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192)

34화

* * *

평소와 같은 풍경이었다.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자고 있는 솔레아와 그녀의 옆에 앉아서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책을 읽어 주고 있는 그레이.

“……뜨겁게 달구어진 에라스토의 몸이 겹쳐 왔다. 미친놈. 이런 걸 왜 읽는 거야. 도대체.”

“아, 머리야. 자는 사람한테 왜 욕이야.”

솔레아가 머리를 감싸 쥐고 몸을 일으켰다.

현기증이 이는 듯 온 얼굴을 찌푸린 솔레아를 보자마자 그레이는 책을 내던지듯 협탁 위로 내려놓고 솔레아를 부축했다.

겨우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솔레아는 창문을 바라봤다.

푸르스름한 걸 보아 하니 새벽 아니면 저녁인 듯했다.

“몇 시야?”

“6시. 넌 무슨 낮잠을 이렇게 오래 자냐.”

“근데 넌 왜 남의 책을 읽고 있어. 그것도 자는 사람 옆에서.”

“네 옆에 놓여 있길래. 네가 읽다가 지쳐서 잠든 줄 알았지.”

“야. 솔직히 인정해라. 그냥 네가 읽고 싶어서 읽은 거 아니야?”

아픈 머리를 붙잡고도 실실 웃으며 장난을 치는 솔레아를 차마 한 대 치지도 못하고 그레이가 씩씩거렸다.

“네가 하도 간절하게 붙잡고 자서! 내가! 불쌍해서 읽어 준 거야! 이 미친놈아! 숭해서 몇 줄 읽어 주지도 못했다! 일어나! 저녁 먹으러 가게!”

말은 험악하게 하면서도 그레이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나는 솔레아를 부드럽게 부축했다.

“머리 아픈데 저녁 안 먹으면 안 돼?”

“안 돼. 근육 빠져.”

“그놈의 근손실.”

“밥을 잘 챙겨 먹어야 건강해지지. 빨리 가자, 준비 다 됐을 거야.”

“하…….”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며 신발을 신던 솔레아는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내가 저걸 읽다가 잤다고?”

“그래. 완전 집중해서 읽었는지 종이도 구겨져 있던데.”

“보자.”

부축하고 있던 그레이의 팔을 뿌리치고 솔레아가 황급히 뒤돌았다.

“야, 밥 먹으러 갈 건데 야한 소설을 왜 보냐. 그걸 보고도 밥이 들어가?”

“어, 난 들어가. 너무 잘 들어가. 맨날 야한 생각만 해서 괜찮아. 그러니까 너 먼저 가 있어.”

“……너 또 기절한 거 같아서 부축해 주려고 기다렸지, 나는.”

그레이는 작게 중얼거리며 방 밖으로 나가질 않았다.

어차피 쟤 눈엔 야설로 보이니까 상관없겠지 싶어 솔레아는 아랑곳 않고 일기장을 펼쳤다.

몇 장을 넘기던 솔레아가 천천히 머리를 들어 올려 그레이를 바라봤다.

“사람이 위기에 처하면 막, 힘이 솟아나기도 하고 그러나?”

“글쎄. 그렇지 않을까. 왜 갑자기? 기사 에라스토가 위기에 처했냐? 아니면 렘샤 부인이? 그 소설에서 위기에 처해 봤자 뭐, 사람들한테 들켜서 도망가는 거 말고 뭐가 있어서.”

“그렇지. 음, 그런 내용이야. 렘샤 부인이 구두를 신고도 잘 뛰길래.”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면서 책을 덮은 솔레아는 그레이의 부축을 받으며 방을 나섰다.

방금 확인한 일기장엔 다급히 갈겨쓴 글씨가 적혀 있었다.

헤이먼

마력

이달

두세 글자밖에 안 되는 내용들이 맥락 없이 뚝뚝 끊긴 채로 하얀 종이 위에 남았다.

식당에 내려가니 공작과 헤이먼이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레아, 매일 운동을 하더니 오늘은 많이 피곤했나 보구나. 몸은 괜찮니? 낮잠을 길게 잔 것 같던데.”

“괜찮아요, 공작…… 아빠.”

그레이가 놓치질 않고 놀려 댔다.

“공작님이면 공작님이고, 아빠면 아빠지. 공작 아빠는 뭐야. 그럼 아빠가 후작인 애들은 후작 아빠라고 하냐.”

킥킥거리며 놀리는 그레이를 향해 솔레아는 싱긋 웃으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척 엿을 날렸다.

찰나였음에도 가운뎃손가락을 본 건지 그레이가 분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솔레아, 소화시키기 힘들면 가벼운 것들로만 준비하라 할까?”

