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다행히 공작은 나완 달리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침대 옆에 앉아 있는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솔레아!”
다급한 눈빛 속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빠져나가기라도 할까 봐 걱정된다는 듯 힘주어 손을 잡은 탓에 아팠지만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네, 저 여기 있어요.”
“괜찮니? 몸은? 아픈 곳은? 세상에. 3일이나 눈을 뜨지 않아서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밥은? 뭐라도 먹어야 하지 않겠니. 물부터 마셔야 하는 거…….”
“진정하세요. 저 물도 마셨고, 아직 제대로 된 식사는 무리라 묽은 수프부터 먹었어요.”
“그래, 그랬구나.”
자기가 기절한 건 생각도 안 드는지 공작은 내 손을 부여잡고 연신 내 걱정만 해 댔다.
더 아픈 곳은 없는지, 머리가 아프진 않은지, 소화는 잘 됐는지 등등.
“전 정말 괜찮아요.”
“다행이구나. 의술사들이 하나같이 마력이 통하지 않는다고 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쓰러져 있을 때도 비슷한 말을 들었는데.
왜 그런 거지.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쳤을 때는 의술사의 도움으로 금방 나았었는데.
설마 시간이 꽤 흘렀기 때문에 내 영혼이 솔레아의 몸에 완전히 스며든 건가.
그래서 마력이 없는 한국에서의 몸의 영향을 받게 된 거라면 조금 이해가 갔다.
일어나서 다행이라며 두 손으로 내 손을 꼭 잡고 다독이던 공작은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다.
“헤이먼은! 헤이먼은 정신을 차렸니?”
“아니요, 아직.”
나도 정신을 차린 직후 사람을 불러 공작님을 침대로 옮긴 뒤 가장 먼저 헤이먼에게 찾아갔다.
내가 쓰러져 있을 때 내게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물어보려 했지만 그는 파리하게 질린 낯으로 침대에 누운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말을 걸어도 듣지 못하는 듯 미동도 없이 누워 있기만 했다.
헤이먼의 소식을 들은 공작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침대에서 완전히 일어났다.
“방금 깨셨잖아요. 좀 더 누워 계세요.”
무심코 공작의 옷소매를 잡았다.
그는 부드럽게 부서지듯 웃으며 허리를 숙여 내 이마에 짧게 입 맞췄다.
“걱정해 줘서 고맙구나. 그래도 헤이먼이 걱정되니까 다녀오마.”
싱긋 웃어 보인 공작은 언제 기절했냐는 듯 성큼성큼 방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고리를 잡은 그는 멈칫하며 서더니 뒤돌아 내게 물었다.
“그런데 아까 일어나면서 뭐라고 소리쳤던 거니? ……너무 놀라서 제대로 듣지 못했는데.”
“아…….”
나도 모르게 머리가 아래로 숙여졌다.
“……고요.”
“응?”
“……마시라고, 했어요.”
“잘 안 들리는데. 무슨 나쁜 꿈이라도 꿨었니?”
공작이 다시 내 쪽으로 다가오려 해 나는 쪽팔림을 무릅쓰고 큰 소리로 말했다.
“울지 마시라고 했어요!”
“아.”
동그란 보라색 두 눈을 크게 뜬 공작은 눈을 깜빡이며 나를 보다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솔레아.”
“네?”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공작은 헛기침을 뱉으며 목을 가다듬더니 멀찍이서 말했다.
“모든 게 낯선 네 입장에선 내가 그저 나이 많은 아저씨라 불편할 수도 있겠더구나. 아빠가 사과할게.”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아니야, 갑자기 불쑥 친하게 굴었으니 놀랄 만도 하지.”
머쓱한 듯 웃는 그의 말대로 내게 그는 그냥 한국말을 잘하는 외국인 모델 간지 아저씨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솔레아는 기억을 잃은 딸이었다.
18년을 키워 온, 사랑해 마지않는 가족.
“어떻게 해야 네가 날 덜 불편해할까 생각을 해 봤는데, 넌 기억이 없으니 사실 날 처음 보는 거 아니겠니.”
턱을 매만지며 공작은 장난기 가득하게 씩 웃었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공작은 두 손으로 허리를 짚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천천히 친해지고 싶어서 아빠는 이제부터 너한테 존댓말을 쓰기로 했단다! 아니, 했습니다.”
이건 무슨 소리야.
“괜찮아요! 그렇게까지 신경 안 쓰셔도 돼요!”
“또, 또! 그건 버릇입니다.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은 서운하니까 앞으로는 되도록 투정을 많이 부리십시오, 알겠습니까.”
교관님 이러지 마세요.
“공작님. 제발 그냥 평소처럼 해 주세요.”
“아닙니다. 딸이 나를 편하게 생각할 때까지는 존댓말을 쓸 겁니다. 알겠습니까.”
아, 교관님. 이러지 마시라고요.
