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 * *
가만 내버려 두었으면 완치되는 데 두 달이나 걸렸을 텐데 공작이 불러온 의술사의 마력 덕분인지 일주일 만에 전처럼 걸을 수 있게 됐다.
마법이 좋긴 좋구나. 부어올랐던 뺨은 이젠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침대 옆 서랍 제일 아래 칸을 열었다.
일기장과 그 사이에 끼어 있는 내 소중한 로또 종이. 그리고 글도 안 써지는 빌어먹을 만년필.
얼른 집에 가려면 뭐든 방법을 찾아야 할 텐데.
그동안 열심히 시도해 봤지만 일기장 어느 곳에도 글자를 적을 수 없었다. 그저 하루가 끝날 때쯤 착실히 당일의 일이 기록될 뿐.
웬 친구라는 것들이 찾아와서 시비를 걸길래 나름대로 짤짤 털어 줬다. ……디에르고 공작이 ‘빌미’라는 단어에 불같이 화를 낸 걸 보니 딸을 정말 많이 사랑했나 보다. 그럴 법도 하지. 그런데 나는 왜 놀라서 굳어 버렸을까.
오늘 일은 명백한 실수였다. ‘아빠’라는 사람이 소리를 지른다고 굳어 버리다니. 진짜 아빠도 아닌데.
공작은 그날 이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매일 1통씩 편지를 보내왔다. 벌써 7통이나 쌓인 편지를 서랍에서 꺼내 침대 옆 탁자에 펼쳐 놓았다.
첫날의 편지는 미안하다는 내용이었다.
‘솔레아.’
이름을 적고 한참 후에야 뒷부분을 적기 시작했는지 잉크가 말라 있는 색감이 달랐다.
‘다친 곳은 좀 어떠니. 의술사에게 비용은 상관하지 말고 최대한 빨리 나을 수 있도록 신경 써 달라고 했는데 얼른 나았으면 좋겠구나.
어제는 화를 내서 미안했다. 어떤 이유로든 너에게 소리 지르며 화를 낸 건 내 잘못이야. 기억도 온전치 않아 이것저것 많이 힘들 텐데 네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소리를 높였구나.
네 마음이 풀린다면 다시 나와 차를 마셔 주겠니. 기다리고 있을 테니 급하지 않게 천천히 오렴.’
둘째 날은 그 친구라는 것들에 대한 처분 내용이 함께 적혀 있었다.
‘레아. 어제저녁 식사 시간엔 수프 한 그릇을 다 비우고 작은 감자까지 하나 먹었다고 앤이 자랑하더구나. 네가 전보다 잘 먹는다고 하니 기쁘구나.
넌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단 너도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소식을 전하자면, 너를 괴롭히던 그 세 가문의 작위를 모두 박탈시켰다. 제국의 공신인 우리 가문을 모욕했으니 당연한 처사지. 아마 다시는 우리 땅을 밟지 못할 거다.
그리고 너를 찾아왔던 그 세 명의 영애는 각 가문에서 처리했단다.
그들이 오라비들을 모욕하는 말을 하고 다녔다는 네 발언을 그레이가 직접 들었다고 증언했고, 그 자리에서 르밀리앙이라는 영애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라고 말한 덕에 모욕을 했다는 걸 스스로 입증한 게 돼 버렸거든.
이런, 내가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 거니. 말로 설명하면 더 잘할 텐데.
오랜 시간 동안 마음고생이 많았다. 오라비들이 받은 모욕에 진심으로 화내며 싸워 줬다니 내가 미처 살피지 못한 부분을 네가 채워 줬구나.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크다.
그럼, 오늘도 잘 먹고 잘 자고, 푹 쉬렴.’
편지의 내용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밝아졌다.
‘레아. 요즘 그레이랑 자주 얘기를 나눈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레이에게 네가 어찌 지내냐 물어봤는데 글쎄 이놈이 하는 말이, 네가 예쁜 쓰레기라더구나.
동생에게 무슨 그런 말을 하냐고 타이른 뒤 연무장 100바퀴를 뛰고 오라고 시켰다. 그런데 이 녀석이 100바퀴를 뛰고도 ‘아버지. 솔레아는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 예쁜 쓰레깁니다.’라고 하더라니까. 물론 나는 안 믿지. 근데 말이야. 혹시나 해서 묻는데 그레이랑 싸웠니……?
얘야. 내가 그 말을 믿는다는 건 절대 아니란다.’
편지를 읽다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그레이 새끼야. 공작님한테 예쁜 쓰레기라고 하고 다니면 어떡하냐고.
오늘 아침에 받은 편지지를 펼치자 꽃 한 송이가 툭 떨어졌다.
