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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9/192)

9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헤이먼을 보고만 있자 그는 이내 내게서 등을 돌려 버렸다.

“네 마음대로 해. 어차피 네가 있든 없든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말을 마친 헤이먼은 내 옆을 스쳐 지나가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마법사 협회장이 뭐길래 나한테는 얼굴도 안 보여 주려고 하는 거지.

됐다, 이놈아. 나도 안 가. 오늘은 너희 아빠 봐서 참는다. 베르고 공작 아니었으면 네 그 분홍 머리 뽑아다가 빗자루를 만들었을 거야.

그때 미미한 불쾌감을 씻어 주듯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간질이며 지나갔다.

휴가라도 나온 듯 기분이 산뜻해졌다.

그래, 방에 가서 일기나 써 보자.

왠지 오늘은 일기장에 글씨를 쓸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날 있잖은가. 아무 근거도 없는 자신감이 솟구쳐서 로또에 당첨될 것만 같은 그런 날.

물론 대부분은 똥촉이지만, 난 로또 1등에 당첨된 행운의 주인공이니까 한 번 정도는 촉이 맞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 무심코 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해초 같은 청록색 머리칼이 두 눈 가득 들어왔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망토를 걸친 사내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빠르게 거리를 좁히며 금세 내 앞까지 다가왔다.

전우치야 뭐야. 왜 축지법을 써.

‘도사란 무엇이냐∼ 도사란 마른하늘에 비를 뿌리며 땅을 접어 달리고!’

머릿속에서 영화의 한 장면이 재생됨과 동시에 쿵짝, 쿵짝 하는 신나는 국악 비트가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내 앞에 우뚝 멈춰 선 그 남자는 날 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얼굴은 20대 정도로 보였지만 묘하게 나이 들어 보이는 사내였다.

“누구세요?”

“반갑습니다. 공녀님. 말씀은 익히 들어 왔는데 뵙는 것은 처음이군요. 저는 마법사 협회 도르간나의 협회장 이달론이라고 합니다.”

도르간나? 돌았나?

“아, 예. 저는 몸이 안 좋아서 이만.”

내 쎄이언스가 도망가라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었지만 그는 나를 보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공녀님께 신성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저 안 믿고, 안 사요. 제사도 안 지내고, 무슨 공부든 안 합니다.”

사이비를 차단하듯 빠르게 대답하고 자리를 벗어나려 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최근에 큰일을 겪지 않으셨습니까?”

이거 한국에서 여러 번 겪은 수법인데.

“왜요. 조상 중에 큰 사고를 겪으신 분이 계셔서 한을 풀어 드려야 하나요? 아니면, 제 마음의 불안은 영의 치료로 나을 수 있는 그런 건가요?”

비웃으며 쏘아붙이자 이달론은 크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다만 공녀님의 신성한 기운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해 여쭌 것이니 노엽게 여기지 마시고 한번 생각해 보시지요. 정말로 최근에 큰일을 겪으신 적이 없으십니까. 큰 행운이나, 아니면 그에 준하는 불행 같은…….”

17억을 따는 큰 행운을 얻자마자 은행이 없는 곳으로 떨어진 큰 불행을 겪었는데요.

하지만 이 가짜 젊은이의 말에 동조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일단 며칠 전 불면의 밤에 마법을 보여 주며 달래 준 헤이먼이 꺼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말없이 띠꺼운 표정으로 이달론을 바라보고만 있는데, 그런 나를 발견한 그레이가 잽싸게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 역시 나와 이달론이 마주치는 걸 원치 않았던 듯 당황한 눈으로 이달론을 지나쳐 내게 다가왔다.

“왜 나와 있어. 들어가, 솔레아. 방까지 데려다줄게.”

“아냐. 나 혼자 들어갈 테니까 오빠는 둘째 오빠한테 가 봐. 이 사람이랑 같이.”

“아, 어. 그래. 잠시만. 앤이랑 같이 들어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앤이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도도도 빠르게 달려왔다.

나는 이달론에게 짧게 눈인사를 하고 그를 지나쳤다.

그러자 이달론이 내 뒤통수에 대고 낮게 말했다. 작은 목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귓가에 바로 꽂은 것처럼 선명하게 들리는 이상한 음성이었다.

“곧 다시 뵙지요.”

가짜 젊은이를 뒤로하고 저택의 안으로 들어갔지만 아까 전과는 공기가 사뭇 달랐다.

이 꿀꿀하고 찝찝한 느낌은 분명 저 이상한 가짜 젊은이에게서 오는 거였다.

“앤. 저 이달론이라는 사람 몇 살이야?”

“위대한 마법사 이달론 님이요?”

“위대한 마법사라니?”

“현존하는 마법사 중에 가장 막대한 양의 마력을 가지고 계시대요! 대륙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라 별칭이 위대한 마법사인걸요!”

