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192)

63화

땅을 박차고 달리는 스테파니의 진동이 내게도 전해져 온몸이 거칠게 흔들렸다.

내 귓가에 숨소리와 함께 심장 박동이 울리는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모든 소음이 멎은 듯했다.

땅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도, 긴장한 숨소리도, 쿵쿵 뛰는 박동들도,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잎이 부대끼는 주변의 소음들까지 전부 다.

공장에서 숙식하며 일하던 때, 저녁 시간에 밖으로 나가 바라본 풍경은 어땠었지?

손에 50만 원을 쥔 채 술집과 고깃집이 즐비한 언덕을 올라가며 봤던 건물 사이의 하늘도 이랬던가?

한겨울에 내복만 입고 집에서 쫓겨나 달동네를 뛰어다니다 넘어져 굴렀을 때의 진동이 이와 비슷했었나?

어느새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중 어느 것도 오늘과 같지 않았다.

아, 나는 외로웠구나. 매 순간을 그저 견디면서 살아왔구나.

한참을 달린 후 그레이는 말의 고삐를 잡아당기며 서서히 속도를 늦췄다.

이미 마차가 있는 곳과는 꽤 멀어져 있었다.

말 머리를 돌린 그레이는 다시 마차가 있는 곳으로 향하며 낮은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네가 답답하다고 할 때 언제든지 데려와 줄 수 있어.”

고맙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바람을 잔뜩 삼킨 탓인지 목이 메어 쉽사리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힘들 때 기대도 괜찮다고. 버텨 줄 힘 있으니까. 내가 못 미덥겠지만 너 하나는 괜찮아. 스테파니도 두 명 버티는데 내가 못 하겠냐.”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얌전히 걷던 스테파니가 다시 푸르르릉 길게 투레질을 했다.

픽 웃은 그레이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혼자서 무리하지 마. 내가 뒤에 있을게.”

“……응.”

“매일 그렇게 밤새우지 않아도, 심지어 네가 건강하지 않아도 괜찮, 아. 아니다. 이왕이면 건강해라. 아무튼, 크흠!”

헛기침을 한 후 그레이는 다시 말을 이었다.

“기대라고. 혹시 넘어지면 내가 잡아 줄 수 있으니까. 오빠잖아. 알았어?”

“……알았어.”

“우냐?”

“좀! 산통 깨지 마!”

“우는 거 같은데?”

굳이 내 얼굴을 확인하려고 몸을 비트는 그레이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가 나를 따라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 울었는데, 울었는데!”

“아, 안 울었다고!”

“눈물 자국 같은데!”

“침 흘렸다! 멍청아!”

“아하하하! 말 처음 타면 침 흘릴 수도 있지!”

큰 소리로 웃은 그레이는 나를 말 위에서 내려 줄 때에도 웃음기를 거두지 않았다.

“침 자국 닦아. 다른 사람들이 보면 뭐라고 하겠니, 동생아.”

“에이씨, 진짜.”

“저는 에이씨가 아니라 그레이입니다.”

“그래, 이 새끼야.”

“너는 오빠한테 그래, 이 새끼야가 뭐니.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오빠한테.”

“누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한대?!”

“나 아니야? 그럼 헤이먼이야? 설마 티온은 아닐 거 아냐. 큰형이 제일 좋아? 어, 솔레아. 대답해 봐. 어디 가. 도망가냐?”

나를 졸졸 따라오던 그레이는 말을 다시 뒤에 있는 기사들에게 건네주곤 얼른 마차에 올라탔다.

말을 내가 몬 것도 아닌데 너무 피곤했다.

천천히 마차가 출발하자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그레이가 내 옆으로 옮겨 앉았다.

그러고는 아까의 숄로 내 무릎 위를 덮어 주곤 내 머리를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안 자. 곧 도착이잖아…….”

“곧 도착이니까 자도 돼.”

괜찮은데, 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졸음이 몰려와 참을 수 없었다.

서서히 감기려는 눈을 떠 슬쩍 올려다본 그레이의 눈은 평소와는 달리 반달로 곱게 접혀 있었다.

“잘 자라, 솔레아.”

나들이에다 말까지 탔으니 피곤할 거라며 그레이는 얼른 씻고 자라면서 나를 내 방에 밀어 넣곤 제 방으로 돌아갔다.

그의 말처럼 간만에 감성적이 된 데다 처음으로 말을 타서인지 온몸이 무거웠다.

