내 집이잖습니까?”

뤼블러스는 잠깐 나를 바라보더니 발을 동동 구르며 앤에게 부탁했다.

“앤. 한 번만 더 움직여 주게. 얼른!”

뤼블러스의 말에 앤이 무표정으로 또 양모를 흔들었다.

아까처럼 자수들이 일제히 반짝거리며 응접실을 낭만적인 분위기로 만들었다.

대부분의 단주들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구경했다.

마치 꿈속을 유영하는 것 같은 멍청한 얼굴들이었다.

어느새 대다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제품에 대한 확인은 이 정도면 되었을까요? 앉아서 얘기하시죠.”

누군가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기도 했고, 또 어떤 이는 아까까진 거들떠보지도 않던 차를 벌컥벌컥 들이마시기도 했다.

뤼블러스와 클레버, 키온은 여전히 양모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나를 보고 있는 자는 우란뿐이었다.

그는 묵묵히 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양모에 마력을 담으셨습니까?”

“그럼. 난 평범한 건 질색이라. 돈도 안 될 것 같고.”

거들먹거리며 말했음에도 우란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눈앞의 돈다발을 안겨 줄 양모에 정신이 팔린 거겠지.

양모를 힐긋거리던 우란이 나를 보며 다소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마력의 유지 기간이 얼마나 됩니까?”

“평생.”

“……가격은 어떻게 됩니까?”

“양모의 크기와 자수의 양에 따라 다르겠지. 그리고 잘 팔리는 장인의 디자인엔 가격을 좀 더 붙일 예정이야. 이 정도 크기에, 이 정도 자수 실력이라면 무난하게 300만 제르쯤 받으면 되려나.”

누군가 헙!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공녀님이 저택에서만 생활하셔서 물가를 잘 모르시나 본데 300만 제르면 4인 가족의 1년 치 생활비입니다. 이리 비싸면 누가 사겠습니까?”

“내가 원하는 고객층은 평민이 아닙니다.”

나는 내게 질문한 이를 똑바로 노려보며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얹은 채 몸을 앞으로 숙였다.

“이상하네, 난 오늘 귀족들을 상대하는 상단만 골라 불렀는데. 왜 저자는 나를 물정 모르는 온실 속 뜨끈한 난초 취급을 할까?”

혼잣말처럼 말하긴 했지만 명백히 상대를 겨냥한 말이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입구에 서 있던 맬다가 다가와 그의 어깨를 짚었다.

“일어나시죠.”

“이게 무슨! 저기, 고, 공녀님! 오해십니다. 가격이 믿기지가 않아서! 아니, 놀라, 놀라서 그랬습니다! 기회를 주십쇼!”

나는 맬다를 쳐다보며 고개를 까딱 움직였다.

그는 단주를 잡고 끌어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맬다가 며칠 전부터 내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심복처럼 굴기에 정찬실에 함께 데리고 들어왔는데, 잘한 선택이었다.

눈치도 빠르고 인상도 더러워서 위협용으로 세워 놓기에 딱이었다.

물론 인상은 우리 첫째 오빠가 제일 험악하지만 티온은 생김새와 달리 마음이 약하니까.

이름 모를 남자가 끌려 나간 뒤 우란이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거래하고 싶습니다.”

“조건은?”

“저희에게 독점권을 주신다면 이 제국뿐 아니라 타국의 황가에도 저 빛나는 양모를 팔아 드리지요. 그뿐입니까. 대륙 너머에서도 베르고의 이름을 모르는 자들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양모에 영혼이 털려 있던 뤼블러스가 냉큼 끼어들었다.

“우리에게 독점권을 주십시오! 공녀님! 전체 물품의 판매율은 우란이 높을지도 모르나 저런 고급품은 귀족이나 황가를 대상으로 팔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쪽으로는 저희가 더 잘 맞습니다. 수수료도 6 대 4까지 맞춰 드리겠습니다.”

“어머, 그런가요? 내가 6?”

깜짝 놀란 척하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자 뤼블러스가 당황스럽다는 듯 허허 웃었다.

“하하. 제작만 공녀님 측에서 하시고 유통부터 판매까지 다 저희가 하는데 당연히 저희가 6이지요.”

“짜네. 다른 이는 없나?”

구석에 있던 토번이 소리쳤다.

“저희는 5 대 5까지 가능합니다! 무역이라면 저희가 이 중 제일 이름이 나 있으니 믿고 맡겨 주십시오!”

클레버가 번쩍 손을 들었다.

“공녀님이 6! 어떠십니까! 백화점 입구에서부터 잘 보이도록 걸어 놓고!”

