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92)

7화

기억을 잃기 전의 솔레아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었다. 가끔 일어나서 움직이긴 했어도 늘 조용했다.

원래도 내성적이긴 했지만, 자신의 위로 있는 세 명의 오빠가 모두 입양아라는 걸 알고 나서는 이따금 짓곤 했던 미소조차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저 잔뜩 눈치를 보며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나처럼 약하고 쓸모없는 사람이 이 집안에 태어나선 안 됐어. 내가 태어나기 전이 훨씬 행복했을 텐데. 지금은 나 때문에 다들 욕을 먹고 있잖아. 고작 내 존재 하나 때문에…….’

하녀에게 울음 섞인 소리로 말하는 어린 솔레아의 목소리를 문 너머로 들었던 날 이후로 그레이는 일부러 솔레아에게 더 짓궂게 말을 걸었다.

한 번이라도 솔직하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싶었고, 서로 왁왁 소리를 지르면서 싸우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벽을 허물고 싶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 동생이 기억을 잃더니 벽을 때려 부수고 있어요. 저는 허물기만 바랐는데요.

솔레아를 품에 안은 그레이의 표정이 괴상하게 변했다. 미간은 힘껏 구긴 주제에 입꼬리는 비실비실 올라갔다.

“야. 맞은 건 난데 왜 네 얼굴이 상해?”

“내 얼굴이 뭐.”

“얼굴이 요상해지고 있잖아. 설마 친동생 아니라고 나한테 그렇고 그런 마음 품은 거 아니겠지? 미안한데 나 그런 거 아주 질색이야.”

“미쳤냐!”

소리를 꽥 지른 그레이는 솔레아를 안고 있다는 것도 깜박할 정도였는지 팔의 힘을 풀 뻔하다가 냉큼 다시 그녀를 고쳐 안았다.

“떨어질 것 같으면 좀 버둥거리기라도 해.”

“다리 골절에 뺨까지 맞았는데 엉덩방아쯤이야.”

솔레아의 태연한 말투에 그레이의 한숨이 더욱 짙어졌다.

“……그렇다고 뺨을 맞으면 어떡하냐.”

“뺨 정도는 맞아 줘야 합의금을 받지.”

“뭐?”

“있어, 그런 거.”

법의 철퇴는 안 맞더라도 가문의 철퇴 정도는 때릴 수 있겠지. 힘 있는 공작가라면 말이야.

합의금 같은 거 들어오면 나한테 주면 좋겠다. 이 세계에서 사용하는 돈이라면 금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머릿속으로 금은방 아저씨와의 짜릿한 독대 타임을 가지고 있는 솔레아는 뻘겋게 부어오른 뺨 따위는 아무렇지 않았다.

엄마에게 버려지고, 아버지를 버리는 굴레 속에서 자신은 내내 혼자였으니까.

이 꼴 저 꼴 보며 살다 보니 삶에 정답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가끔은 맞아 주는 게 나았고, 또 어떨 땐 미친년처럼 물어뜯어 작은 몫이라도 챙겨야 할 때가 있었다.

여기라고 다를까. 뭐, 이제 와서 따귀 정도야 별스럽지도 않다.

“그레이.”

“왜.”

“그 금발네 집 돈 많아?”

“……몰라.”

“공작가의 딸을 위협했으니까 돈 좀 뜯어낼 수 있지 않을까.”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솔레아의 태도에 인상을 잔뜩 찌푸린 그레이는 하녀가 빈방의 문을 열기도 전에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

방 안을 성큼성큼 걸어가 솔레아를 침대에 내려놓은 그레이는 냉랭한 말투로 대답했다.

“……돈만 뜯어내는 걸로 되겠냐.”

그 빌어먹을 팔도 뜯어야지.

두꺼운 이불이 서걱대는 소리에 그레이가 짧게 덧붙인 말을 듣지 못한 솔레아는 편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레이는 평소의 짜증 섞인 말투로 잔소리를 시작했다.

이제 다 알게 됐으니 하는 말이지만, 너는 공작가의 뒤를 이을 소공작이니 본인이 얼마나 귀한 사람인지 더 확실히 깨달아야 한다. 그러니 앞으로 그런 위험한 짓은 하지 마라. 내가 너를 호위하는 기사가 되긴 할 테지만 24시간 옆에 붙어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방금 같은 일이 또 생기면 어떡할 거냐. 네 스스로 몸을 지키는 방법도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맞길 왜 맞냐. 맞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찾아야지. 네 몸을 인질 삼아서 뭔가를 뜯어내려는 심산이었다면 아주 단단히 잘못 생각했다.

어쩌구저쩌구 블라블라.

솔레아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레이를 바라보다 물었다.

“왜 잘못 생각한 건데.”

그레이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약점을 잡을 수 있다면 잡아야지.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이었잖아.”

힘이 들어간 입술을 애써 꾹 다물었다가 천천히 한숨을 내쉰 그레이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너를 지킬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짓을 해.”