“아가씨, 바로 주무실 거죠?”

목욕을 마친 뒤 욕실에서 나가자 침대 위를 정리하던 앤이 물었다.

“……아. 아니, 잠깐만. 나 이것만 주고 올게.”

나들이에 들고 갔던 가방에서 안경집을 꺼내 챙기고 티온의 방으로 향했다.

두 번의 노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열렸다.

잠깐 굳은 눈으로 정면을 보던 티온은 이내 미간을 확 찌푸리며 나를 내려다봤다.

아무래도 키가 많이 차이 나다 보니 바로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티온은 눈살을 찌푸린 채 나를 한참 노려봤다.

“티온. 그냥 내 추측일 수도 있는데, 이거 필요할 것 같아서 사 왔어.”

안경집을 내밀자 그는 아무런 말 없이 그것을 받아 들곤 무심히 열어 보았다.

흉터 많은 거친 손에 들린 안경은 너무 연약해 보였다.

“눈이 좀 안 좋은 것 같아서.”

안경을 쓰지 않고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하는 티온 때문에 민망해져서 마구 말을 퍼부었다.

“아니, 어렸을 때 초상화 보니까 안경을 쓰고 있더라고. 시력이 갑자기 좋아지는 경우는 드무니까 혹시 아직도 눈이 안 좋지 않을까 해서. 그래서 일단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사 왔지. 티온은 모르겠지만 내가 건강해진 뒤로 이것저것 해서 돈을 꽤 모았어. 아니, 돈이 진짜 많다는 건 아니고, 양모 자수에 투자한 돈 때문에 또이또이지만. 아, 또이또이 모르겠구나. 그게…….”

아, 젠장. 오랜만에 덩치 큰 위압적인 남자 앞에 섰더니 괜히 긴장되네.

말을 하는 와중에도 발끝이 금방이라도 도망갈 것처럼 오그라들었다.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고, 압도적으로 덩치 큰 남자와 단둘이 있으니 공포감이 밀려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냥 그레이 데리고 올걸.

실없이 떠들던 입술이 다시 꾹 닫혔다.

“……고맙습니다.”

“뭐?”

하도 묵직하게 낮은 목소리라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번쩍 고개를 들자 티온이 얼른 내 시선을 피했다.

서서히 퍼지던 공포감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나를 때리지 않을 사람이라는 믿음이 은연중에 피어났다.

안경은 여전히 그의 손에 들린 채였다.

“……티온. 안경 써 봐.”

“아니, 괜찮…… 괜찮습니다.”

“혹시 내가 틀린 거였어? 눈 좋아? 아니, 그리고 왜 존댓말을 해요?”

“아가씨라서…….”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자 티온은 빠르게 물러났다.

방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등지고 있었지만 언뜻 보인 귀가 분명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혹시 진짜로 그레이 말처럼 숫기가 없는 거였나?

“내가 왜 아가씨야, 티온 동생이잖아. 티온. 안경 써 봐.”

자꾸 재촉하자 결국 티온은 마지못해 느리게 안경을 썼다.

그의 적색 눈이 일순간 동그랗게 뜨였다.

“아…….”

“어때? 잘 보여? 잘 보이면 반말해 봐, 티온.”

늘 찌푸려져 있던 미간이 곧게 펴졌다.

티온은 보일 듯 말 듯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리곤 슬쩍 나를 봤다가 얼른 시선을 돌리며 답했다.

“잘 보입, 잘 보여.”

이젠 귓바퀴와 눈 밑, 관자놀이 쪽의 벌어진 흉터까지 새빨갰다.

“진짜로 숫기가 없는 거야? 낯을 가려? 티온. 나 봐 봐. 나 보면서 고맙다고 해 봐.”

얼른 안경을 벗은 티온은 방 안쪽으로 한 걸음 더 물러났다.

“고맙습, 고맙습다. 아니, ……고맙다.”

짙은 나무색이던 그의 얼굴이 어느새 터질 듯 붉게 변해 있었다.

세상에, 진짜로 쑥스러움이 많은 거였어.

저절로 입이 벌어져 나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았다.

내 놀란 표정을 힐긋 바라본 티온은 또다시 얼른 고개를 돌렸다.

웃느라 잠깐 일그러졌던 흉터가 아래로 쭉 늘어졌다.

표정보다 흉터의 모양으로 감정을 알아채는 게 더 쉽겠네.

“놀라서 미안해. 티온이 이렇게 쑥스러움이 많은 줄 몰랐어.”

