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나날이 집으로 날아오던 초대장이 뚝 끊겼다.
아마 내가 깽판을 친 것 때문이겠지.
공작 눈치로 봐선 가문 사이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 같진 않았지만 파티 초대장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심지어 이 약아빠진 귀족 것들이 티 안 내려고 일부러 공작님한테는 편지를 보내면서 사교계 파티 초대장만 안 보내고 있었다.
후원에서 내게 운동을 가르쳐 주던 그레이가 곤란한 듯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게 길어지면 아버지도 알아차리실 텐데.”
“공작님이 눈치채시기 전에 다시 초대장 보낼걸. 왜냐하면 문제가 불거지는 건 그쪽도 사양일 테니까.”
“그런가.”
입술을 삐죽이던 그레이는 갑자기 내 쪽으로 한 걸음 불쑥 다가왔다.
“근데 너 요새 밤에 안 자고 뭐 하냐. 얼굴 상태가 왜 이래.”
요즘 매일 베르고의 역사, 토지별 특징, 다른 영지에 대한 자료들을 읽고 익히느라 수면 시간이 확 줄어들었다.
그게 티가 났는지 그레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또 잔소리를 시작했다.
“일찍 좀 자라. 뭐 하냐. 혹시 너 또 렘샤 부인……!”
목소리를 높이려던 그레이가 흡, 하며 입을 다물었다.
내 뒤에 서 있는 노예 돈의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돈은 처음 내 옆에서 운동을 도와준 날 이후로 매일 운동 시간만 되면 나를 따라다니며 돕고 있었다.
그레이는 돈의 앞에서 야설 얘기를 꺼내기가 꺼려졌는지 손을 휘휘 저었다.
“너. 가 봐.”
하긴, 렘샤 부인의 뜨거운 정사 장면을 직접 읽었으니 얼마나 숭한지 알고 있겠지.
하지만 그레이의 명령에도 돈은 말을 더듬거리며 쉽게 자리를 뜨지 않았다.
“……지, 지금까지 아가씨께서 후원 네 바퀴 반을 도셨고, 제일 처음에요. 그리고 그다음엔 나뭇등걸에 발을 한쪽씩 올렸다 내리는 건 각 열다섯 번씩 총 세 번을 하셨고…….”
“돈. 내가 있을 땐 네가 개수 셀 필요 없으니까 이만 가라고. 안 따라다녀도 된다고.”
“네, 도련님. 죄송합니다…….”
꾸벅 인사를 한 돈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힘없이 터벅터벅 후원을 빠져나갔다.
아무 일도 시키질 않아서 온종일 내 운동 시간만 기다리니 저럴 법도 했다.
얼마나 심심하면 저러겠어.
“그레이. 돈이 여기에서 딱히 하는 일이 없어서 심심해서 저러는 거야. 너무 야박하게 그러지 마.”
“……방금 쟤 내 말 일부러 모른 척했잖아. 근데 왜 나한테 화를 내?”
그레이의 긴 눈이 날카롭게 뜨였다. 그런 주제에 눈빛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그레이 너까지 왜 이래. 안 그래도 머리 아픈데.”
“그러니까 밤에 잠을 잘 자란 말이야! 아프다고 골골대지 말고! 넌 건강하기만 하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냐! 괜히 이것저것 신경 쓰지 말고, 그냥……! 그냥, 아프지만 말라고 했잖아!”
괜히 짜증을 내고 휙 돌아선 그레이는 몇 걸음 걸어가다가 제 분에 못 이긴 듯 다시 날 향해 돌아섰다.
“애초에 왜 네가 운동할 때마다 쟤를 데리고 다녀. 나 있으니까 쟨 필요 없잖아! 운동도 내가 가르쳐 주고, 개수도 내가 세 주고, 힘내라고 말하는 것도 원래 내가 했잖아. 쟬 왜 데려오냐고. 나랑 운동하는 시간이잖아!”
……얘가 지금 다섯 살 난 애도 아니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네.
가만히 그레이를 보고만 있자, 그 역시 민망해졌는지 입술을 내밀고는 작게 투덜거렸다.
“……헤이먼은 왜 저런 놈을 사 와서는.”
“그레이. 네가 돈이 불편하면 너랑 운동하는 시간에는 데려오지 않을게. 그래도 다른 사람한테 그런 식으로 굴지 마. 무서워하잖아. 나이도 있으면서 왜 그러냐.”
그대로 후원을 나가려던 그레이가 우뚝 멈춰 섰다.
“잠깐만. 나이? 나이이이?”
“왜 나이에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해. 너 낼모레 환갑이야?”