중세 시대 놀러 왔어억!
본 교관은 솔레아에게 실망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교관은 착한 아빠 교관이 될 수도 있고, 슬퍼서 삐뚤어진 교관이 될 수도 있다. 알겠습니까악!
잠깐 존댓말 하다 말겠지, 생각하겠지만 본 교관은 끝까지 할 겁니다. 알겠습니까악!
머릿속에서 자꾸 이 다정한 공작님이 어울리지도 않게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 연상됐다.
“공작님.”
“예, 따님. 말씀하십시오.”
뒷짐을 진 채 씩 웃고 있는 공작은 난처해하는 내 얼굴에 재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저 이제 진짜 괜찮아요. 내일 같이 산책해요.”
“그렇습니까? 약속했습니다. 그럼 아빠는 아들한테 가 봐야겠습니다.”
존댓말을 왜 자꾸 하는 거야, 진짜.
머리를 긁다가 혹시나 싶어서 문을 열고 나가는 공작을 작게 불러 봤다.
“다녀오세요, ……아빠.”
움찔 멈춰 선 공작은 뒤돌며 환하게 웃었다.
“그래, 아빠 다녀올게. 쉬고 있으렴.”
복도를 걸어가는 공작의 뒷모습이 한결 가벼워 보였다.
이틀 뒤, 마법사 이달론이 저택에 찾아왔다.
그는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한 뒤 헤이먼의 방으로 향했다.
왜 갑자기 헤이먼이 쓰러졌고, 어떻게 알고 찾아왔냐며 공작이 이달론을 붙잡고 묻자 그는 헤이먼의 상태를 슬쩍 본 후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마법을 많이 썼나 보군요.”
꺼림칙한 대답이었지만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달론은 데려온 종자에게 헤이먼을 안아 들고 저택의 지하로 향하도록 시켰다.
시체처럼 축 늘어진 헤이먼이 종자에게 들려 지하로 옮겨지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공작의 뒷모습은 무력하기 그지없었다.
공작은 지하와 연결된 계단 입구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았다.
“공작님, 이달론이 나오길 기다리시는 거예요?”
내 질문에 쓴웃음을 지은 공작은 애써 밝게 대답했다.
“네, 그럴 겁니다. 헤이먼이 일어날 때 아빠가 옆에 있어 줘야죠.”
아직 입에 아빠 소리가 붙지 않아 공작님이라 부른 탓에 그는 또 내게 존댓말로 대답했다.
며칠 새 볼이 팰 정도로 마른 공작의 얼굴을 말이 아니었다.
자식들이 번갈아 아프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듯했다.
“……아빠, 끼니 잘 챙겨 드세요. 말랐어요.”
“고마워, 딸.”
내게 힘없이 웃어 보인 공작은 다시 지하로 향하는 계단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 봐야겠어.
왜 내가 기절했을 때, 이달론이 와선 안 됐는지. 저 해초 머리 가짜 늙은이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알아야겠어.
저택을 빠져나와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이 넓은 곳에 지하로 향하는 문이 저기 하나밖에 없을 리가 없는데.
저택의 후미진 구석까지 걸어가자 나무로 만들어진 오래된 문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 이런 거 있을 줄 알았어.”
한쪽 문고리를 잡고 힘을 줘서 당기자 오래된 문이 끄다다닥, 하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열렸다.
먼지 냄새와 곰팡이가 핀 듯 퀴퀴하고 습기 가득한 냄새가 코를 가득 찔러 왔다.
돌로 만들어진 계단을 조심스럽게 밟으며 내려가자 지하의 정문이 보였다.
이달론이 데려온 종자는 문 바로 앞이 아닌 멀찍이 떨어진 코너에 의자를 두고 앉아 있었다.
구두를 벗고, 살금살금 걸어 커다란 문을 열었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은 생각보다 훨씬 부드럽게 열렸다.
사방이 밀폐된 공간임에도 안쪽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 나왔다.
휘날리던 내 머리카락과 드레스가 잠잠해진 후 안으로 한 발씩 천천히 들어가자 온통 컴컴한 시야에 쓰러진 헤이먼이 들어왔다.
“헤이먼!”
헤이먼을 향해 뛰어가려는 찰나, 무언가가 나를 가로막았다.
거대한 벽이었다.
잠시 후 이달론의 목소리가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웅웅 울리며 들려왔다.
“이런. 제 마법 수업은 비공개인데요, 공녀님.”
“들어왔는데 어쩌라고요. 그럼 그쪽이 나가시든가.”
“어떻게 들어왔지? 분명히 결계가 쳐져 있었을 텐데.”
“이 벽 어떻게 부수지?”
“제 말이 안 들리시나 보네요.”
“무시하는 건데. 늙어서 눈치가 먼저 뒤졌나 봐?”
앞에 있는 투명한 벽을 통통 두드렸다. 워낙 단단해서 이 정도론 깨질 것 같지도 않았다.