“……괜찮……다.”

“너무 피하진 마. 아가씨 아니고 동생이잖아. 그리고 안경은 선물이야.”

티온은 가만히 나를 보더니, 고개를 숙여 안경을 다시 보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가 이내 꾹 닫았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덤덤하게 말했다.

“무사히 돌아온 거 정말 축하해. 그리고 내가 망토 도착할 때까지 무리하게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기다려 주고, 입고 돌아와 줘서 고마워. 덥진 않았어?”

티온은 안경집을 꾹 쥔 채로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았다.”

반말해 달라고 했더니 사이보그가 돼 버렸네.

덩치도 있으니 터미네이터에 더 가까운 것 같아.

“아까 낮에 왜 나 보고 놀랐어?”

“……빨간 머리카락의 다른 사람인 줄 알고……. 건강해져서 다행이다.”

“그랬구나. 그럼 나 이만 갈게. 잘 자, 티온.”

내가 떠나려 하자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나를 바라보던 티온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또다시 얼른 고개를 돌려 버렸다.

“우리 천천히 친해지자. 안녕.”

마지막 인사를 한 후 그대로 발걸음을 옮기자 바로 문이 쿵 하고 세게 닫혔다.

그렇게 낯설고 싫은가. 하긴, 그럴 수도 있지. 몇 년 만에 집에 오기도 했고, 티온이 하는 거 보니까 솔레아랑 원래 친했던 것 같지도 않네.

갑자기 정령들이 반짝거리며 빛나기 시작했다.

나는 깜짝 놀라 하나를 손에 잡아 들었다.

“아직 사람들 다 자고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래!”

‘하지만 티온 너무 귀여워!’

‘맞아! 착해!’

‘선한 사람!’

‘저런 사람 옆에 있으면 마력이 보송보송해져!’

빛을 내는 정령이 하나둘씩 늘어나서 나는 그들을 모조리 품에 끌어안고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아 버렸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티온이 왜?”

정령들은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곤 방싯방싯 웃으며 말을 꺼냈다.

“솔레아한테 ‘너도 잘 자.’라고 말하려고 문고리로 손을 뻗었는데 손이랑 발이 같이 나갔대!”

“고장 난 장난감처럼 발이 휙! 나가서 실수로 문을 발로 차 버렸대!”

“응! 그래서 문 쾅 닫혔대!”

“네가 실망해서 화났을까 봐 다시 문 못 열었대!”

“울상이야! 흉터가 또 아래로 추욱 처졌다!”

“그래서 혼잣말로 잘 자, 했어!”

세상에나.

소심한 사람한테 너무 소심하다고 놀라면 실례일 텐데.

그런데 정말 생각보다 더하네.

심지어 그 얼굴에.

“아니, 아니야. 얼굴로 사람 판단하면 안 되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놈의 집구석.

얼굴이랑 성격이랑 맞는 인간이 아무도 없어.

“그럼 지금 티온은 뭐 하고 있어?”

정령들은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다가 또 까르르 웃어 댔다.

“말해 봐. 뭐 하고 있어?”

환하게 빛나는 정령이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경 쓰고 있어!”

“앗! 안경 벗었어!”

“다시 썼어!”

“거울 봤어!”

“웃었어!”

“다시 조금 울상!”

“앗, 일어났다! 온다, 온다!”

정령들은 금세 모습을 감추고 사라졌다.

묵직하지만 가지런한 발걸음 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그러나 노크 소리는 한참이 지나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 문 열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튀어 올라 도망갈 것 같아서 나는 그가 노크하길 가만히 참고 기다렸다.

한참 후에야 정갈한 노크 소리가 박자에 맞춰 정확하게 두 번 울렸다.

“네.”

짧게 대답하고 바로 문을 열자 안경을 쓴 티온이 나를 보고 가만히 서 있다가 빠르게 말했다.

“잘 자.”

그 말 하러 일부러 와 준 거냐고 놀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왠지 또 새빨개질 것 같았다.

“고마워, 티온도.”

자세히 봐야 알 수 있을 정도로 짧게 고개를 끄덕인 티온은 자로 잰 듯 정확하게 몸을 돌려 다시 자신의 방으로 걸어갔다.

나는 서서히 문을 닫았다.

미쳤네. 너무 귀엽잖아.

알래스카 불곰같이 생겼고, 파괴력도 그에 준하는데 하는 짓은 쁘띠 큐티 테디 베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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