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192)

30화

마차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분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걸 왜 가만히 듣고 있어! 순 양서류같이 생긴 새끼가 시냇가 가서 뜀뛰기나 하지. 어딜 감히 사람 말하는 데 끼어들어. 건방진 새끼.”

“솔레아. 방금은 네가 잘못한 거다. 그 자리에 귀족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게다가 황녀 전하의 탄일 파티였어.”

“내가 뭐, 사람 머리통을 깨부수길 했어, 바닥에 드러눕길 했어. 말싸움 조금 한 걸 가지고.”

내 말을 듣는 헤이먼의 미간은 미미하게 구겨져 있었지만 입꼬리는 약간 올라가 있었다.

헤이먼은 입가를 가린 채 큼, 흠, 하고 헛기침을 뱉더니 진지하게 다시 나를 타일렀다.

“그래도 그건 너무 대책 없는 짓이야.”

“뭐가 대책이 없어. 공작가의 아들들을 모욕하는 게 더 대책 없는 거 아니야?”

“네 평판이 바닥을 치게 될 거라곤 생각 안 해? 우리야 상관없어. 네가 곧 가문의 위신을…….”

헤이먼의 말을 끊고 물었다.

“뭐가 상관없어! 넌 베르고 아니야?”

그는 잠깐 놀란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남들이 아무리 그딴 식으로 말해도 너는 너를 그렇게 취급하면 안 되는 거잖아! 네가 싸고도는 솔레아도 베르고의 공녀고, 너랑 그레이도 똑같이 베르고의 공자야.”

뒤에서 그레이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했다.

“그래, 헤이먼도 그레이도 베르고의 공자고, 솔레아도 베르고의 공녀야.”

“그걸 잘 아는 너는 왜 아까 못 받아쳤냐.”

어깨에 올려진 손을 떼어 낸 뒤 몸을 돌려 그레이의 등짝을 찰싹 소리가 나도록 연달아 때렸다.

“그렇게 잘 알면서! 왜 당하고만 있어! 좋은 집안에 있으면서! 꿀릴 것도 없으면서! 당하고 살아야 되는 위치도 아니면서! 왜 가만히 욕을 듣고만 있어! 속상하게!”

넓은 등짝에서 퍽퍽 소리가 나도록 맞던 그레이가 갑자기 허리를 세우더니 내 두 손목을 잡았다.

갑자기 양손을 붙잡힌 나는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히 그레이를 올려다봤다.

마법으로 불을 밝혀 놓은 가로등의 불빛 덕에 그레이의 환한 미소가 두 눈 가득 들어왔다.

그 어느 때보다 밝게 웃는 그의 얼굴은 바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레이가 내게 물었다.

“속상해?”

“……뭐?”

얼굴을 찡그리며 되묻자 그레이는 예쁜 회색 눈을 곱게 접어 웃으며 다시 물어 왔다.

“우리가 당하면 속상해?”

“당연한 거 아냐! 제일 얼굴 자주 보는데!”

헤이먼이 뒤에서 손을 뻗어 내 손목을 잡고 있는 그레이를 살짝 밀어 냈다.

“그만해.”

들뜬 그레이는 밀려났는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지 싱글거리며 나를 바라봤다.

“지금 그레이 너무 기분 좋은데. 솔레아가 속상해해 줘서.”

“으. 너 3인칭 고쳐라.”

“솔레아가 먼저 고쳐.”

“내가 언제 썼어.”

“솔레아 맨날 쓰잖아.”

“나 그런 거 안 해!”

“헤이먼한테 물어봐!”

나는 몸을 돌려 헤이먼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내가 3인칭을 써?”

헤이먼은 내가 한 질문엔 대답 않고 살짝 고개를 돌리며 엉뚱한 소리를 해 댔다.

“……사실 헤이먼도 기분이 썩 나쁘진 않군.”

“뭐야, 둘 다 돌았어?”

“오빠들한테 돌았어가 뭐야, 그레이 속상해. 힝.”

“왜 이래! 정말!”

그레이가 뒤에서 두 팔을 뻗어 내 어깨 위에 올리곤, 제 턱을 내 정수리 위에 올렸다.

“힝. 그레이 감동.”

“미친 거야? 그레이 진짜 위험한 거 같은데.”

아웅다웅하는 우리 둘을 바라보는 헤이먼의 미소는 마차가 올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헤이먼은 오늘 기분이 좋아서 이대로 집에 돌아가기 아쉽군.”

“그레이도 그렇게 생각해. 잠깐 바람이나 쐬고 가자.”

“오빠들아. 솔레아한테도 의견을 좀 물어봐라. 솔레아는 피곤하다고.”

