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드물게도, 카라샤펠 황녀의 커다란 벽안이 요동쳤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정말입니다. 이것 보세요.”
마법사 시녀가 주문과 함께 영상석의 화면을 허공에 띄우자 방 안의 전경이 작게 펼쳐졌다.
소파에 앉아 말을 하는 황녀의 모습은 똑같았지만, 맞은편에 앉아 있었던 베르고의 공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목소리조차도.
“……귀신이라도 씐 것 같군, 메리. 혹시 내가 환영을 본 건가.”
“그럴 리가요. 분명히 실존하는 사람입니다. 모두가 봤는걸요.”
카라샤펠의 얼굴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그녀는 입술을 무겁게 앙다물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길고 가는 손가락이 찻잔의 겉면을 툭툭 두드렸다.
“영상석은 고급 마법사만 다룰 수 있다며. 그럼 저 영애가 영상석에 본인의 모습이 찍히지 않도록 조절할 수 있는 고급 마법사라도 된다는 건가.”
“그건 불가능합니다.”
“왜. 평생을 저택에 은거했으니 그 정도 숨기는 거야 일도 아닐 것 같은데.”
의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주장이긴 했지만 전제부터 잘못되었다.
메리는 덤덤하게 말했다.
“마력이 있는 사람만이 마법을 쓸 수 있습니다. 전하.”
“그런 것쯤이야 마법을 배우지 않아도 아는 기초 상식이잖아. 알고 있다.”
“하지만 고급 마법학에서는 해석을 달리해서 가르칩니다. 사실은 그것이 정답에 더 가깝고요.”
카라샤펠의 한쪽 눈썹이 미미하게 올라갔다.
황녀는 언제나 정확한 것을 선호하는 성미였다.
그런 그녀에게 이런 빙빙 둘러 설명하는 듯한 태도는 썩 달갑지 않은 것일 테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메리였지만 그래도 그녀는 설명을 멈추지 않았다.
이건 황가의 자손들조차 모르는, 고급 마법학을 배운 소수의 마법사들만이 알고 있는 지식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모두 마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해석이군. 그래서?”
“영상석의 원리도 그에 기반한 것이죠. 영상석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아주 작은 마력까지도 읽어 내 그 흐름의 모양을 그대로 담아내는 것입니다.”
“요점은.”
카라샤펠 황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결론부터 물어 왔다. 메리는 그제야 대답했다.
“베르고의 영애는, 고급 마법사 정도가 아니라 위대한 마법사 이달론보다 더 뛰어난 마력을 지니고 있어 그것을 숨길 수 있거나, 혹은…….”
“혹은?”
“몸에 마력이 아예 없을 수도 있습니다.”
“없을 수도 있다? 나는 정확한 답을 원해.”
황녀의 단단한 음성에 메리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엄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답을 찾아오겠습니다.”
메리가 이동 마법 주문을 외우려는 순간, 카라샤펠의 영롱한 푸른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물들며 흥미롭다는 듯 빛났다.
“베르고 영애 말이야. 위험한 인물일까?”
메리는 잠깐 고민했다.
아까 대화할 때 지켜본 바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있는지 넘치는지도 모르겠는 마력뿐 아니라 살의나 적개심 같은 악의조차.
메리는 가만히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직접 알아보시는 것은 아무래도 위험합니다. 제가 먼저 그녀를…….”
그리고 고민이 무색하게 황녀가 말을 잘랐다.
“친해지고 싶다.”
“예? 누구, 왜요?”
웬만해선 질문을 하지 않는 메리였지만 이번엔 정말 궁금했다.
왜?
베르고 가문이 돈이 많은 공신가이긴 하지만 돈 많은 공신 가문은 그곳 말고도 더 있었다.
“베르고가 필요해서입니까?”
가장 합당한 의견을 도출해 낸 메리가 물었다.
하지만 황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꽤나 상큼하게 답했다.
“그렇게 눈 똑바로 뜨고 날 거절한 건 걔가 처음이야.”
“음…….”
메리의 침묵이 길어졌다.
“으음…….”
조금 더 길어졌다.
“흐음…….”
메리가 입을 여는가 싶더니 주문을 외우며 사라져 버렸다.
순간 이동이었다.
“대답도 안 하고 도망가네. 친구 해도 된다는 거겠지.”
카라샤펠이 보기에, 솔레아는 남에게 티 나게 날을 세우긴 해도 성격이 나쁜 것 같진 않았다.
어떻게 다가가야 안 놀라고 친해질 수 있지.
황녀는 아까보다는 경쾌해진 발걸음으로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베르고는?”
연회장 정문에 서 있는 시종에게 묻자 그는 공손하게 답했다.
