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192)

31화

재회의 언덕에서 내려와 다시 마차를 타고서 생각해 보니 무언가 이상했다.

아무리 입양아라 해도 공작가의 공자들인데 얘네는 왜 그런 모욕적인 소리를 듣고도 가만히 있었던 거지.

돈이 없어서 참아야 한다거나, 잘잘못을 따지면 당장 일자리를 잃게 된다거나, 신분을 보증할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너희는 왜 당하고만 있어?”

왜 아직도 이렇게 말랐냐며 내 손목을 잡고 빙글빙글 돌리던 그레이는 말없이 씨익 웃기만 했다.

헤이먼은 아무렇지 않은 듯 고저 없는 말투로 여상히 말했다.

“아버지가 신경 쓰시니까.”

“음?”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공작은 오히려 이리저리 신경을 쓰고 싶어 하는 눈치였는데.

“저번에 내 친구라며 찾아왔던 애들이 너희 욕하고 다닌다는 걸 아시자마자 공작님이 혼쭐을 냈잖아.”

혼쭐 정도가 아니지.

아예 그 가문을 영지에서 쫓아냈다던데.

어느새 그레이는 잡고 있던 내 손을 놓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흥미롭다는 듯 내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런 얼굴로 봐.”

기다란 손가락으로 갸름한 얼굴을 괸 그레이는 지그시 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되게 속상해하네. 그레이 자꾸 들뜨게.”

비스듬히 기운 얼굴을 따라 흘러내린 적갈색 머리카락에 눈웃음 짓고 있는 회색 눈동자가 살짝 가려졌다.

이렇게 끼도 많고 잘생겼는데(비록 조금 무섭게 생기긴 했지만 어쨌든) 그레이는 왜 친구가 없지. 내가 여기 귀족이었으면 앵벌이 해서라도 너랑 친구 했다.

헤이먼도 은근히 공작님을 많이 닮았지만 그레이는 정말 말도 안 되게 닮은 거 같다.

외양 말고 말투가. 끼가 아주 보통이 아닌데.

이쯤 되니 첫째라는 티온이 걱정된다. 걔는 완전 거푸집 수준으로 닮은 거 아냐.

뻘하게 이어지는 내 생각을 끊은 헤이먼의 대답은 늘 그랬듯 재수 없었다.

“기억은 잃었어도 상식은 남아 있을 줄 알았더니.”

“넌 상식이 넘쳐서 욕을 듣고도 가만히 있었어?”

크흡! 하고 터진 그레이의 웃음소리가 마차의 말발굽 소리에 묻혔다.

하지만 헤이먼은 이제 내 이죽거림 정도는 가볍게 넘길 수준이 됐는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이어 말했다.

“이 나라에 귀족이 얼마나 많고, 그 귀족들이 얼마나 내밀하게 엮여 있는데. 양아들한테 욕한 것 정도로 인연을 끊는다면 베르고는 금방 고립될걸. 어떤 물자도 들어오지 않을 테니까. 돈의 문제가 아냐.”

헤이먼의 말에 따르면, 베르고는 과거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대가로 넓은 땅을 얻게 되었지만 그것을 효과적으로 굴릴 만한 사업체는 부족하다고 했다.

영주민들을 위해서 다른 지방들과의 교역이 끊기면 안 된다고.

“일례로, 저번의 그 셋을 처벌한 이후 영지로 들어오는 직물의 수가 확 줄었지. 당연히 가격은 훅 뛰었고. 노예 무역으로 돈벌이를 하던 케인 자작의 자본이 한꺼번에 빠져나간 탓에 그것 역시 영지 전체에 영향을 끼쳤고.”

“……공작가에 돈 많다며.”

“물론 많지. 하지만 영지 전체를 융숭히 먹여 살리려면 자본뿐 아니라 생산 수단, 교역 물품, 노동력 등 신경 써야 할 게 많으니까.”

조금 굳은 내 표정을 살피던 그레이가 얼른 말을 보탰다.

“그래도 난 우리 영지에서 대규모 노예 사업장이 사라진 건 좋아. 찝찝했으니까. 잘했어, 솔레아.”

그레이가 내 머리를 쓰다듬듯 툭툭 두드렸지만 그 정도로 털어 낼 수 있는 부담감이 아니었다.

헤이먼은 내 표정을 읽어 내곤 다른 말을 이었다.