그레이를 뚫어져라 보고 있던 솔레아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배 안쪽 어딘가가 뜨끈하게 지져지는 기묘한 기분에 솔레아는 시선을 반대로 돌리며 일부러 너스레를 떨었다.

“나도 사지만 멀쩡했으면 그렇게 안 보냈지. 차례차례 머리끄댕이를 잡아다가 자진모리장단으로 휘뚜루마뚜루 돌린 다음에 머리털을 오독오독 쥐어뜯어서 치실로 썼을 건데.”

“……어?”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언사라 그레이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과장해서 말하긴 했지만 진심이었다. 부모 없는 거지새끼라는 말은 이제 어디서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게 저를 향한 게 아니더라도.

그때 마침 디에르고 공작과 헤이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공작의 두 눈 가득 볼을 시뻘겋게 물들인 솔레아가 들어왔다.

“솔레아!”

뛰다시피 침대로 빠르게 다가오는 공작의 뒤로 미간을 잔뜩 찌푸린 헤이먼이 따라 걸어오며 말했다.

“아버지. 사용인들에게 들으니 전부터 저택을 드나들던 그 세 명이 솔레아에게 막말을 한 걸로도 모자라 우리 가문의 땅을 빌려 사업을 시작하자는 무리한 제안을 계속해서 했다고 합니다. 레아는 마음이 약해서 여태 아버지에게 말하지 못한 거겠죠. 그렇지?”

“……예, 그랬겠죠. 저야 기억이 안 나니 오늘 일이 처음 같았지만, 대화를 나눠 보니 전부터 그런 식으로 굴었던 것 같았어요.”

그래, 전부터 그랬겠지. 그리고 진짜 솔레아라면 헤이먼의 말처럼 혼자서 싸안고 있었을 거다.

근데 헤이먼 쟤 표정이 왜 저렇게 굳어 있지.

뒤통수에 감겨 오는 이 쎄함. 이목구비 조화가 냉미남이라 그런가.

자고로 한국인의 ‘쎄’라 함은, 미래에서 보내는 텔레파시이자 모진 풍파를 겪으며 살아온 인생의 빅 데이터를 도출한 결과물인데.

솔레아가 속으로 뻘한 생각이나 하고 있는 사이, 공작의 얼굴은 점점 더 차갑게 식어 갔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레아. 위험한 일이 있었으면 나한테 말했어야지. 아프진 않니?”

“괜찮아요. 겨우 따귀 한 대인데요. 별로 아프지도 않았고요. 이걸 빌미로 가문을 욕하고 다닌 것까지 다 묶어서…….”

“뭐?”

“잘된 일이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

“빌미라니!”

이쪽 세계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디에르고 공작의 화난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두 눈을 크게 뜬 디에르고 공작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크게 외쳤다.

“아빠 앞에서 어떻게 빌미라는 말을 써! 세상 어느 아빠가, 어느 오빠가! 네 따귀값으로 눈엣가시인 자를 치운다 하겠어! 품이 얼마가 들든, 자식들에겐 비 한 방울도 맞히기 싫은 게 부모 마음인데! 어떻게 아비 면전에서 제 몸이 빌미라는…….”

디에르고는 속상한 마음에 언성을 높이다가 문득 솔레아의 반응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동그란 눈을 크게 뜬 솔레아는 두 손으로 이불을 터뜨릴 듯 감아쥔 채 굳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희던 피부는 퍼렇게 질리다 못해 시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레아?”

아래턱이 잘게 떨려 올 정도로 겁에 질린 솔레아는 디에르고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지 못했다.

당황한 디에르고가 솔레아에게 손을 뻗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곤 들리지도 않을 정도의 작은 음성으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뭐?”

“죄송해요. 안 그럴게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아빠. 죄송해요.”

숨을 쉬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솔레아는 빠르게 말을 뱉어 냈다.

기억을 잃은 이후의 솔레아에게서 처음으로 ‘아빠’라는 말을 들었지만 이런 걸 원한 건 아니었다.

디에르고는 솔레아에게 뻗었던 손을 얼른 걷어 갔다.

“레아. 괜찮니?”

“잘못했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레아, 아빠 좀 보렴.”

최대한 다정한 말투로 말했지만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솔레아의 눈에는 작은 이슬이 맺혀 있었다. 빛이 반사된 눈망울은 아름답게 반짝였지만 그 낯은 전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었다.

“잘못했어요. 아빠. 제가 다 잘못했어요.”

분명히 디에르고를 바라보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솔레아의 눈은 어딘지 모르게 초점이 흐렸다.

디에르고는 입술을 힘주어 꾹 다물며 솔레아에게서 천천히 한 걸음씩 멀어졌다. 손이 닿지 않을 만큼 멀어진 후, 솔레아의 시선이 다가오자 디에르고는 표정을 느슨하게 풀고 낮은 목소리로 차분히 말했다.

“미안하다. 속상하다고 해서 소리를 지르면 안 됐는데, 미안하다. 레아.”

몇 번이나 거듭해서 사과한 공작은 솔레아가 놀라지 않도록 느린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헤이먼은 솔레아를 가만히 바라보며 몇 번이나 입을 달싹였지만 결국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고 이내 공작을 따라 나갔다.