“나 스물세 살이야! 젊어! 팔팔해! 그리고 돈이 나보다 나이가 더 많다며! 생판 남한텐 나이 안 들먹거리면서 왜 네 오빠한테만 나이로 혼내냐!”
“야! 나이로 따지면 네가 돈한테 더 그러면 안 됐지! 너보다 나이가 많잖아!”
“허이구, 아가씨는 나이 많은 어른 공경해서 옆에 어른 세워 놓고 숫자나 세라고 하셨나 봐요.”
“야. 그러는 너는, ……너는.”
“할 말 없지? 할 말 없지?”
아니, 이 새끼 왜 갈수록 유치해지지. 다른 집 오빠들도 다 이런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밖에 안 나오네.
내가 헛웃음을 터뜨리자 그레이는 혼자 씩씩거리다 재빠르게 후원 입구까지 가서 큰 소리로 외쳤다.
“돈! 다시 와 봐!”
근처에 있었는지 돈이 빨개진 얼굴로 빠르게 뛰어왔다.
“부르셨어요?”
그레이는 돈과 함께 돌아와선 깔깔 웃고 있는 내 앞에 섰다.
“돈. 나한테 와. 노예 문서 찢어 줄게.”
돈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내 눈도 휘둥그레 커졌다.
공작님이 그레이에게 남자인 친구가 필요하다고 했던 게 설마 진짜 남자 친구였나.
그레이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대신 너도 운동 같이해. 그 굽은 등 펴 줄 테니까 솔레아 말고 그냥 내 옆에 있으라고.”
……오해하게끔 말을 하고 있잖아, 네가! 자꾸 오해하게 된다고! 머릿속에서! 진짜 남자 친구였어?
“노예 문서도 없애 줄게. 자유인 보증도 해 주고.”
“가, 갑자기 왜 저를…….”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화내던 그레이가 갑자기 노예 문서를 없애 주겠다고 하자 돈은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안 돼!”
내 외침에 돈이 놀란 건 물론이고, 그레이 역시 당황한 눈치였다.
“고, 공작님이 반대하실 거야.”
“……아버지도 노예 제도에 그리 긍정적이지 않으셔. 오히려 찬성하실걸.”
공작님은 네가 무슨 마음으로 돈을 자유인으로 만들려고 하는지 모르시잖아.
……아냐. 잠깐만.
정신 차려. 중세 시대 인간보다 꽉 막힌 현대인이 될 수 없다고.
얼른 정신을 차리고 돈에게 물었다.
“둘이 합의된 거야? 나는 돈이 좋다면 상관없어.”
돈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가씨가 좋으시면 저도 좋아요. 그렇게 할게요.”
“나까지 좋으면 안 되지!”
셋은 좀 그렇잖아!
그리고 그레이랑 솔레아는 가족인데 인마! 이건 개방적인 게 아니라 윤리에 어긋나는 거지!
돌아가신 공작 부인이 무덤에서 일어나 땅을 치며 우시겠네!
펄쩍 뛰며 질색하자 그레이의 얼굴이 미묘하게 구겨졌다.
“돈은 지금은 너한테 종속돼 있잖아.”
“난 한 번도 돈을 그렇게 본 적 없어!”
돈의 처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아가씨라면 그러실 줄 알았어요……. 저를 노예가 아니라 사람으로 대해 주신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뭐? 그거야 당연하지. 지금 그게 아니라 더 중요한 얘길 하고 있잖아.”
그레이가 한숨을 쉬며 끼어들었다.
“돈. 잘 생각하고 결정해. 솔레아 밑에서 계속 노예로 있을 건지, 내 하인이 돼서 자유를 가질 건지.”
“그레이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섬뜩하게 해.”
돈이 입을 열기 전, 그레이가 얼른 조건을 더했다.
“원한다면 이 집에서 나가도 좋아.”
“싫어요!”
돈이 즉답했다.
그는 나와 그레이를 번갈아 한 번씩 보고는 그레이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의 하인이 되면 제가 사람으로 살게끔 해 주시나요.”
“물론. 어려운 일도 아니야. 네가 솔레아 옆에서 쫄쫄 따라다니는 것보다 보기 편할 거 같네.”
말을 왜 그렇게 해. 쟤는 고백 한번 제대로 안 하고 사람을 얼렁뚱땅 꿀꺽 제 손에 넣을 셈인가.
불만스러운 건 사실이었지만 돈이 좋다는데 내가 말릴 순 없었다.
결국 그날 오후, 돈은 자유인이 되었다.
