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5/192)

65화

몇 분이나 지났지만 티온은 황녀의 근처에 다가가지 않았다.

멀찍이 선 채로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왜 저러는 거야.”

초조해진 내가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하자 정령들이 다시 수선을 피워 댔다.

“사람 무서운 티온!”

“낯가리는 티온!”

“숫기 없는 티온!”

“숫기가 뭐야?!”

“……수컷의 기운?”

“그런 거였어?!”

“그런 거구나! 수컷의 기운!”

“티온한테 수컷의 기운이 없어?”

“……불쌍해.”

“불쌍한 사람. 우리가 마력 조금 주자!”

“좋아!”

또 저들끼리 이상한 결론을 낸 정령들이 갑자기 빛을 모으기 시작하더니 창문 너머 멀찍이 아래에 선 티온을 향해 쏘기 시작했다.

“잠깐만! 얘들아! 아직 아니잖아!”

“하지만 티온은 숫기가 없는걸!”

“수컷의 기운이 없는걸!”

불퉁한 얼굴로 볼을 잔뜩 부풀린 정령들이 나를 쳐다봤다.

얼른 티온을 보자 그는 갑자기 제 머리 위로 쏟아진 흰 조명에 당황한 듯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어린아이 머리 크기만 한 커다란 주먹을 꽉 말아 쥔 티온은 대단히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주변 사람들이 주춤거리며 조금씩 그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여러분. 그 사람 지금 긴장한 거예요.

숫기 없다는 걸 알고 나니까 제대로 보이네.

나는 한숨을 내쉰 후 정령들에게 말했다.

“숫기 없다는 건 쑥스러움이 많다는 뜻이야. 내향적이라는 뜻이라고.”

“하지만 저렇게 쑥스러움이 많은데 사람을 어떻게 죽였지?”

“아! 처음 보는 사람이라서 죽였나 봐!”

“그런가 봐!”

“낯을 많이 가리니까 친해지기 전에 죽였구나!”

이상한 결론을 내린 정령들이 또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집중의 박수를!”

“짝짝짝!”

나는 다시 정령들을 집중시키고 말했다.

“전쟁은 정치적 이유가 있으니 그랬겠지. 물론 사람을 죽인 건 잘못된 일이지만 그곳에선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자기가 죽으니까. 그러니까 티온을 미친 살인마로 만들지 마. 낯 가려서 친해지기 전에 죽였다니 그게 말이야, 똥이야.”

“응!”

“응!”

“응!”

“대답은 동시에 한 번만 하면 돼. 그러니까 여기서 쭉 보다가 티온이 춤 요청하면 그때 빛 쏘면 돼. 알았지?”

“응!”

“그래. 나 내려간다!”

“응!”

정령들만 두고 가는 게 걱정되었지만 이대로 위에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티온이 안 움직이는 이유가 분명 있을 텐데.

가서 한마디라도 해야겠어.

황녀의 자존심 문제도 있으니까 안 친한 사람일지라도 일단 황녀와 춤을 춰야 한다고 말해야지.

나는 빠르게 발걸음을 옮겨 다시 연회장으로 향했다.

커다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들 중 한 명은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 반은 더 큰 티온이었다.

깔끔하게 세팅된 잿빛 회색 머리카락 아래의 피처럼 붉은 눈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관자놀이 옆 흉터까지 구겨질 정도로 인상을 찌푸린 험악한 표정의 티온은 나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곤 품 안에서 안경을 꺼내 눈에 썼다.

찡그려졌던 그의 미간이 곧게 펴지며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치 안심이라도 한 것처럼 티온은 미미하게 웃으며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가 묵직한 발걸음을 옮겨 내게 다가왔다.

뭐, 뭐야. 왜 나한테 오지?

티온은 내 앞에 멈춰 서서 오른손을 내밀며 작게 말했다.

“……춤…….”

“뭐?”

“춤 같이 추자.”

“어? 나랑?”

당황한 눈동자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위아래로 흔들렸다.

그때 완벽히 타이밍을 맞춰 티온의 머리 위로 하얀 조명이 반짝하고 환하게 켜졌다.

바닥에 깔린 하얀 타일 덕분에 반사광까지 받은 티온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티온. 나 춤 잘 못 추는데.”

“아……. 응. 미안.”

올라가 있던 티온의 입꼬리가 아주 느리게 다시 내려갔다.

어쩐지 몹쓸 짓을 한 기분이었다.

천천히 내려가는 오른손을 나도 모르게 덥석 붙잡고 말았다.