마차 문을 열어 준 마부가 이상한 눈빛으로 우릴 바라보긴 했지만 금세 개의치 않고 시선을 돌렸다.

베르고 공작가의 전용 마부라 그간 그레이와 내가 저택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싸우는 걸 자주 봐서 그런 것이 분명했다.

그레이는 정말로 기분이 좋은지 계속 내 머리 위에 턱을 괸 채 말하다가 내 허리 양쪽을 잡고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악!”

어느새 마차에 먼저 올라탄 헤이먼이 안에서 내 두 손을 잡고 당겨 줬다.

짐처럼 실렸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어쨌든 손 하나 까딱 않고 마차에 올라탔다.

뒤이어 바람처럼 올라탄 그레이가 내 옆에 앉아 장난치듯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가 킬킬 웃으며 몸을 물렸다.

마부가 문을 닫기 전 헤이먼은 부드러운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재회의 언덕으로 부탁하지.”

“예, 도련님.”

잠시 후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창밖을 보며 화보 A컷처럼 웃던 헤이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이 되면 큰일이 나겠지만, 어쨌든 오늘은 기분이 좋아.”

그레이가 너스레를 떨며 덧붙였다.

“그래. 큰일이 안 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속은 개운하다. 정말이야.”

큰일이라고 해 봐야 이 가문의 평판이 떨어진다, 그런 거 아닌가.

아니면 더 중요한 일이 있는 건가.

잠깐 고민하다가 문득 몇 주 전 공작의 방에서 들려오던 대화가 떠올랐다.

솔레아의 결혼.

아, 참. 그게 있었지.

갑자기 기분이 축 가라앉았다. 솔레아가 필요하니까 잘해 주는 거였는데.

“아쉽지만 내 결혼 사업은 물 건너갔네.”

무미건조하게 툭 던진 말에 그레이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뭐?”

창틀에 팔꿈치를 올리고 밤바람을 맞던 그레이가 날 돌아보며 인상을 단번에 구겼다.

헤이먼의 미소 또한 사라졌다.

그는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결혼이라니. 누가.”

“결혼을 한다며. 아니, 시킬 거라던데.”

“누가 그딴 소리를 지껄이고 다녀.”

“그렇게 애써 모른 척할 필요 없어. 들어서 알고 있으니까. 괜찮아.”

물론 난 그 전에 돌아갈 거야.

아무리 날림으로 한다 해도 결혼 준비하는 데 적어도 몇 달은 걸릴 테고, 오늘 일기장에 1을 적는 데 성공했으니까 한 문장 정도야 금방이야.

난 돌아갈 거고, 이곳에 다시 돌아올 일은 없어.

내 덤덤한 태도에도 마차 안의 공기는 무거워지기만 했다.

“누가 그런 말을 했지?”

“응?”

헤이먼의 연한 분홍색 눈동자가 나를 잠잠히 응시했다.

고요한 눈빛을 보고 있자니 널뛰던 가슴이 원래의 제 고동을 찾아가는 듯했다.

나는 입을 열어 높낮이 없는 평온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공작님 방에서 들었어. 무슨 패륜아랑 나를 결혼시키면 곡창 지대를 가질 수 있다고. 그리고 처음 내가 왔을, 아니, 눈을 떠서 정찬실에 갔을 때도 너희 그 얘기 하고 있었잖아. 기억 안 나?”

그레이가 눈살을 찌푸리며 끼어들었다.

“그땐 병상에 누워 있는 네 앞으로 날아오는 비상식적인 청혼서들을 거절하느라 온 가족이 비상이었고, 아니, 잠깐만. 뭐? 패륜아?”

그레이는 제대하고 돌아왔더니 학과가 사라져 당황한 복학생 같은 얼굴로 허공을 응시했다.

“……패륜아라고?”

“푸학!”

그 멍청한 표정 때문에 웃음이 터져 결국 얼굴을 가리고 웃어 버렸다.

하지만 헤이먼과 그레이는 심각했다.

“아, 형. 혹시 그거 아냐? 전에 라트엘이 화난 얼굴로 오늘 이상한 장사꾼이 찾아와서 아버지 업무 시간을 빼앗아 갔다고 씩씩거렸잖아.”

“그래, 정시 퇴근 못 했다고 한참 씩씩거렸지. 페르난도 후작가였던가?”

“어. 근데 페르난도 영식이 패륜아였나?”

“……그건 모르지. 말을 섞어 본 적 없으니.”

“그걸 아버지가 허락하셨을 리 없는데.”

“불같이 화내셨으니 당연하지.”

그레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내 손을 잡고 짤짤 흔들며 재촉했다.

“솔레아, 너 그때 아버지 방에서 어디까지 들었던 거야?”

“결혼하면 곡창 지대를 가질 수 있다는 것까지였지.”