어수선한 가운데 헤이먼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솔레아는 그를 향해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괜찮아, 배고파서 다 먹을 수 있을 거 같아.”

“그럼 다행이고.”

공작은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얼마 만에 다 같이 하는 식사인지 모르겠구나. 다들 건강해야 돼. 아프지 말고.”

“예, 걱정 마세요.”

“넌 솔레아 좀 괴롭히지 마라.”

공작이 그레이에게 핀잔을 주자 그가 억울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아빠가 솔레아를 잘 모르셔서 그래요. 쟤가 얼마나 사람 잘 놀리, 저거 보세요! 또 나한테 욕해!”

턱을 괴는 척 손가락으로 또 엿을 날리고 있던 솔레아는 공작이 시선을 주자마자 태연하게 다섯 손가락을 폈다.

“내가 뭘?”

어깨를 으쓱하는 솔레아를 보며 그레이가 손날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아마 내일 운동할 때 반 죽여 놓겠다는 신호인 것 같았다.

“레아, 식탁 위에 팔꿈치를 올려놓는 건 예절이 아니란다.”

“네. 공…… 아빠.”

“공얘뺘.”

“그만해라, 그레이.”

키득거리며 그레이와 장난을 치다 보니 식사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요 며칠은 너희가 통 밖에 나가질 않는구나.”

고기를 씹어 삼킨 후 가볍게 물은 공작의 말에 세 남매가 동시에 움찔했다.

초대장이 하나도 안 왔으니까 아무 데도 안 갔죠.

그레이는 빠르게 눈을 굴려 솔레아를 한 번 보고는 헤이먼에게 시선을 주었다.

솔레아 역시 눈알을 빠르게 돌리며 포크로 헤이먼을 넌지시 가리켰다.

결국 셋 중 제일 나이가 많은 헤이먼이 입을 열었다.

“저번에 파티를 다녀온 뒤로 솔레아가 피곤하다 해서 잠깐 쉬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처음 파티에 가 본 거니까요.”

“그랬구나.”

그 이후로도 식사를 하며 몇 번 더 공작을 ‘공작님’이라고 불렀다가 의도치 않게 중세 수련회 교관님 말투를 몇 번 더 들어 버렸다.

결국 솔레아는 식사 중에 그만 크게 소리 내어 웃으며 ‘알았어요. 그만하세요. 아빠라고 부를게요.’라고 했고, 공작은 그제야 만족한 듯 웃었다.

그레이와 아웅다웅 장난치며 방으로 돌아간 솔레아는 문이 닫히고 홀로 남자마자 웃음을 거뒀다.

기억이 뒤죽박죽이었다.

“내가 낮잠을 잤다고?”

지하실에 갔었다. 헤이먼을 구하러…….

헤이먼이 분홍색 머리카락을 지하실 돌바닥에 흐트러뜨린 채 쓰러져 있던 게 어렴풋이 기억난다. 꿈이었나?

솔레아는 아까 던져 놓았던 일기장을 다시 펼쳐 들었다.

이제 곧 밤이니 이곳에 일기가 적힐 게 분명했다.

낮에 몇 글자씩 적어 놓았으니 그 뒤로 이어서 내용이 적히겠지.

그러면 잊은 사건에 대해 대략적으로라도 알 수 있겠지.

하지만 배가 부른 탓인지 눈이 저절로 감겨 왔다.

한 시간이 지나고, 머리를 아래위로 뒤흔들며 꾸벅꾸벅 졸기 시작할 즈음,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또 이걸 읽고 계시네.”

앤은 조심스럽게 음란 소설을 협탁에 내려놓은 뒤 솔레아를 침대에 누이려 했다.

그 순간 솔레아가 벌떡 일어섰다.

“안 잤어!”

“어머, 깜짝이야! 아가씨! 놀랐잖아요!”

솔레아는 얼른 일기장을 펼쳤다.

‘헤이먼’ 뒤로 첫 번째 줄이 적히고 있었다.

헤이먼은 누워 있어도 잘생겼네.

아, 젠장! 분명 이런 생각을 했었던 거 같긴 한데! 중요한 건 아니잖아!

“아악!”

“왜 그러세요, 아가씨!”

깜짝 놀란 앤이 솔레아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글자를 슬쩍 읽었다.

어느 부분에서 놀라 소리를 지르신 거지?

‘렘샤 부인에게 저 말고도 숨겨진 또 다른 남자가 있다는 걸 알아챈 바카다는 헤어질 바에야 차라리 자신이 세컨드가 되겠다고 말했다.’

“와! 굉장하네요!”

앤은 반성했다.

그동안 쌓아 놨던 책을 다 갖다 버리라고 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었구나. 성에 안 차셔서 그러신 거였어.