“……야. 괜찮아?”

그레이는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솔레아는 저도 모르게 그레이의 옷자락을 붙잡고 닫힌 방문을 보다가 몇 분 후에야 대답했다.

꽤나 멀쩡한 것 같은 밝은 음성이었다.

“아, 갑자기 큰 소리를 들어서. 이제 괜찮아. 좀 놀라서 그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솔레아는 여전히 그레이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레이는 조심스럽게 솔레아를 돌아보며 다시 물었다.

“옆에 있어 줄까?”

“아니! 괜찮아, 진짜. 혼자 있어도 돼.”

아까 분명 눈가에 눈물이 맺힌 걸 봤는데 지금은 거짓말처럼 티 없이 맑은 얼굴이었다. 방금 전까지 패닉 상태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하지만 여전히 가쁘게 오르락내리락 움직이는 흉부가 눈에 들어왔다.

그레이는 가만히 솔레아를 내려다봤다.

“야. 손잡는다. 놀라지 마라.”

“잉? 손을 왜 잡아.”

인상을 구기며 신경질을 내는 솔레아의 태도에도 그레이는 아랑곳 않고 제 옷자락을 잡은 솔레아의 손을 부드럽게 손안에 쥐었다.

한 손에 들어오고도 남는 작고 약한 손이었다.

차갑게 식은 솔레아의 손끝부터 그레이의 체온이 옮겨 가며 더디게 데워졌다.

힘들 때 곁에 있어 주고 싶었다.

출신이 아니라 함께 나눈 시간과 추억이 가족을 만드는 거라고 믿었으니까.

돌아가신 공작 부인이 제게 가르쳐 주신 것 중 가장 귀한 가르침이었다. 가면을 뒤집어쓴 동생에게 괜찮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몇 분이 지난 후, 솔레아의 숨소리가 점점 가라앉았다. 곧이어 솔레아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태연하게 딴지를 걸어왔다.

“……저기요. 그레이 씨. 아까도 말했지만 동생한테 작업 걸고 그러면 안 됩니다.”

“너 진짜 미쳤냐!”

감성으로 촉촉하게 젖어 가던 그레이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불에 덴 것처럼 솔레아의 손을 뿌리쳤다.

“너, 너는! 애가! 어? 아프고 나더니, 어?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그러게 손을 왜 잡아! 너 금지된 사랑 그런 거 읽고 싶으면 동네 서점 가서 찾아 읽어! 렘샤 부인 한번 읽더니 머릿속에 마구니가 꼈네!”

“마구니가 뭐야! 그리고 렘, 렘샤 부인은 내가 읽고 싶어서 읽은 게 아니라 네가 읽던 걸 내가 대신 읽어 준 거지! 그리고 그러려고 손잡은 거 아니잖아!”

“엄멈멈머, 그러면 다 큰 오빠가 동생 손을 왜 잡았대!”

“야!”

“왜!”

짓궂게 놀려 오긴 했어도 솔레아는 아까보단 훨씬 편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레이는 그 이후로 공작이 보낸 의술사가 찾아와 솔레아의 다친 몸을 마력으로 회복시켜 주는 동안에도 떠나지 않고 옆에 서서 계속 아웅다웅 싸워 댔다.

“으이구, 몸이 아주 만신창이다. 선생님이 마력 일주일 치는 너한테 쏟아붓고 가시겠네.”

“이 회색 동태눈깔아. 이 중에 90%는 네가 때려 부순 거야. 무식하게 사람을 걷어차냐.”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잠깐만. 동태눈깔? 너 동태눈깔이라고 했냐?”

“너 동태가 뭔지는 알고 화내니?”

“이게 진짜. 다 나으면 보자.”

“지금도 보고 있잖아.”

두 사람을 보며 허허 웃던 의술사는 솔레아를 치료한 뒤 조심히 방을 빠져나갔다.

두 분 참, 우애가 좋은 듯 안 좋은 듯 좋은 것 같은 남매군요.

늦은 밤, 방으로 돌아간 솔레아는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일은 명백한 실수였다. ‘아빠’라는 사람이 소리를 지른다고 굳어 버리다니. 진짜 아빠도 아닌데.

한참 뒤척이고 있자니 무언가가 창문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절뚝거리며 창가로 가 커튼을 젖히자 금색 안개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눈이 부셔 눈을 잠시 찡그렸다가 다시 똑바로 뜨자 노란빛을 뿜어내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은 인영들이 눈에 들어왔다.

밝게 빛나는 금색 그림자들은 창문 밖에서 익살스럽게 오들오들 떠는 시늉을 하더니 정중하게 노크를 했다.

“하하, 이게 뭐야.”

창문을 살짝 열어 주자 그들은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와 신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잔잔한 음악도 함께 들려왔다. 얼떨결에 금빛의 인영들이 이끄는 대로 침대로 간 솔레아는 얌전히 모로 누운 뒤 탁상 위에서 돌아가며 춤을 추는 인영들을 오래도록 지켜보다 천천히 잠이 들었다.

2