“그냥 추자. 최선을 다해 볼게.”

그제야 티온은 안심한 듯 나를 힐긋 보곤 귀를 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얕게 끄덕거렸다.

아이고, 우리 쁘띠 불곰. 어떡하려고 이래.

슬쩍 황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입가에 지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묘하게 굳은 시선으로 티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황족이라 자기가 제일 먼저 시선을 받지 않으면 화나는 거구나.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들은 다 저런 식이니까.

하……. 망했다. 내 거래처. 내 광고 모델.

속으로 쓴 눈물을 삼키며 티온과 함께 연회장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티온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손을 맞잡고 작게 속삭였다.

“나도 잘 못 춰.”

“……나만 할까.”

난 이런 격식 있는 자리에서 춤추는 게 처음이라고.

배워 둘 걸 그랬다.

지난번 황녀 전하의 탄일 파티에선 그레이와 춤을 추려던 순간에 애런 황자가 말을 거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나와 버렸고, 그 이후론 내내 바빠서 춤을 배울 시간이 없었다.

초조한 내 눈빛을 봤는지 멀찍이 서 있던 그레이가 악단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지휘자의 귀에다 뭐라 속삭였다.

뭘 주문하든 내가 춤을 출 수 있을 리 없는데.

걱정이 가득한 얼굴을 봤는지 티온의 낯빛도 어두워졌다.

“……아가씨. 그냥 쉬셔도 돼요.”

“왜 또 존댓말을 해, 티온. 그런 거 아니야. 좀 걱정돼서 그래. 춤추기 싫은 거 아니니까 아가씨라고 부르지 마.”

“응.”

가까이 선 티온이 안경 너머의 새빨간 눈을 살짝 접으며 미미하게 웃었다.

그 순간,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굉장히 느린 음악이 물 흐르듯 부드럽게 연주됐다.

티온은 자연스럽게 나를 리드하며 속삭였다.

“나 잡고, ……발만 따라와.”

“어, 으응.”

나도 모르게 발을 보기 위해 고개를 숙이자 티온이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 봐. 아가, ……솔레아.”

아가 솔레아가 뭐야.

픽 웃으며 티온을 올려다보자 그는 눈을 위로 치켜떠 버렸다.

“보라며. 왜 눈을 피해.”

대답은 없었지만 내 허리에 둘려 있는 바위 같은 팔은 충실히 제 역할을 해냈다.

박자에 맞춰 나를 끌고 갔다가 몸을 돌리고, 다시 당겼다가 풀기를 반복했다.

생전 처음 춤을 춰 보는 나도 주춤주춤 따라서 발을 옮기며 춤을 출 수 있을 정도의 느린 음악과 간단한 동작이었다.

춤을 꽤 춘 것 같은데 음악이 끝나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음악이 빨라졌다.

“어? 뭐, 뭐야?”

당황해 주변을 둘러보려는 찰나, 누군가 내 손을 잡아채더니 몸을 휙 하고 돌렸다.

그레이였다.

“형. 이제 파트너 바꿔야지.”

“……아, 그래.”

한 걸음 물러선 티온에게 씩 웃어 준 그레이는 빨라진 음악에 맞춰 발을 빠르게 움직이며 나를 팽이처럼 돌렸다가 휙 하고 당겼다.

얼결에 뱅그르르 돌면서 제자리로 돌아와 허리를 뒤로 꺾으며 그레이의 팔에 기댔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놈이 기어이 한 곡을 빼곡히 춤출 작정인지 가만히 있지 않고 쉴 새 없이 발을 이리저리 옮겼다.

“나랑 발 반대쪽으로, 그렇지. 엇갈리듯.”

“아니, 무슨, 춤을 이렇게 춰!”

“빠르면 신나 보이니까 티 안 나고 좋잖아.”

하지만 큰 음악 소리에도 무대에 나와 춤을 추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수군거리는 영애와 젊은 남자 하나가 보였다.

……또 욕하고 있는 거구나.

속이 상했다.

내가 춤만 잘 췄어도 고상한 파티에서 이런 신나는 음악 따위가 연주되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레이, 나 그냥 들어갈 테니까 이제 그냥 평범한 춤 추…….”

빠르게 움직이던 발을 멈추려던 순간, 황녀가 디에르고 공작의 손을 잡은 채 무대로 들어서고 있었다.

특유의 당당하고 오만한 얼굴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내리깔아 보고 있었다.