꽃을 주워 들어 손 위에 올려놓은 뒤 천천히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레아, 잘 잤니. 좋은 아침이다. 오늘은 내가 집에 없으니 편히 돌아다녀도 괜찮아. 물론 마르실라는 아직 네가 다리가 낫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했지만 그래도 내가 저택을 비우면 네가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있지 않을까 싶구나.
아, 일부러 피하는 건 아니란다. 황궁에 볼일이 있어서 다녀오는 것이니 너는 걱정 말고 오늘도 그레이와 오늘은 헤이먼과 같이 있는 게 어떻겠니.
그레이가 너에게 썩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진 않더구나.
그리고 오늘은 마침 하늘이 맑고 푸르니 테라스에서 차를 마신다면 아주 멋질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구나. 혹시 몰라 내가 좋아하는 찻잎을 보낸다.
동봉한 꽃은 오늘 아침 눈을 뜨고 창밖을 바라봤을 때 가장 활짝 피어 있던 꽃이란다. 네가 보고 기뻐했으면 좋겠구나.’
뭐지. 이 아저씨…….
젊었을 때 전쟁만 박 터지게 하고 다녔다면서 사람 마음 후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잖아.
하마터면 사회의 비난을 한 몸에 받는 걸로도 모자라 심의에 걸릴 뻔했어.
나도 모르게 자꾸만 웃음이 배시시 피어올랐다.
한없이 가볍게 말하긴 했지만 묘한 기분이 드는 건 당연했다. 이런 어른은 처음이었다.
아예 다른 세상이라 그런가. 어른들도 무슨 설탕에 푹 절여졌다가 나온 것 같네.
이상하게 뒤통수가 간질간질했다. 발가락도 스멀스멀 뜨거워졌다.
이상하다는 말 말고는 다른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솔레아는 좋았겠다.
이리저리 부푸는 마음들을 애써 한 문장으로 꾹 눌러 정리하고서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앤을 불렀다.
“앤!”
“네, 아가씨!”
무슨 5분 대기조도 아니고 뭐 그렇게 박진감 있게 문을 열고 들어와.
“이 꽃이 피어 있는 곳에서 차를 마시고 싶어. 그리고 스콘도 부탁해.”
편지지를 손에 쥔 채 꽃을 흔들어 보이자 앤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네! 아가씨! 금방 준비할게요! 찻잎은, ……공작님께서 보내신 걸로 준비할까요?”
“그래.”
“옙! 맡겨 주세요!”
기분이 무척 좋았는지 앤은 문도 제대로 닫지 않고 잽싸게 튀어 나갔다. 슬쩍 일어나 복도를 내다보자 신난 망아지처럼 공중으로 폴짝 뛰어오르며 달려가는 앤이 보였다.
뭐가 저렇게 좋지.
요 며칠 내내 공작과 내 사이가 소원해 저택의 분위기가 영 구리다는 얘기는 그레이에게 전해 들었다.
하지만 고작 그런 걸로 사람들의 기분이 오락가락하다니 이상하잖아.
겉으로만 보면 겨우 아빠와 딸이 싸운 것뿐인데. 싸운 것도 아니지. 그저 아버지가 화내고, 딸이 놀랐던 것뿐이다.
그건 아주 사소한 일인데.
편지들을 정리하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
“여긴 다정한 사람들이 많구나.”
마법을 때려 박은 탓인지 몸 컨디션이 전보다 훨씬 좋아진 게 느껴졌다.
그러니 오늘은 공작님 말대로 차를 마셔야겠다.
넓은 정원에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자니 멀리서부터 헤이먼이 천천히 다가오는 게 보였다.
쎄 이즈 싸이언쓰의 관상을 지닌 미남.
쎄이먼이 말했다.
“몸은 좀 어때. 여기까지 나온 걸 보니 이제 걸을 수 있나 보네. 괜찮아?”
“응. 걷는 것 정도는.”
“다행이다. 의술사를 한 번 더 불러도 되니까 불편하면 언제든 말해.”
“……알았어.”
어라, 나 혹시 똥촉인가. 얘 착한 사람 같아.
매일 그레이 새끼야와 얘기하다 보니 이런 살가운 인사말은 약간 어색하게 느껴졌다.
옆에 있던 하녀가 얼른 찻잔을 하나 더 가져오더니 헤이먼의 앞에 놓고 붉은 홍차를 따라 주었다.
그야말로 귀공자 같은 자태로 내 맞은편에 앉은 헤이먼은 신이 천 일 동안 세밀하게 빚고 또 빚어서 지상으로 내려보낸 것 같은 미남이었다.
너 한국말도 잘하는데 한국에서 데뷔하지 그랬어.
최소한 유튜브라도 했어야지.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사람들이 ‘단군 이래 제일 재밌네요.’ 하고 좋아요와 구독, 채널 알람 설정까지 해 줬을 텐데.