앤이 깨달음을 얻은 줄도 모르고 솔레아는 얼른 그녀를 내보냈다.

“나가 봐, 앤.”

“네, 아가씨.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앤이 얼른 자리를 비키자 솔레아는 다시 두 번째 줄을 읽었다.

종이 위에 다시 글자가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마력이 통하지 않는 몸이니 앞으로는 다치면 안 되겠다. 운동할 때 더 조심해야지. 외국인 놈들. 사람 왕따시키는 것도 아니고, 마력 가지고 되게 쩨쩨하게 구네.

아, 참. 그런 일도 있었지.

이 몸엔 더 이상 마력이 통하지 않는다.

아마도 원래의 솔레아가 가지고 있던 기운이 며칠 새 다 빠져나간 탓이겠지.

하지만 이런 것 말고 좀 더, 도움 되는 게 필요한데.

솔레아는 진지하게 일기장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마지막, 이달.

잠시 후, 세 번째 단어의 뒤로 글자가 나타났다.

이달론일 거야. 이달론 말고는 없어.

이달의 운세 \(^∇^)

준비했던 일들이 전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풀립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달갑지는 않습니다.

행운의 색깔 : 검은색

행운의 아이템 : 파리채

“아. 돌았나.”

쌍욕이 절로 나오네.

부들부들 떨며 책을 덮고 그대로 던져 버리려다가 꾹 참으며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

“……딱 한 번만 더 시도해 보자.”

물론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장면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시야를 가리고 있는 손가락 사이로 보이던 헤이먼의 얼굴.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핼쑥해진 두 뺨, 흔들리는 분홍색 눈과 흐르지 못하고 맺혀 있던 투명한 물방울.

“분명히 울고 있었는데.”

솔레아는 조금 뭉친 어깨 근육을 풀며 만년필을 손에 쥐고, 천으로 꽁꽁 묶어 버렸다.

혹시라도 힘에 밀려서 위로 튕겨 나가지 못하도록.

“어제 정신없는 와중에 저렇게 많이 썼으니까. 분명히 오늘도 할 수 있을 거야.”

숨을 몰아쉬고 솔레아는 흡, 하는 기합과 함께 오늘도 일기장에 글자를 써 넣기 위해 힘을 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제는 기적이 일어나기라도 건지 오늘은 아무리 끙끙거리며 힘을 줘도 두 글자 이상은 쓸 수가 없었다.

겨우, 아주 겨우 적은 두 글자는 ‘기억’이었다.

내일은 생각나겠지. 일단 ‘기억’이라는 말을 아무도 못 하게 해야겠다.

솔레아는 희망을 품은 채 지친 몸을 씻고 새벽녘에야 겨우 잠들었다.

다음 날, 꽤 시끌벅적하게 하루가 시작됐다.

갑자기 초대장이 물밀듯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이야, 헤이먼?”

“나도 모르겠어. 원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레이는 어디 갔어?”

“저기 오네.”

잔뜩 신난 표정으로 달려오던 그레이는 저택의 문을 넘어서기도 전에 외쳤다.

“솔레아! 너 황녀 전하랑 무슨 사이야!”

“무, 무슨 사이긴. 뭐가. 왜. 무슨 사이랄 게 있나.”

알아도 모른 척하고 싶은 사이지…….

바란 적도 없는데 자꾸 나를 개방적으로 만들려고 해.

솔레아가 당황하는 걸 보고도 그레이는 잔뜩 들뜬 얼굴로 말했다.

“네 험담을 한 시종을 황녀 전하께서 단번에 자르셨대.”

“목을 말이냐?”

헤이먼이 기대에 찬 얼굴로 음산하게 묻자 그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잘랐다더라.”

“혀를?”

솔레아가 기겁하는 얼굴로 헤이먼을 바라봤다.

“사람 혀를 왜 잘라…….”

헤이먼은 머쓱한 눈으로 그레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레이는 아쉽다는 듯 혀를 쯧, 차고는 말했다.

“황궁에서 더 이상 일 못 하도록 잘랐다고. 혀나 손, 발, 같은 신체는 아무것도 안 잘랐대.”

“그 소문이 퍼지면서 황녀 전하께 줄을 대 보겠다고 우리한테 이렇게 초대장이 쏟아지는 거군.”

“그렇지.”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아!’ 하는 탄성을 지르며 재킷 안주머니에서 작은 봉투를 꺼냈다.

“큰형 전쟁에서 승리했대.”

그레이는 환하게 웃으며 이어 말했다.

“기억은 없어도, 솔레아 너도 금방 큰형을 좋아하게 될 거야.”

……아 잠깐만. 기억이라는 단어를 빼고 말할 수는 없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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