마치 이 무대 위를 정벌하러 온 사람 같았다.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디에르고 공작은 갑자기 황녀와 춤을 추게 됐음에도 전혀 당황한 티를 내지 않고 카라샤펠 황녀의 손을 잡은 채 무대로 올라와 음악가들에게 손짓했다.

음악의 박자가 아주 조금 느리게 바뀌었다. 하지만 특유의 신나는 분위기는 그대로였다.

공작과 황녀는 마치 미리 맞춰 보기라도 한 것처럼 빠른 속도로 화려하고 정확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마냥 구경만 하고 있기엔 나 역시 아직 그레이가 이끄는 대로 몸을 움직이는 중이었다.

그레이는 내게 발이 몇 번이나 밟혔음에도 짜증 한 번 내지 않,

“야. 너 이럴 거면 그냥 맨발로 춰. 구두 굽으로 남의 발 아작 내지 말고.”

“나 춤 못 추는 거 알면서도 지가 잡아 놓고 왜 성질을 내?”

“이렇게 못 출 줄 알았냐? 어휴, 방금 태어난 애도 너보다 잘하겠다.”

“그러면 방금 태어난 애랑 추시든가.”

아웅다웅 그레이와 싸우다 보니 어느새 긴장이 풀려 굳은 듯 움직이던 팔다리가 휙휙 뻗어 나갔다.

그때 갑자기 또 내 손이 다른 누군가에게 잡히며 몸이 휙 돌아갔다.

이번엔 헤이먼이었다.

“조금 늦었어. 미안.”

“나야 뭐, 괜찮…… 왁!”

헤이먼은 아예 나를 들어 내 두 발을 제 구두 위에 올리곤 미끄러지듯 춤을 춰 댔다.

“무겁잖아!”

“괜찮아.”

어느새 공작과 황녀를 따라 하나둘 무대 위로 오른 사람들도 빠른 음악에 맞춰 웃으며 춤을 추고 있었다.

무대를 가득 채운 이들은 박자에 맞춰 파트너를 바꿨지만 나는 아까부터 계속 헤이먼, 그레이, 티온에게 이리저리 돌려지고 있었다.

“저기 남자 귀족들 쌔고 쌨는데 왜 난 너희랑만 계속 추는 거야?”

내 물음에 턱을 호두처럼 구긴 그레이가 나를 익살스럽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 춤 거지같이 추는 거 들킬까 봐 이러는 거잖아. 너는 왜 오빠들의 배려를 무시하니.”

“뭐?!”

짜증을 내려는 순간 티온이 나를 번쩍 들어 공중에서 휙 하고 돌린 뒤 바닥에 내려놓았다.

“……처음인데 잘 춰. 괜찮아.”

“말 잘했어, 티온. 짬 날 때 그레이 주먹으로 한 대 쳐 줘. 아주 그냥 나만 보면 놀려 먹기 바빠 가지고.”

티온은 배시시 웃으며 말없이 내 손을 잡고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릴 뿐이었다.

그 뒤로도 티온, 그레이, 헤이먼 순서로 파트너가 바뀌었는데 이번에 내 손을 잡은 건 공작이었다.

“공, 아버지.”

“그래, 우리 공딸.”

내 말실수를 그대로 받아치며 공작은 그림처럼 웃었다.

“아빠랑도 춤춰 줄 거지?”

“……네.”

어색하게 아버지에게 한 발 다가서자 그는 금세 내 허리를 잡고 발을 빠르게 움직였다.

“역사 선생도, 지리 선생도 거절했지만 춤은 선생이 있어야겠지?”

연회장 가득 큰 음악 소리가 울리고 있었음에도 디에르고의 나직한 음성은 곧장 내 귀에 들려왔다.

그래도 춤 배울 시간이 없는데.

머릿속으로 일정을 정리하는 걸 눈치챘는지 공작은 잠깐 두 손을 뗐다가 다시 잡는 그 짧은 사이에 손가락을 튕겨 내 이마를 때렸다.

“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공작은 픽 웃으며 답했다.

“아빠가 가르쳐 주마. 우리 둘 다 바쁘니 그런 핑계라도 있어야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지. 라트엘이 뭐라고 하면 다락에 가두자고. 응?”

장난기 넘치게 웃는 모습은 세 아이의 아버지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

네 아이의 아버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의 농담에 내가 소리 내 웃어 버리자 디에르고 공작 역시 보라색 눈을 접어 웃었다.

가만히 나를 보던 공작은 잔잔히 미소 지은 채 말했다.

“웃는 얼굴이 네 엄마와 똑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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