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쁘띠 베어 티온의 귀환 파티가 시작됐다.
일찍부터 와 있던 황녀는 사람들을 모아 두고 근황을 전하는 척 통롤러 얘기를 꺼냈다.
“허리가 자주 아팠는데 요즘은 좀 괜찮더군요.”
“어머, 전하. 저도 그랬어요!”
“확실히 아침이랑 저녁에 한 번씩 돌리고 자면 개운하더라고요.”
“사그리나 영애도 그래요? 난 아침에 붓는 게 훨씬 덜하더라고요.”
“저도요!”
입꼬리가 저절로 스멀스멀 올라갔다.
그것이 바로 문명의 이기, 폼롤러의 중세 버전 통롤러입니다.
히죽거리는 날 봤는지 황녀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그녀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비스듬히 웃더니 보란 듯이 말했다.
“베르고 영애. 가까이 와.”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영애들은 나를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처음으로 간 파티에선 으깨진 은행같이 생긴 놈과 생태 교란종 황소개구리 귀족에게 싸움을 걸었고, 두 번째로 간 파티에선 슐로든의 뺨을 후려쳤으니 그럴 만도 하지.
영애들은 부채를 빠르게 펄럭거리다가 이내 애써 태연한 척하며 부채를 쥔 손을 아래로 내렸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영애들이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저택이 굉장히 크고 아름다워요. 진작 파티를 여셨다면 좋았을 텐데요.”
“정말요, 왜 그간 파티를 안 열었는지 궁금할 정도예요.”
헤이먼이랑 그레이는 파티에서 매번 춤 신청을 거절당했다던데, 우리 집에서 파티를 열면 오기나 할 거였냐고.
오늘도 황녀가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왔으면서.
“베르고 영애가 이렇게나 건강해지셨으니 정말 다행이에요. 공작님도 마음이 놓이시겠어요.”
내용은 그렇지 않은데 이상하게 비꼬는 것처럼 들렸다.
자식이 건강해지면 부모가 마음이 놓이는 건 당연한 일인데도 꼭 베르고의 후계 자리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아니야, 내가 너무 예민해서 그럴 거야.
애써 좋게 생각하며 대답하려던 그때, 방금 그 말을 꺼냈던 영애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본인이 주최한 파티는 처음이라 그러신가 봐요.”
“뭐가요?”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빙긋이 웃으며 제 목을 어루만졌다.
목이 어떻다는 거지?
지금 내 목엔 로또 종이가 들어 있는 로켓 목걸이와 그것과 세트인 것처럼 어울리는 줄이 긴 은색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목걸이를 안 한 것도 아니고 뭐가 문제지.
굳은 얼굴로 영애를 가만히 쳐다보자 황녀가 나직하게 말하며 끼어들었다.
“영애. 섭섭해.”
“네? 대체 뭐가요?”
카라샤펠 황녀는 그 우아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입술을 삐죽이며 삐친 척을 했다.
“왜 내가 선물한 사파이어 목걸이 안 했어. 귀걸이도 같이 줬잖아.”
그걸 언제 줬어요, 라고 말하려던 찰나 다른 영애가 참견했다.
“세상에나. 황녀님이 사파이어 목걸이를요?”
“네, 우린 아주 친한 친구거든요. 제 궁에 베르고 영애가 자주 놀러 온다는 건 알죠?”
그러고 보니 황녀가 아까부터 내게만 반말을 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친분을 과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림처럼 부드럽게 웃은 황녀는 뒤에서 대기 중인 하녀에게 손짓했다.
앤이 가까이 다가오자 황녀는 재빠른 손짓으로 내 목에 걸린 목걸이 두 개를 모두 풀어내곤 앤에게 건넸다.
“이건 도로 영애 방에 가져다 놔.”
황녀의 명령에 앤은 얼른 내 목걸이들을 받아 들고 사라졌다.
“전하……!”
“쉿. 시키는 대로 해. 영애.”
조용히 귓가에 속삭인 황녀는 다시 다른 사람들을 향해 조금 속상한 듯 서글프게 웃어 보였다.
눈을 내리떠 새파란 눈동자를 반쯤 감추고 긴 속눈썹으로 그늘을 만들며 웃는 그녀의 미소를 보니 웬만한 비극은 우습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선물한 목걸이가 오늘 입은 드레스에 어울리지 않아서 안 한 거구나. 그렇지?”