“괜찮아. 아버지는 뛰어나신 분이니까. 곧 다 좋아질 거야.”

고요히 반짝이는 헤이먼의 연한 분홍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곧 다 좋아진다는 건, 그 세 귀족의 빈자리를 메꾸는 게 가능하니까 그렇게 말한 거지? 하지만 오늘 파티에선 그게 불가능했으니까 날 말린 거고?”

헤이먼이 웃는 듯 마는 듯 잔잔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니까 다음엔 참아. 우리 신경 쓰지 말고.”

깽판을 치면 그 여파가 고스란히 공작님과 영지 전체에 간다는 걸 아니까 매번 모욕을 당했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넘겨 왔던 거구나.

그냥 꾹 참으면서.

“……너희가 이 정도로 당하는 걸 공작님은 아셔?”

“모르실 거야. 모르시게 하려고 매번 사교 파티에 나가는 거니까. 다른 귀족들 역시 베르고와 연을 끊기는 싫으니까 초대장을 보내오는 거고.”

“너희 둘만 입 다물면 조용히 넘어갈 일이라서?”

“그렇게 들으니 새삼스럽군. 하지만 사실이야. 안타깝게 여겨도 어쩔 수 없어.”

모욕을 당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헤이먼 때문에 명치 아래로 밤송이가 굴러다니는 것 같은 이물감이 느껴졌다.

밤송이는 가슴속을 데구르르 구르다가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다.

“근데 그런 논리라면 상대편도 마찬가지 아니야?”

씁쓸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그레이가 다시 나를 향해 물었다.

“무슨 소리야?”

“각자 가문의 체면 때문에 눈치 보고 있는 거라며. 그럼 욕 좀 하면 어때.”

일방적인 갑을 관계도 아니면서.

나는 앞으로 바싹 당겨 앉으며 두 사람을 설득했다.

“들어 봐. 그쪽에선 초대하기 싫지만 초대를 했어, 너희도 싫지만 갔어. 그럼 1 대 1이지.”

헤이먼이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엔 어떻게 해야 돼? 그쪽에서 안 건드려야 공평하지. 그쪽 물품을 우리가 돈 주고 산다는 건 영지 간 거래가 오가는 협력 관계라는 거잖아.”

“그렇지?”

“근데 욕은 항상 걔들이 먼저 하지? 조롱하고 비난하고 무시하고?”

“항상은 아니야, 가끔…….”

“어쨌든 시비를 걸거나 사람을 개무시하거나 둘 중 하나라며. 그러면 우리가 한 방 먹었네? 2 대 1이잖아. 사람이 손해 보고 살면 되겠어, 안 되겠어?”

잠깐 내게 말릴 뻔하던 헤이먼은 냉큼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과 함께 다시 근엄한 목소리로 돌아왔다.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순 없어.”

“아니지, 헤이먼. 복잡한 일일수록 간단하게 생각해야지. 상호 거래 관계인데 왜 너희만 참고 있냐고.”

가만히 듣고 있던 그레이가 내 쪽으로 몸을 바짝 붙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맞는 말 같아.”

“그레이 너까지 그러지 마라.”

“그레이한테 왜 그래. 나 틀린 말 안 했다니까?”

나보다 덩치가 큰 그레이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하자 그가 어이없다는 잠깐 헛웃음을 짓다가 얼른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맞아, 맞아. 솔레아 말이 다 맞아.”

“그래. 그레이. 이제부터 누가 욕하면 받아치자.”

“그래, 받아치자.”

“하……. 너희 다음 파티엔 오지 마라, 나 혼자 갈 테니.”

“그럼 형은 혼자 가. 난 솔레아랑 갈 테니까.”

“그래. 넌 혼자 가. 난 그레이랑 둘이서 사이좋게 마차 타고 갈게.”

말없이 우리를 잠깐 째려보던 헤이먼은 픽 웃고는 이후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장난스럽게 마무리하긴 했지만 솔직히 그냥 넘어가기엔 꺼림칙한 문제였다.

공작이 최근 내내 바빴던 이유가 저번의 그 일 때문에 교역이 끊겨 부족해진 자원을 여기저기서 충당하기 위해서였구나.

나는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앤을 불렀다.

“오늘 파티는 즐거우셨어요, 아가씨?”