“그럼 거절하기 전까지 들은 거잖아! 아우, 깜짝이야.”

헤이먼은 아까보다 훨씬 풀어진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오해다, 솔레아. 그런 바보 같은 말 하지 마. 웬 놈이 찾아와서 너와의 결혼을 들먹거렸다며 아버지께서 한참 화내셨으니까.”

“……그래?”

“당연하지. 왜 널 그런 집안과 결혼시켜. ……아니, 그 전에 결혼 자체가 너무 먼 얘기 아닌가.”

열여덟 살이면 성인이라고 앤이 그랬는데.

“그럼 오늘 파티도 결혼 상대를 찾기 위해 온 게 아닌 거야?”

내 질문에 그레이가 짧은 한숨을 푹 내쉬곤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그건 그냥 네가 건강해졌으니까 같이 밖에 나가자고 한 거잖아.”

아, 그랬구나.

그랬던 거구나.

그레이는 내 머리에 아프지 않게 꿀밤을 때리며 면박을 줬다.

“너는 헛소리 좀 하지 마! 이건 건강하라고 운동시켜 놨더니 이상한 소리나 하고!”

“아야! 운동을 네가 시켰어?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한 거지!”

“얜 꼭 우리끼리 있음 너라고 하더라. 남들 앞에선 오빠라고 부르면서!”

“남들 앞에서도 너라고 해 줘?”

나도 모르게 웃음이 자꾸만 새어 나왔다.

아니구나. 진짜로 사랑을 받았던 거구나.

긴장이 풀렸다.

해묵어 굳어 버린 감정의 표면이 툭 하고 깨지는 감각이었다.

다시 그레이와 장난을 치기 시작하는데, 헤이먼이 창을 활짝 열었다.

“도착했어.”

마차에서 내린 후, 헤이먼을 따라 언덕을 몇 분 동안 올라갔다.

올라가는 내내 그레이는 1분마다 나를 돌아보며 ‘야, 업어 줘? 힘들면 말해라.’ 하고 묻고 또 물으며 계속 귀찮게 굴었다.

“너 구두는 괜찮아? 업어 줘? 아니면 신발 바꿀까?”

“네 왕발이 내 신발에 들어가겠냐.”

“솔레아. 아직 내 마력이 조금 남아 있으니 힘들면 말해라. 실어 나를 수 있다.”

“괜찮다니까!”

고작해야 10분 정도 올라가는 거면서.

마차로 꽤 올라온 뒤에 야트막한 작은 언덕만 도보로 오르는 거라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언덕 꼭대기로 올라가니 멀어진 황궁의 반짝이는 불빛들과 머리 위에 떠 있는 환한 달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하지만 여전히 어두운 건 매한가지였다.

“여기가 왜 재회의 언덕이야?”

내 질문에 헤이먼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곳에선 잃었던 인연을 다시 만난다는 전설이 있거든. 뭐, 꾸며 낸 이야기지만 워낙 경치가 아름다우니까 한 번쯤은 와 볼 만하지.”

야경이 예쁘긴 하지만 그렇게 극찬할 정도인가……?

헤이먼은 말을 마친 후 내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놀라서 넘어질까 봐 잡는 거다.”

“뭐야. 둘이 손 언제 잡았어. 그레이만 쏙 빼놓고. 힝. 그레이 삐짐.”

그레이가 되도 않는 애교를 부리며 내 손을 잡는 사이 헤이먼이 조용히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작은 바람이 불어와 풀숲이 흔들리며 사방에서 별빛이 솟아올랐다.

반딧불이었다.

온통 검었던 시야가 금세 환해졌다. 노란 불빛이 점점이 공중으로 올라가며 허공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한참을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서 있었다.

하늘 위에서 빛나는 무수한 별무리가 땅까지 이어져 내려온 듯 어디까지가 땅이고 어디부터가 하늘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별 위에 올라선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두 사람의 손을 힘주어 고쳐 잡았다.

곁을 지켜 주는 둘의 따듯한 체온 덕에 전혀 춥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것들이 멀게 느껴졌다.

저 먼 황궁도. 엉망진창으로 망쳐 놓은 파티도.

연신 걱정을 하는 솔레아의 가족들과…….

영원히 완성되지 못할 삶이라고 느껴지던 나의 지난 평생까지도.

깨져 버려 텅 빈 것 같던 마음 어딘가에 따뜻한 온수가 차올랐다.

‘……솔레아. 미안해. 네가 느껴야 할 행복을 도둑질해서. 근데 이번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 내가 돌아가기 전까지만. 꿈이라고 생각할게. 깨고 나면 다신 바라지 않을게.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그러면 남은 날은, 이 기억으로 견디며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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