국가 대표 마법사 같은 건가. 근데 왜 이렇게 꺼림칙하지.

내 꿀꿀한 기분을 알아채지 못했는지 앤은 신나서 계속 떠들었다.

“저분의 나이는 밝혀지지 않았어요. 굉장히 오래 살았다는 건 확실한데, 정확한 나이는 아무도 몰라요. 고급 마법을 자유롭게 사용할 줄 알고, 그리고…….”

“그리고?”

“공작저에 가끔 들르셔서 헤이먼 도련님께 마법을 가르쳐 주셔요. 마법사 협회장인 위대하신 마법사께 직접 가르침을 받다니 정말 대단하시죠.”

“……흠, 글쎄.”

헤이먼은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지 않던데.

이달론이 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싸늘하게 식은 냉랭한 눈으로 내게 들어가라 했던 걸 보면 분명 뭔가 이유가 있는 걸 텐데.

내가 석연치 않은 대답으로 대화를 끝내려 하자 앤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이달론 님은 왜 헤이먼 도련님만 가르치실까요? 사실 헤이먼 도련님보다 마력이 더 강한 사람도 있다고 들었거든요.”

“뭐, 여기가 공작가니까 그렇겠지. 마력이건 뭐건 권력이 뒷받침돼야 하니까 그런 거 아닐까.”

대충 대답하곤 방으로 들어갔지만 묘한 불쾌감이 계속해서 날 따라왔다.

앤의 말이 맞았다.

마력이 더 강한 사람이 있음에도, 이달론은 왜 꼭 헤이먼이어야만 할까. 단순히 공작가의 배경이 필요하다고 하기에는 뭔가 이상한데.

한참 고민하다가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아냐! 가만히 있자! 괜히 여기저기 끼어들다가 사고 치지 말고 여기서 일기장에 글씨 쓰는 거나 연습하자!

헤이먼이고, 그레이고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나는 집에 갈 건데.

가족이 다 무슨 소용이 있어. 여기도 가짜, 나도 가짜. 어차피 다 가짜인걸.

마음속에 피어오른 불안감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서랍을 열고 일기장을 꺼냈다.

“그나저나 이게 어떻게 렘샤 부인의 어쩌구 핫 타임이라는 거야?”

진짜 그런 내용이었으면 읽어나 보지. 내가 봤을 땐 내 말투로 적혀 있지만 나는 전혀 쓴 적이 없는 일기장으로밖에 안 보이는데.

투덜거리면서 만년필을 손에 쥐었다.

일기장을 펼쳐서 바닥에 내려놓은 뒤 두 발로 일기장을 밟고 고정한 다음에 두 손으로 검은색 만년필이 튕겨 나가지 않도록 힘주어 잡았다. 그러곤 천천히 종이와의 거리를 좁혀 갔다.

“으……. 제발, 후……. 아! 좀!”

이런 썅, 이거 왜 안 돼!

“야, 오늘 끝장을 보자.”

온몸으로 내리눌러 봤지만 조금 가까워질 만하면 힘에 부쳐서 자꾸 손에서 만년필이 미끄러졌다.

힘이 모자라? 그럼 힘을 키우면 되지.

나는 펜을 잠깐 내려놓고 맨바닥에 엎드렸다.

그리고, 중학교 체력장 때 이후론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팔 굽혀 펴기를 시도했다. 무릎을 바닥에 대고 했는데도 다섯 개를 넘기는 것조차 어려웠다.

“하으어나! 두우울! 세으엇! 네으으아아르랏챠!”

기합을 넣었는데도 네 개가 다라니. 이 염병하게 병약한 몸뚱이 같으니라고.

하지만 방금 전보다는 약간 팔 근육이 올라온 것 같았다.

“반드시 집에 가고 만다.”

그때 멈췄어야 했다. 힘도 부족한데 욕심부리지 말고 그냥 그때 멈추고 좀 더 강해진 다음에 도전했어야 했는데.

다시 도전했지만 여전히 힘이 부족했다. 그럼 이번엔 테이블을 잡고 다시 팔 굽혀 펴기를 하자.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잡고서 하니 바닥에서 할 때보단 더 수월해서 열 개까지는 꾸역꾸역 성공했다.

그다음엔 벽에 두 손을 대고 몸을 약간 기울인 후 팔 굽혀 펴기를 하듯 움직였다. 이게 운동이 되나 싶었지만 서른 개쯤 하니 삼두와 광배근 부분에 힘이 바짝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좋았어, 근육 펌핑을 이렇게 했는데도 일기장 네가 버티나 보자.

이 몸에 들어온 이후 지금이 기량 최고조야.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지.

방구석에서 펼쳐지는 나 혼자만의 악전고투였다. 다시 한번 이를 악물고 만년필을 쥐었다.