“아……. 네. 당연하죠.”
얼떨결에 대답하자 카라샤펠 황녀가 빙그레 웃으며 제가 차고 있던 목걸이를 끌러서는 손수 내 목에 채워 줬다.
“저, 전하?”
당황한 내 목소리를 듣고도 카라샤펠은 태연했다.
“자, 오늘 당신 드레스가 진한 초록색이니까 이 에메랄드는 잘 어울리지?”
내 앞에 서 있는, 아니, 이 연회장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의 눈빛이 순식간에 이쪽을 향했다.
황족이 제 손으로 직접 선물한 보석을 걸어 주었다.
그것도 유력한 황위 계승자인 황녀가.
이건 명백한 정치적 의미였다.
베르고는 지금도, 앞으로도 자신의 것이라는 듯 황녀는 오만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이런 미친 사람을 봤나.
태어날 때부터 브레이크가 필요 없던 사람은 다 이런 건가.
나는 어색하게 웃다가 황녀를 데리고 테라스로 향했다.
“영애? 보통 테라스는 연인이 드나드는 장소잖아. 난 친구 하자고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녀가 한 걸음 더 내게 다가왔다.
“친구 신청을 거절한 이유가 이거였다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데. 후계 문제도 있고 하니. 흠, 제국이 발칵 뒤집히겠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그럴 리가 있나요. 좀 떨어져서 얘기해 주세요.”
“영애는 내게 너무 몰인정해. 랏샤라고 불러 주지도 않고 말이야.”
손수건을 꺼내 애초에 흐르지도 않은 눈물을 닦는 양 눈꼬리를 콕콕 찍어 내는 모습이 어디에도 비할 바 없이 아름답긴 했지만 한편으론 어처구니가 없었다.
“전하. 저는 애런 황자님처럼 제 오빠들을 무시하는 사람의 편에 서고픈 생각이 없어요.”
“여기서 애런이 왜 나오지? 지금 우리 얘기 중인데.”
카라샤펠이 머리를 갸우뚱 기울이며 한쪽 입꼬리만 올려 비스듬히 웃었다.
“황위 때문에 이러시는 거잖아요. 전 어차피 지난번에 애런 황자님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황녀 전하의 편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굳이 이렇게 과시하는 행동은 하지 않으셔도…….”
“아니.”
황녀는 들고 있던 손수건을 휙 하고 내 앞으로 날렸다.
얼떨결에 날아오는 손수건을 잡는 순간, 그녀가 한 손으로 내 손목을 잡아당겼다.
카라샤펠의 곧은 시선이 나를 응시했다.
“어차피, 어쩔 수 없이, 굳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 너의 의지로 날 지지해. 솔레아.”
“……그건.”
“네가 나를 선택해.”
파란색의 투명한 눈동자가 달을 등지고도 맑게 빛났다.
그때,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 파티의 주인공인 티온이 디에르고 공작과 함께 등장한 것이었다.
백발에 가까운 은색 머리인 디에르고 공작은 깔끔한 느낌의 짙은 남색 코트를 입고 있었지만 워낙 귀티가 줄줄 흐르는 사람이었다.
파티의 규모가 꽤 큰 편이라 젊고 어린 귀족들도 많이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디에르고 공작의 주변에만 조명을 비추는 것처럼 그는 눈에 확 들어왔다.
“……와.”
나도 모르게 감탄을 자아내고 있는데 누군가 내 턱을 손끝으로 잡아 고개를 돌렸다.
“나와 얘기 중이었는데, 솔레아.”
“아……. 죄송합니다. 근데 저희 아버지가 오셨잖아요. 그리고 전하도 곧 춤을 추셔야 할 거고요.”
티온의 귀환을 축하하는 파티니 그는 누군가에게 춤을 청해야 했고, 이 자리에서 가장 고귀한 사람인 황녀가 제일 먼저 요청을 받을 것이 뻔했다.
황녀는 한쪽 눈썹을 비스듬히 올리더니 창 너머의 티온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카라샤펠 황녀의 파란 눈에 냉정한 기운이 감돌았다.
“알았어. 네가 언제 나를 랏샤라 불러 줄지는 모르겠지만 기다려 보지.”
말을 끝낸 황녀는 몸을 돌려 테라스를 나서려다가 잠깐 멈추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뒤돌았다.