“꽤 즐거웠어. 그러니까 가서 이 영지에 대한 자료 좀 가져와 줘. 역사부터 교류 내역, 토지 대장 그런 거 전부 다. 아, 그리고 다른 영지에 대한 것도. 베르고와 교류하는 영지가 아니라 아예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영지에 대한 것도 좋아. 어떤 걸로 먹고 사는지 적혀 있는 그런 게 있을 거 아니야. 사례가 많이 필요해.”

앤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다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공작이 되시기로 결정하신 거예요?”

“뭐?”

“전에는 그런 거 공부하기 싫다고 하셨잖아요. 아가씨의 장래에 관해서 남들이 떠드는 것도, 괜히 이목이 집중되는 것도 싫으시다고요.”

확실히 전의 솔레아라면 그랬겠지.

하지만 나는 그 둘이 무시당하는 걸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무슨 소릴 듣고 다니는지 알아 버렸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

오늘 사람들 가운데서 고목처럼 가만히 서 있던 헤이먼과 그레이의 모습이 자꾸 과거의 나와 겹쳐졌다.

혼자라는 고독과 무력감은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였다.

이마에 든 멍을 가리려 머리를 숙이고 등교해, 하교하는 시간까지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아 교실 한가운데 우두커니 앉아 있을 때도, 아버지를 밀친 뒤 달동네를 달려 내려올 때도 그랬다.

사람이 기계처럼 돌아가는 공장에서 열두 시간의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길, 주황빛 가로등 아래를 걸어가다 보면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너무 두려워졌다.

난 이대로 쭉 혼자일 거야.

이 삶이 끝날 때까지.

누구도 나를 기억하지 못한 채로.

홀로 고장 난 것처럼 멈춰 버려서 그저 부식되어만 가는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지도 않았고, 그 두 사람이 그렇게 되는 걸 두고 볼 수도 없었다.

그들은 나와 같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 돌아가기 전까지만, 딱 그 전까지만.

나는 앤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으니까 있는 대로 다 가져와 줘.”

앤이 나간 후 욕실에서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와 기다렸다.

잠시 후 도르륵, 바퀴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 하나 정도는 너끈히 실을 수 있을 법한 수레에 책과 종이 뭉치를 가득 싣고 돌아온 앤은 걱정 어린 얼굴로 말했다.

“천천히 읽으세요, 아가씨. 너무 늦게 주무시면 안 돼요.”

“응. 알았어.”

“서재에 있는 걸 다 가져오진 못했어요. 너무 많아서요. 이건 일단 이 근방 영지의 자료들이에요.”

“지도도 부탁해. 우리 영지 전체의 세부 지도, 제르노아 제국 지도, 그리고 이 대륙뿐 아니라 세계 지도까지 다 필요할 것 같아.”

“그것까지요?”

“응. 난 아무것도 모르니까. 다 필요해. 그리고 내가 이것저것 쓸 수 있는 종이들도 가져와 줘.”

“……네.”

갑자기 이상하게 구는 내가 이해되지 않는지 앤은 의문스러운 표정이긴 했지만 곧 내가 말한 걸 전부 가져왔다.

넓은 방이 자료들로 가득 찼다.

이 세계에 대한 상식이 전무하니까 이것들을 전부 익히는 데에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지 장담할 수 없었다.

졸리고,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잠들 수 없었다.

끙끙거리며 자료를 분류한 후에야 베르고의 역사가 줄줄 나열된 종이 뭉치를 펼쳤다.

영지는 넓지만 주로 과거에 전쟁을 치렀던 기사들이 그대로 정착해 사는 땅이라 농업이 아닌 군사 훈련으로만 땅을 사용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들의 명예를 중시하며 돈보다는 품위와 명성에 대한 욕구가 더 강하고, 영주에 대한 충성도가 높다는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영주가 데려온 아들들을 인정하면서도 그들 개개인은 명예롭지 않다 생각하여 괄시했던 거였구나.

어쩐지, 개자식들.

눈 밑에 시커멓게 물든 다크서클을 달고 아침이 되어 겨우 잠들었다가 정오를 넘기기 전 눈을 떴다.

습관적으로 일기장을 펼치자 어제 내가 적었던 ‘1’ 뒤로 다른 글자들이 이어져 있었다.

1번만 더 욕하고 다니면 가만 안 둬 개새끼들아

……이 정도면 그냥 내가 쓰고 기억 못 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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