이거 힘으론 못 부수나? 난 마법 그런 거 못 하는데.
차가운 바닥에 쓰러진 헤이먼은 괴로운 듯 온 얼굴을 찌푸린 채 몸을 비틀고 있었다.
“헤이먼, 괜찮아?”
일단 주먹질이라도 해 보자.
그레이가 가르쳐 준 대로.
발목부터 허리, 어깨까지 돌리면서 주먹에 힘을 싣는 거야.
몇 번 허공에 대고 주먹질을 연습한 후 벽을 향해 내질렀다.
벽은 그대로 가루처럼 바사삭 부서졌다. 아플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와, 역시.
(마)법보다 가까운 주먹.
한국이나 여기나 주먹질이 더 빠르긴 하구나.
변하지 않는 삶의 진리를 마음에 새기며 헤이먼에게 달려갔다.
쓰러진 헤이먼의 앞에 선 해초 머리 이달론이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벽을 어떻게 부순 거지?”
“입 닫고 저기 서서 혼자 5분 동안 잘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정말 이상하긴 하다.
고작 운동 한두 달 했다고 마법으로 만든 벽을 때려 부술 수가 있나?
의구심이 들긴 했지만 일단 쓰러진 사람이 먼저였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이달론을 등진 후 헤이먼을 살폈다.
헤이먼은 얕은 숨을 빠르게 쉬며 쌕쌕대고 있었다.
“헤이먼. 인공호흡하기 싫으니까 정신 차려 봐. 힉, 이상한 토를 하네.”
노란색의 안개 같은 것이 헤이먼이 쿨럭댈 때마다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위에 누구 없어요?! 헤이먼 옮겨야 돼!”
“오늘 마법 수업은 이만 끝내야겠군요.”
말을 마친 이달론의 몸이 점점 투명해졌다.
이 새끼가 어딜 도망가.
그가 완전히 투명해지기 직전 난 그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틀어쥐었다.
내게 잡힐 줄 몰랐던 건지 이달론의 초록색 눈동자가 당황으로 물들었다.
“헤이먼한테 무슨 짓 한 거야! 이 자식아!”
빗자루처럼 짤짤 흔들리던 이달론은 입을 열지 않았지만 내 머릿속에선 그의 징그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내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헤이먼을 살린 건 저니까요.’
“뭐?”
인상을 찌푸린 순간 뒤에서 헤이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해.”
뒤로 돌자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은 헤이먼이 나를 바라봤다. 분홍색이었던 그의 눈동자가 녹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너 눈 색도 마음대로 바꿔?”
놀란 내 목소리를 듣고 그는 아주 잠깐 미소를 지었다가 이내 인상을 굳혔다.
“위험하니까 빨리 나가.”
“내가 뭐가 위험해. 지금 네가 죽을상인데. 방금 이 이상한 사기꾼이…….”
다시 뒤돌아 이달론이 있던 자리를 바라봤지만 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어디 갔지?”
원래 아무도 없던 것처럼 넓은 지하실엔 우리 둘뿐이었다.
헤이먼은 마른기침을 몇 번 하더니 완전히 일어섰다.
“그는 날 도와주는 사람이야.”
“……거짓말하지 마.”
정말로 도와주는 사람이라면 헤이먼이 이런 표정일 리 없었다.
내 대답에 헤이먼은 픽 웃으며 맥없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래, 거짓말이야. 자기 마력을 내게 집어넣어서 텅 빈 내 몸뚱이를 살려 내지. 꼭두각시처럼.”
“그게 무슨 소리야.”
이달론의 마력을 받아서 산다고?
황폐한 그의 눈동자가 아주 느리게 다시 분홍색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는 버려진 날 찾아내 자기 맘대로 살렸고, 그 대가로 날 이용하고 있어.”
“……다른 사람의 마력을 받으면 안 돼?”
“그러면 그 사람도 죽고, 나도 죽어. 내 몸에 마력을 집어넣을 수 있는 건 이달론뿐이야.”
헤이먼은 힘없이 내게 터벅터벅 걸어왔다.
뭔가 불길했다.
모두 진실이라고 해도, 그걸 왜 전부 말하는 거지?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헤이먼은 손을 뻗어 내 시야를 가렸다.
“여길 나가면 다 잊게 될 거야.”
눈을 질끈 감으려는 순간, 그의 손바닥에서 튀어나온 노란 안개가 눈앞을 물들였다. 뇌를 주무르는 것처럼 끔찍한 감각에 온몸에 소름이 퍼졌다.
“괜찮아, 다 잊어. 그래도 여기까지 찾아와 줘서 고마워, 레아.”
“잠깐만, 헤이먼! 잠깐!”
“쉿.”
시야가 점점 검게 물들고, 주변 소음들이 멀어지는 가운데 헤이먼의 음성이 꿈결처럼 들려왔다.
“어차피 아무도 날 구할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