이제 그레이랑 함께 파티에 가도 친구를 만들어 줄 필요는 없는 건가. 하긴, 인물도 없더라.
우리 그레이랑 헤이먼이 제일 잘생겼던데, 뭐. 황소개구리랑 뭉개진 은행이랑은 친구 할 필요 없어.
저녁을 먹을 때 넌지시 그레이에게 물었다.
“……너 돈이 마음에 들어서 데려간 거야?”
“응? 뭐, 성실해 보이긴 하더라.”
갑자기 공장에서 만난 옆 레일 언니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성실한 사람이 좋아.’
아니야. 잠깐만. 언니 멋대로 끼어들지 마세요.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후 다시 물었다.
“그, 너, 여자 친구는 사귈 마음 없…….”
안 돼. 지금 완전 보수적인 아버지 같잖아.
나는 다시 고개를 젓고 질문을 수정했다.
“그레이. 너 장가 안 가니.”
이게 더 심하잖아.
입을 때려 부수고 싶다.
“그게 무슨 말이야? 장가?”
“……아무것도 아니야. 돈이랑 잘 친해져 봐…….”
“친해질 게 뭐 있어. 하인이랑 주인 사이에. 맡긴 일 잘해 주면 고마운 거지.”
아, 오해였구나.
식은땀을 흘리며 남은 식사를 마쳤다. 하마터면 다음번 파티 때 그레이가 남자랑 얘기라도 하면 바람피운다고 오해할 뻔했네.
며칠 뒤, 나는 결국 과로로 쓰러졌다.
내 방에 쌓인 책 더미가 쓰러지는 걸 보고도 피하지 못한 탓에 그대로 머리를 맞고 단번에 기절했다.
몸이 약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고작 잠 좀 줄였다고 기절이라니.
책이 무너지는 우르르 소리와 함께 앤의 비명 소리가 언뜻 들리긴 했지만 그 이후로는 꽤 긴 암전이었다.
간간이 공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의술사…… 마력을 쓰는데도…… 왜…….’
‘……희귀병인지…….’
‘마력 흡수가…… 안 되는…….’
며칠이 지난 건지 분간이 잘되지 않았다.
물속에 잠긴 것처럼 헤이먼의 목소리가 멀찍이 느껴졌다.
웅웅 울리는 목소리의 주인이 헤이먼이라는 걸 알자마자 조금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내 목소리 들려? 솔레아.”
응.
“목소리에 마력을 담아 말해야 받아들이는 걸 보니 확실하네. 왜인진 모르지만 넌 지금 네가 원하는 마력만 흡수하고 있어. 하지만 난…… 너를 치료할 정도의 마력은 없어.”
뭐야. 그럼 난 이제 말라 죽는 거야?
“이달론을 불러오는 방법밖에 없다는 걸 알지만……. 그 사람은 안 돼. 그러니까, 네 힘으로 눈을 떠. 솔레아.”
왜 이달론 얘기를 꺼내지.
“이달론은…… 안 부를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막을 거야. 그 사람이 왔다가 널 보면 큰일이니까. 그래서…… 나도 이젠 못 올 거 같아.”
이달론을 못 오게 하는 거랑 네가 못 오는 게 무슨 상관인데.
그리고 난 이달론이라는 그 가짜 젊은이한테 도움받고 싶지 않은데.
그 이후로 잠깐 의식이 멀어졌다가 갑자기 손등이 축축해지는 느낌에 정신이 들었다.
내 손등으로 물방울이 떨어지며 뚝뚝 끊긴 목소리가 멀찍이서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솔레아. 아빠가…… 꼭…… 너까지…… 제발.’
울지 마세요. 공작님.
일어나고 싶다. 울지 마시라고 말하고 싶은데.
……운동 부족인가.
그레이의 말이 생각났다.
‘모든 것은 복근에서부터 시작돼. 안에서부터 밀어 올리듯 근육을 쓰는 거야. 말할 때도 똑같아.’
그레이 말대로 해 볼까.
엉덩이에 힘을 빡 주고. 배에도 힘을 빡 주고. 눈에도 힘을 빡 주고.
뭔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손등 위로 떨어진 미지근한 온도의 물방울 개수가 늘어날수록 조바심이 일었다.
공작님이 우는 게 싫었다.
몇 년 전엔 나 때문에 우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빌었는데.
막상 그런 사람이 생기니 마음이 달라졌다. 이게 솔레아를 향한 것이라 해도.
공작이 우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심기일전해서 엉덩이와 복근에 온 힘을 주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힘껏 뜨며 소리쳤다.
“울지 마세욕!!”
“악!”
이번엔 공작님이 기절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