“백화점 같은 소리 하네. 어중이떠중이 귀족들만 가는 곳 주제에. 우리는 딱 7로 모시겠습니다, 공녀님.”

“폴른! 공녀님 앞에서 어중이떠중이 귀족이라니! 그래 놓고 7 소리가 잘도 나오는군!”

“베르고의 공녀님에 비하면 그렇다, 그 소리지.”

정신없는 와중에 우란이 내게 다시 딜을 던졌다.

“저희와 하시죠. 5 대 5까지 맞춰 드리겠습니다.”

“계산을 잘 못하시나? 방금 다른 쪽에서 7까지 불렀잖아요?”

“공녀님이 원하시는 매출, 그 이상을 해낼 수 있는 건 우란뿐인 걸 아시지 않습니까?”

“아쉽넹. 난 내가 8 정도는 될 줄 알았지 뭐야. 장인들 월급도 내가 주고, 제작하는 장소도 다 내 돈으로 마련하고, 들어가는 마력도 다 내 돈인데. 내가 5밖에 안 된다니. 눈물이 절로 나. 흑흑흑.”

장난스럽게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억지로 우는 소리를 내자 우란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 고위 귀족들을 대상으로 팔 생각이라고 하셨는데 물건이 아무리 좋아도 베르고의 물품이라 하면 누가 구매하겠습니까? 그러니 직접 상단을 운영하시지 않고 저희를 찾아 주신 거 아닙니까. 5 그 이하는 안 됩니다.”

내 앞에서 직접적으로 베르고를 까 내리는 우란의 발언에 장내가 얼어붙었다.

요 몇 달 동안의 내 행보에 대해선 다들 익히 들어 알고 있겠지.

베르고를 욕하는 자가 있으면 따귀를 후려쳤고, 여태 조용히 참았던 오빠들도 이젠 더 이상 참지 않고 움직였다.

그러니 당연히 공작님의 귀에도 들어갔지. 베르고를 함부로 놀렸던 가문이 몇 개나 정리되었다.

심지어 황자까지도.

우란의 단주는, 지금 제 목을 걸고 염색 양모의 독점권을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양아치 새끼. 어떻게 수익의 50%를 달라고 하니.

나는 속내를 감추고 미소를 띤 채 그를 보며 말했다.

“솔직하군.”

“장사를 하려면 배짱이 있어야지요.”

“좋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지. 계약서는…… 한 2주쯤 뒤에 들고 오는 게 어때? 검토해 본 후에 직접 찾아가지.”

다른 이들이 아쉬운 듯 한숨을 토해 내긴 했으나 어쨌든 이 중 고위 귀족들을 가장 많이 상대하는 건 우란이었다.

뤼블러스 입장에선 아쉬울 수도 있겠지만, 직접 단주들을 불러 모아 보니 확실히 감이 왔다.

쳐 내야 할 것은 우란이다.

이야기가 마무리되어 다들 슬슬 정리하고 일어서려던 찰나, 우란이 ‘아.’ 하는 탄성을 내뱉고는 질문했다.

“양모에 주입된 마력이 평생 간다는 걸 보장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이름으론 보장이 안 되나?”

우란이 시커먼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을 접어 웃으며 간교하게 말했다.

“오늘 공녀님이 보여 주신 담대한 배포에는 꽤 놀랐지만, 그와 별개로 공녀님이 데리고 계신다는 마법사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가늠이 안 가서 말입니다. 사업을 하려면 신뢰가 중요하잖습니까.”

나는 굳은 얼굴로 앤에게 명령했다.

“마법사를 데려와.”

앤은 곧장 정찬실을 빠져나갔다.

돈은 영문도 모른 채 이곳으로 오겠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남들 앞에서 제국어로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괜찮겠지.

일단 데려온 다음에 시선을 돌리고 정령들에게 부탁하면 되니까.

잠시 후, 돈이 사람들로 가득 찬 정찬실 안으로 들어왔다.

“자네가 마법사인가? 반갑군. 내가 곧 자네의 동업자 될 사람이야.”

우란이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지만 돈은 그를 더럽다는 듯 흘겨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심지어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쯧.’ 하는 혀 차는 소리까지 났다.

꼿꼿이 편 허리와 떡 벌어진 어깨, 그리고 절대 고개 숙이지 않겠다는 듯 뻣뻣하게 목을 세운 모습이라니.

그전에도 이렇게 행동하라고 교육을 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자연스럽게 싹수가 멸종하진 않았었는데…….

돈은 꼭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