두 손으로 만년필을 터뜨릴 듯 움켜쥐고 종이 위로 천천히 내렸다. 역시나 어느 정도 가까이 가니 벽에 가로막힌 듯 전혀 움직이질 않았다.

하지만 약간의 희망은 있었다. 진짜 벽처럼 딱딱한 무언가가 아니라 그저 밀어 내는 느낌의 힘이라 계속해서 밀면 종이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으랴으아압……!”

꾸역꾸역 밑으로 내리던 순간, 손에서 흐른 땀 때문인지 이 개같은 만년필이 앙탈이라도 부린 건지 모르겠지만 만년필이 팅 하고 손에서 튀어 올랐다.

그리고 튀어 오른 만년필은 정확히 내 이마 정중앙을 때렸다.

“악!”

“아가씨? 무슨 일이세요? 괜찮으세요?”

내 고통 어린 비명에 밖에 있는 앤이 문을 두드려 왔다. 지금 앤이 이 방에 들어와선 안 된다.

몇 분 내내 팔 굽혀 펴기를 해서 땀을 흘리고 있는 데다가 이 망할 일기장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야설로 보이니까.

야설 읽으면서 땀 줄줄 흘리면 미친 변태 같잖아요.

하지만 앤은 내가 걱정됐는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아가씨! 무슨 일이세요!”

나는 황급히 펼쳐진 일기장을 바라봤다. 책 표지만 안 보이면 괜찮아. 흰 종이 위에 있는 글씨들은 조그마할 테니까.

하지만 이 앙큼 발칙한 일기장은 얄밉게도 어느새 덮인 채 표지를 훤히 보여 주고 있었다.

내 눈엔 글씨 하나 없는 평범한 무지 다이어리인데 앤한테는…….

앤의 당황스러운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레, 렘샤 부인과의 위험한 계약?”

“어? 2탄인가?”

“2탄이라고요? 1탄도 보셨어요?”

“……제가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존댓말이 절로 나왔다. 당황한 내 모습에 앤은 잠깐 흠칫 놀라더니 이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귀한, 취미를…… 어, 바,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아가씨의 비명 소리에 놀라서……. 다른 분들께는 비밀로 할게요. 아가씨께서 부끄러우실 수도 있으니까. 그, 그럼 이만 가 볼게요.”

해명할 틈도 없이 앤은 그대로 총총 뒷걸음질하며 급하게 방을 나가 버렸다. ‘잠깐만……!’ 하고 외쳐 봤지만 닫힌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앤의 발소리는 이미 멀어진 후였다.

앤이 멀리 떨어진 걸 알리듯 발소리가 작아진 후에야 나는 이마를 문지르며 다시 펜을 주워 들었다.

오늘 뒤졌다, 이 새끼.

나는 밤이 올 때까지 계속해서 팔 굽혀 펴기를 했다. 잠깐 쉬었다가 또 하고, 또 조금 쉬었다가 하고. 팔의 힘이 다 빠져서 바닥에 널브러질 때까지 계속 반복했다.

이 몸이 강해지면 일기장 가만 안 둔다.

그래서였을까. 일기장이랑 씨름하다가 겨우 잠든 새벽, 상체가 짓눌린 것처럼 아팠다.

설상가상으로 손목에도 통증이 느껴졌다. 팔뚝 전체가 쥐어짜는 듯 아프고, 어깨부터 날개뼈를 감싸는 모든 곳이 모조리 쑤셨다.

“으으……. 앤, 살려 줘.”

화려한 근육통이 내 몸을 감쌌다.

이런 걸 바라진 않았는데요. 근육통 없이는 근육을 얻을 수 없다는 건가.

헬스 하는 놈들은 모두 이런 고행을 겪은 뒤에 울퉁불퉁한 근육을 가지는 거냐고요.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어.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들어 올리려 했지만 쇄골 아랫부분의 소흉근이 갈기갈기 찢어지듯 아파 와서 그것조차 힘들었다.

“……어, 진짜 엿된 거 같은데.”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앤!”

여명이 푸르스름하게 돋아 오는 새벽이었다. 앤은 내 상태를 보자마자 기겁하며 저택 내에 상시 대기 중인 의사를 깨우러 갔다.

그다음엔 하녀장인 마르실라, 그리고 자다 깨서 급하게 달려온 베르고 공작에 그레이까지.

“레아, 이게 무슨 일이니. 아빠가 미안했다. 혹시 정원에 나가서 차를 마신 게 몸에 무리가 많이 갔던 걸까? 앞으론 부축할 만한 인물을 항상 붙여 주마.”

아니요. 차는 맛있었는데요. 제가…….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몸을 왜 못 움직여!”

내가 팔 굽혀 펴기를 너무 많이 했어. 근육 욕심이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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