“그리고 친구가 되고 싶단 말은 진심이었어. 물론 지금도.”
싱긋 웃으며 카라샤펠 황녀는 그대로 테라스를 빠져나갔다.
나는 벙찐 채로 그녀가 남기고 간 손수건을 쥐고 가만히 서 있었다.
아니, 이 사람아.
황권 다툼 하는 후계자가 공작가에 들락거리면 당연히 그런 뜻인 줄 알지.
누가 진짜 친구 하자는 줄 알겠어요.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가 공작이 될 걸 염두에 두고 자길 지지하라고 말했으면서.
그러면 뭐, 처음엔 베르고가 필요해서 접근했는데 나를 보는 순간 첫눈에 반해서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이라도 생겼다는 거야 뭐야.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짜증이 살짝 나긴 했지만 지금 이렇게 속으로 황녀 뒷담화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테라스에서 빠져나와 연회장 건물의 외벽에 있는 계단을 빠르게 올라갔다.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났는데 시간이 없었다. 티온이 바로 춤을 청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빨리 올라가야 했다.
가장 높은 창문 근처까지 올라오고서야 나는 숨을 고르며 정령들을 불러냈다.
“얘들아, 나와 봐.”
‘우리?’
‘우리?’
‘나?’
‘얘들아랬잖아! 우리지!’
‘우리가 누구야.’
‘나는 나인걸!’
‘누구도 대신하지 말아.’
‘너 왜 갑자기 노래를 불러?’
‘임시 주인 일기장에 써 있던데? 나는 나인걸 누구도 대신하지 말아! 라고 불러야 돼!’
‘나도 알아! 봤어!’
“뭐? 내 노래방 애창곡이 왜 일기장에 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너희가 해 줄 일이 있어.”
아시아의 별 얘기는 나중에 하고 지금은 조명이 필요했다.
“너희 빛 쏠 수 있지? 정령이 한 거 들키면 안 되니까 조명인 것처럼 보여야 돼.”
‘그런 거 우리 잘하지!’
‘우리 잘해!’
‘우린 못하는 거 없어!’
정령들이 또 저들끼리 신이 났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여러 명의 아이들이 한꺼번에 떠드는 것처럼 순식간에 주변이 왁자지껄해졌다.
“자, 집중의 박수를!”
“짝짝짝!”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정령들이 박수 세 번을 치며 내 시야 바로 앞까지 날아올랐다.
“티온한테? 조명 무슨 색?”
“우리는 모든 색 다 할 수 있어! 빨간 노을색! 주황 노을색! 노랑 노을색! 보라 노을색!”
“왜 노을 얘기만 해! 나는 하얀 조명이 좋아!”
“그럼 너 혼자 다 해!”
“이씨!”
티격태격하던 정령 둘이 갑자기 달라붙더니 치고받고 싸우기 시작했다.
“자, 그만. 그만하세요. 조명은 혼자서 못 해. 그러니까 친구들끼리 싸우지 말고 잘 해결해야 돼. 너희 손잡고 화해해.”
“……미안해.”
“미안해.”
둘의 싸움을 말린 나는 분위기가 잠잠해지자마자 다시 정령들을 집중시킨 뒤 말했다.
“조명의 색이 너무 자주 바뀌면 사람들이 오히려 마력량을 궁금해하며 더 집중할 거야. ‘어디에서 온 마력이길래 이렇게 양이 많지?’ 할 거라고. 너희는 물론 대단하지만 난 들키면 안 되잖아. 무슨 말인지 이해했지?”
“응!”
손바닥만 한 정령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빛의 세기는 적당하게. 티온이 사람들 눈에 확 들어올 정도로. 자, 여기서 보면 티온 보이지?”
창문을 통해 티온을 확인한 정령들은 확신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할 수 있어! 임시 주인! 우리가 할 수 있어!”
“그래, 너희만 믿을게! 여기서 보다가 티온이 카라샤펠 황녀님한테 손 내밀면 그때 빰! 하고 쏘는 거야.”
“응! 우리가 할게!”
마침 티온의 옷은 조명발을 잘 받는 흰색이었다.
나도 슬쩍 창문을 통해 연회장 안을 들여다봤다.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는 척 서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모두들 춤이 시작되길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런데 티온은 주변을 둘러보기만 할 뿐 황녀에게 춤을 권하지 않았다.
쟤 대체 뭐 하는 거야.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