“모두 돌아갔습니다.”
“……웃으며?”
“예?”
“모두 웃으며 즐겁다는 듯이 돌아갔어? 내게 작별 인사도 없이?”
시종은 점잖게 대답했다.
“베르고의 영애는 나가기 전, 누군가와 소소하게 다툼을 해 상당히 험상궂은 얼굴로 나갔고, 두 영식은 꽤나 싱글거리는 얼굴로 뒤따라 나갔습니다. 아무래도 공작 부인이 없으니 제대로 된 교양을 배우지 못한 것이겠죠. 그 오빠들도 그렇고 말입니다.”
“……그래?”
“예, 전하.”
공손히 답하는 시종을 보며 카라샤펠 황녀는 미소 지었다.
“내 손님에게 함부로 말하는 걸 보니 자네는 황궁이 맞지 않는 것 같아. 다시 보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
말을 마친 황녀는 곧장 연회장 안으로 매끄럽게 걸어 들어갔고, 시종은 멍한 눈으로 황녀를 다시 부르려 했으나 곧 저지당했다.
그는 짐도 챙기지 못하고 황궁 밖으로 쫓겨나 다신 수도 땅을 밟지 못했다.
* * *
연회장으로 돌아온 나는 헤이먼과 그레이부터 찾았다.
헤이먼이 쎄이먼인 줄 알았더니 카라샤펠 황녀가 카라쎄펠이야. 도망가야겠어.
얼른 둘을 찾아서 튈 생각뿐이었다.
혹시라도 둘이 뿔뿔이 흩어져서 따로 놀고 있다거나 하면 어쩌지.
그레이가 그사이에 친구를 만들어서 정원 산책이라도 나갔으면 어떻게 찾아.
헤이먼 시켜서 마법으로 미아 찾기 방송 같은 거라도 해 달라고 해야 되나.
아무튼 고민이 많았다.
조바심에 발을 동동 구르며 연회장 안을 살폈지만 걱정이 무색하게도, 둘은 아까 내가 앉았던 벽 쪽 소파 앞에 멀뚱히 서 있었다.
그것도 꽤나 곧은 자세로. 조각처럼.
‘왜 저러고 있지? 잘생겼다고 모델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하지만 파티를 즐기는 인간들 중에서 화가처럼 보이는 인간은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은 헤이먼과 그레이가 있는 쪽으론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심하다 싶을 정도로 저 둘 근처만 공기가 얼어붙은 듯 조용했다.
그레이는 제 얼굴이 사납게 생긴 걸 아는지, 모르는지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사람들 사이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고, 헤이먼은 웃는 얼굴이긴 했으나 역시 무감해 보였다.
그때 그들 쪽으로 한 남자가 가까이 걸어가는 게 보였다.
나도 모르게 기둥 뒤로 재빠르게 숨었다.
헤이먼 불러야 되는 거 아냐? 분위기 파악하고 빨리 비켜 주라고 말해 줘야 하는데.
하여튼 저 눈치 없는 놈.
그레이의 우정을 응원해 주란 말이야. 우리 그레이 친구 없다고.
하지만 들리는 목소리는 전혀 달갑지 않은 내용이었다.
“숙녀분들이 난처해하시니 둘 다 돌아가는 게 어때.”
“신경 꺼.”
딱딱하게 굳은 그레이의 목소리에도 다가온 사내는 말을 가리지 않았다.
“매번 망신을 당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파티에 오는군. 구걸하던 게 습관이 되어 그런가? 아니면, 갈수록 뻔뻔해지는 마법 실험이라도 하는 중인가?”
남자는 길거리를 전전하던 그레이와 실험을 당했던 헤이먼의 과거를 싸잡아 욕하고 있었다.
헤이먼은 남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무덤덤하게 말했다.
“유치하게 시비 걸지 말고 그냥 가던 길이나 가지. 우린 곧 나갈 테니.”
시비를 걸던 뭉갠 은행같이 생긴 놈 뒤로 다른 남자 몇 명이 다가왔다.
그중 생태계 교란종 황소개구리같이 생긴 놈이 말했다.
“우리? 베르고의 공녀와 너희가 왜 ‘우리’지? 언제부터 천한 놈들이 귀족을 우리라 묶어 부를 수 있게 된 거야.”
연회장 자체가 워낙 넓은 탓에 말소리가 크게 울리진 않았지만 근처에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들을 법한 크기였다.
대부분은 모른 척 눈을 돌리며 다른 곳으로 피했지만 황소개구리 옆에 붙어 있는 놈들은 입을 가린 채 키득거렸다.
그러나 정작 헤이먼은 피곤하다는 듯 눈가를 손으로 꾹 누르더니 그대로 무시했다.