물론 그레이도 팬티를 세 번은 갈아입을 정도로 지리게 잘생겼지만 장르가 달랐다.
굳이 비교하자면 그레이는 보고 있으면 묘한 위압감에 무릎이 저절로 털썩 꿇리는 날카로운 미남 느낌이었고 헤이먼은 뒤통수가 깨져 피를 철철 흘리며 언뜻 스쳐봐도 저승까지 따라갈, 선과 악이 공존하는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 관상이었다.
예술이네, 진짜.
묘하게 오른쪽 얼굴과 왼쪽 얼굴이 달랐다. 눈의 쌍꺼풀이 짙은 오른쪽 얼굴은 아련 서사 남자 주인공 같았고, 그에 비해 조금 더 얄쌍한 왼쪽 얼굴은 퇴폐미가 철철 흘러넘쳤다.
이보세요. 지금 당신의 퇴폐 간지가 제 드레스를 적시고 있다고요. 머릿속에서 계략 광공 플레이리스트가 재생되고 있는 걸 아냐고요.
뚫어져라 바라보는 내 시선을 눈치챈 건지 소리 없이 조용히 차를 마시며 꽃을 보던 헤이먼이 나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뭐지, 방금 CF였나.
아니. 안 돼. 정신 차려. 한국에서 토끼 같은 17억이 기다리고 있어.
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든 후 태연하게 말했다.
“고마워.”
“뭐가?”
“그날 내 방으로 마법 보내 준 거.”
“아.”
“아아?”
고개를 갸웃 꺾으며 헤이먼이 한 말을 똑같이 따라 하는 순간, 그레이가 기겁하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내가 너 입 닫고 다니랬잖아아악∼’
요 며칠 내 말버릇을 익힌 그레이는 펄쩍 뛰며 기함을 했다.
‘야, 너는 다리 나아도 밖에 나다니지 마라!’
‘왜? 너무 예뻐서?’
‘돌았나요? 그게 아니라 누가 널 베르고의 공녀라고 보겠냐. 이렇게 막 나가는데.’
‘내가 뭘 막 나가. 마르실라랑 하녀들은 내 칭찬 엄청 하던데.’
‘그럼 나한테는 왜 이래.’
‘차가운 공작저의 여자. 하지만 하녀들에겐 따뜻하겠지……. 뭐, 그런 거 아닐까.’
내 말에 인상을 팍 찌푸린 그레이가 방을 나섰다가 다시 들어왔다.
‘동생. 혹시 뇌를 바꿔 끼웠어?’
‘오빠. 혹시 뇌를 바꿔 끼우고 싶어?’
냉랭하게 생긴 이목구비와는 어울리지 않게 입술 한쪽을 삐죽거린 그레이는 방을 나가면서도 계속 구시렁거렸다.
‘쟤 저거 진짜 최소한 비정상인데…….’
내가 며칠 전 그레이와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풉 하고 웃음을 터뜨리자 헤이먼이 다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내가 웃어서 바라본 게 아니라는 듯 그는 금세 아까 전의 이야기를 이어 갔다.
“네가 그날따라 약해 보여서 마음이 쓰였을 뿐이야. 이젠 괜찮다니 다행이네.”
“나 원래 약했다고 들었는데.”
잠시 무감한 눈으로 나를 보던 헤이먼은 고상하게 찻잔을 들고 차를 마시며 대답했다.
“넌 우리와 근본부터 다르니까. ……그런데 그날은 처음으로 네가 어딘가를 부유하는 것처럼…….”
“도련님, 아가씨!”
집사 모건이 헤이먼의 말을 끊으며 뛰어왔다.
“무슨 일이지?”
“마법사 협회장께서 오셨습니다.”
그런 것도 있어? 역시 어느 세계를 가도 협회는 있구나. 노조도 있나?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며 남은 홍차를 호록 마시고 있는데 헤이먼의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괜찮으니 안으로 들여.”
헤이먼의 말에 잠시 눈치를 살피던 모건이 정문을 향해 뛰어갔다.
“협회장이 누군데.”
“아무것도 아니야. 방으로 돌아가 있어. 넌 몸이 안 좋으니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몸이 좋아져서 다행이라고 했으면서 지금은 몸이 안 좋으니까 방으로 가라니. 자리를 피해 달라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싫어. 안 가.”
“뭐?”
흐트러진 매무새를 돌보던 헤이먼이 조금 굳은 얼굴로 날 신경질적으로 돌아봤다.
“네가 있을 이유가 없잖아.”
“공작님이 편지로 ‘오늘은 헤이먼과 같이 있는 게 어떻겠니.’ 하시던데. 난 오늘 너랑 놀 예정이야.”
내 말에 헤이먼은 아까 전과는 확연히 다른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가라면 가.”
아, 이상하네.
혹시 나 지금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꼈나. 싹수가 유난히 누렇게 보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