하지만 황소개구리는 그것조차 비웃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쪽팔린 건 아나 보지. 아무도 상대 안 해 주는 무도회에 매번 참석해 무시당하는 걸 그 공녀 아가씨가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욕하겠지, 새끼야.”
모습을 드러내며 대답하자 헤이먼과 그레이가 동시에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듣자 듣자 하니까 남의 오빠들한테 못 하는 말이 없네. 나 원 참.”
내가 같이 있을 땐 한마디도 안 하고 눈치만 보던 것들이 내가 사라지자마자 두 사람을 조롱하다니.
안 봐도 뻔하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놈이겠지. 저런 놈이라면 이가 갈리도록 숱하게 봐 왔다.
한 달 알바비로 겨우 10만 원 주면서 혼자 사는 어린애라고 만만하게 보고 밥 세끼 챙겨 주는 걸 고마운 줄 알라던 고깃집 사장이 저런 부류였다.
저런 놈에게 약점을 보이면 공격의 대상이 될 뿐이다. 설명도, 설득도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다.
결국 그 사장은 10만 원조차 제때 주지 않았다. 참지 못하고 그만두겠다고 하자 사장은 나를 잡상인 취급 하며 쫓아내려 했다.
나보다 훨씬 덩치 큰 남자가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밀치는 통에 숨이 턱 막혀 아무런 말도 못 했다.
빈손으로 터덜터덜 집으로 가다 보니 배가 고파 왔다. 하지만 내겐 천 원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나는 다시 돌아갔다. 덜덜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고깃집으로 들어가자마자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이 미친년이! 안 나가! 너 이거 영업 방해로 고소할 수 있어!’
‘해! 이 미친 새끼야! 열여덟 먹은 애 하루 열두 시간씩 매일 일시키면서 한 달에 10만 원 준 거 나도 고소할 테니까 해 봐! 고소하라고!’
손님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하자 사장은 드러누운 나를 쫓아내려 했고, 나는 바닥에 고정된 테이블 다리를 끌어안으며 소리 질렀다.
‘돈 내놓으라고! 내가 뭐, 씨발 퇴직금으로 100만 원을 달랬어? 밀린 월급 달라는 거잖아!’
결국 사장은 아내를 시켜 50만 원을 인출해 오라 했고, 잠시 후 그 돈을 내게 던지며 꺼지라 소리쳤다.
바닥에 떨어진 돈을 줍는 내 머리 위에서 독한 년, 미친년 소리가 쉴 새 없이 쏟아졌다.
그때 돈을 모두 챙겨 들고 나오며 결심했다. 다시는 멍청하게 당하고만 살지는 않겠다고.
……그래, 한국에서 당한 거에 비하면 너희는 순한 맛이지.
나는 그레이에게 다가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물었다.
“오빠. 왜 황소개구리랑 말을 섞어.”
곳곳에서 풉! 소리가 들렸다.
거봐, 생각하는 거 다 비슷하다니까. 공감되니까 웃은 거 아냐.
황소개구리가 한 발짝 가까이 다가오며 꽤 성난 목소리를 냈다.
“베르고 영애. 말이 심하십니다.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주워 담을 수가 없습…….”
“너야말로 내 오빠들한테 함부로 주둥이 나불거리지 마.”
눈을 똑바로 뜬 채 죽일 듯 노려보자 흠칫 놀란 그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애써 너스레를 떨었다.
“하! 이래서, 환경이 중요하다니까. 형제들이 그 모양이니 알 만하군.”
“아직 머리는 진화가 덜 됐나. 왜 사람 말을 못 알아듣지. 방금 한 말 입 닥치라는 뜻이었어. 못 알아듣겠어? 개구리 데려와서 통역해 줘?”
황소개구리의 이맛살이 단박에 찡그려졌다.
더 싸우고 싶었지만 그레이가 웃음을 참으며 거의 끌고 나가다시피 나를 데리고 나가는 바람에 끝장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돌려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너 얼굴 봐 뒀다. 앞으로 살면서 나랑 눈 마주치는 일 없게 해.”
“솔레아, 이제 그만하자. 응?”
“레아. 진정해라. 가자.”
“다음에 혹시라도 마주치면 잘못된 내 환경이 네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가르쳐 줄게.”
뭉개진 은행은 눈을 돌렸지만 황소개구리는 분한 듯 나가는 나를 끝까지 노려봤다.
“개구리 너 눈알 돌아가는 소리 들려. 가만 안 둬. 나 농담 안 해.”
결국 그레이는 내 허리를 안아 올려 발이 땅에 닿지 않도록 한 후 그대로 들고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